산청 범학리 삼층석탑(山淸 泛鶴里 三層石塔)
산청 범학리 삼층석탑(山淸 泛鶴里 三層石塔)
  • 나각순 서울시사편찬위 연구간사
  • 승인 2011.06.03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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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각순의 ‘서울문화유산 돌아보기’ 41]

산청(山淸) 범학리(泛鶴里) 삼층석탑(三層石塔)은 높이 4.8m의 2층 기단부(基壇部)에 3층 탑신부(塔身部)를 갖춘 통일신라시대 9세기 초반의 화강암으로 된 일반형 석탑이다.

현재 용산구 용산동6가 168-6번지(서빙고로 135) 국립중앙박물관에 있으며,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105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석탑은 본래 경남 산청군 산청읍 범학리 범호사(泛虎寺)라고 전해 내려오는 절터에 무너져 있었는데, 1941년 경 대구의 일본인 골동품상이 구입하여 일본인 공장에 옮겨 놓았다. 광복 후 정부에서 압수하여 1947년 종로구 세종로 1번지 경복궁 내에 다시 옮겨 세웠다. 이후 2005년에 국립중앙박물관을 용산으로 이전하면서 같이 옮겨와 야외전시관에 세워놓았다.

이 탑의 기단부는 2층의 기단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지대(地臺)와 기대(基臺)는 경복궁의 옮겨 재건할 때 시멘트를 보강하여 원래의 구조를 알 수 없게 되었다. 하층 기단의 면석은 전부 4개의 판석이 이용되었고, 각 면 양쪽에 2개의 우주(隅柱)와 그 사이 2개의 탱주(撑柱)가 정연하게 모각되어 있다. 하층 기단 갑석(甲石) 상면 중앙에는 원호(圓弧)와 굄대를 새겨 밖으로 돌려 상단 기단을 받치고 있다.

상층 기단 역시 4매의 판석이 사용되었고, 각 면 양쪽에 2개의 우주와 그 사이 1개의 탱주가 돌출되어 있다. 그리고 탱주로 나누어진 상층 기단의 면석에는 연화좌(蓮華坐) 위에 팔부중상(八部衆像, 천·용·야차·건달바·아수라·가루라·긴나라·아후라)이 양각(陽刻)되어 있다.

상층 기단의 갑석은 3매의 판석으로 덮여져 있는데, 아래 면에는 부연(附椽)이 마련되어 있으며, 윗면의 중앙에는 2단의 굄대를 마련하여 옥신부(屋身部)를 받치고 있다.

탑신부는 옥신(몸돌)과 옥개석(屋蓋石)이 각각 하나의 돌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층 옥신의 양쪽에는 우주가 정연하게 새겨져 있다. 단 1층 옥신 각 면에는 연화좌 위에 보살좌상이 1구씩 조각되어 있는데, 우아한 모습을 하고 있다.

각 층 옥개석 받침은 4단씩이며 옥개석 윗면에는 2단의 굄대를 조성하여 바로 위층의 옥신을 받치고 있다. 낙수면(落水面)은 얇고 평평하며, 4면의 합각이 날카롭고 날렵한 느낌을 주고 있다. 처마 밑의 선은 평행으로 나아가고 있는 반면, 낙수면의 네 귀퉁이의 반전(反轉)은 강하게 표현되어 있다.

따라서 전체적으로 탑신부에서 경쾌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다만 3층 옥개석에서 네 귀퉁이 전각부(轉角部) 양측에 구멍 2개씩이 있는 특색을 찾을 수 있는데, 풍경이 설치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상륜부는 모두 잃어버려 남아 있는 부분이 하나도 없다.

탑에 새겨진 문양의 특징으로 기단부나 탑신부에 팔부중상이나 사천왕상․보살상․불상 등 여러 상들을 조각하여 장식탑(裝飾塔)이라고 불리는 탑에 장식적 요소를 첨가한 것은 통일신라 후반기부터 보이기 시작한다.

부조상(浮彫像)을 조상하는 데는 정해진 규칙은 없으나 탱주 수에 의해 구획되어지는 면의 수와 연관하여 하층 기단에서 상층 기단 그리고 탑신으로 올라갈수록 사자-팔부중상-보살-부처 순의 권위가 더 높은 상들을 배열하는 것이 일반적인 예이다.

이 석탑에서는 상층 기단과 1층 옥신에만 상이 새겨져 있으나, 때로는 하층 기단까지 상을 새기는 경우도 있다. 이 석탑에서는 상층 기단에 팔부중상과 1층 옥신에 보살상을 새김으로써 탑에서 느낄 수 있는 장중하고 소박한 맛은 덜하지만, 장식적 요소의 첨가로 화려한 맛이라는 또 다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전체적으로 이 석탑은 2층의 기단부에 3층의 탑신부를 갖추고, 상층의 기단과 1층의 옥신이 높아 날렵한 체감률(遞減率)을 보이면서 상쾌한 인상을 주는 것이 통일신라시대의 일반형 석탑을 그대로 잘 계승하고 있다고 하겠다.

다만 4단의 옥개받침과 기단부의 갑석과 탑신부의 옥개석 추녀가 비교적 얇아진 점, 하층 기단의 2개의 탱주와 상층 기단의 1개의 탱주라는 탱주 수의 감소, 면석에 팔부중상과 보살상의 장식성을 가미하고 있음을 볼 때 시대가 통일신라 전성기 때보다 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어 대략 9세기 초반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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