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양동 금동관음보살입상(三陽洞 金銅觀音菩薩立像)
삼양동 금동관음보살입상(三陽洞 金銅觀音菩薩立像)
  • 나각순 서울시사편찬위 연구간사
  • 승인 2011.06.10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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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각순의 서울문화유산 돌아보기 42]

▲ 서울 삼양동 금동관음보살입상.
서울 삼양동(三陽洞) 금동관음보살입상(金銅觀音菩薩立像)은 불상 높이 20.7cm로 삼국시대 후기에 만들어진 부처님 조각상이다. 현재 용산구 용산동6가 168-6번지(서빙고로 135) 국립중앙박물관에 보존되어 있으며, 1968년 12월 19일 국보 제127호로 지정되었다.

삼양동 금동관음보살입상은 1967년 서울특별시 성북구 삼양동(지금은 미아제1․2동 일대) 삼각산 동남쪽 기슭에서 발견된 것으로, 세종로 1번지 경복궁 내 국립중앙박물관에 옮겨졌다가 다시 박물관이 용산으로 이전되면서 같이 옮겨졌다.

현재 보존된 모습은 발목 윗부분에 금이 가고 광배(光背)를 결실한 상태이나, 전반적으로 모양이 완전하며 황금색 도금이 잘 보존되어 있는 등 보존상태가 좋은 편이다. 전체 모습은 몸에 비해 얼굴과 상체가 큰 편인데 어깨가 좁아 위축된 느낌이며, 배 부분을 약간 앞으로 내밀고 있어 옆에서 보면 활처럼 휘어진 모습이다.

머리 위에는 삼면보관(三面寶冠)을 쓰고 있는데, 보관 정면에 연화대좌(蓮花臺坐) 위에 앉아 있는 화불(化佛)이 새겨져 있어 관음보살(觀音菩薩)의 특징을 표현하고 있다. 이렇게 관음보살의 특징으로 보관에 화불이 새겨진 경우는 6세기 말의 보살상에서 나타나기 시작한다. 따라서 이 관음보살상은 비교적 이른 시기의 예에 속한다.

얼굴 모습은 통통한 편으로 눈을 지그시 감고 있으며, 콧날은 날카롭게 표현되었고 입가에는 약간의 미소를 띠고 있어 어린아이와 같은 표정을 하고 있다.

목은 유난히 굵게 표현되어 있는데, 삼도(三道)가 표현되지 않고 꽃잎으로 목걸이만 장식되어 있다. 천의(天衣)는 양어깨를 덮으면서 흘러 내려와 배와 무릎 부분에서 두 번 늘어져 있는데, 양 팔에 걸쳐진 천의자락이 대좌(臺座)까지 내려오지 못하고 매우 짧게 표현된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천의 표현은 중국 북제(北齊)를 비롯하여 북주(北周)․수대(隋代)의 불상조각에 나타나는 특징이다. 가슴 위로 비스듬히 걸친 내의(內衣)와 굵은 주름으로 접혀진 군의(裙衣)에서는 세부표현이 생략되고 단순화되어 있다.

오른손은 정병(淨甁)을 들고 있고 왼손은 역시 약간 위로 들어 엄지손가락과 검지손가락으로 V자 모양으로 벌리고 있어 어떤 지물(持物)을 쥐고 있던 것으로 보인다.

둥근 홑겹으로 이루어진 대좌 위에 연화대좌를 마련하였는데, 커다란 복련(覆蓮)만으로 구성된 고식(古式)의 조각 기법을 보여주고 있다. 다소 투박한 모습을 하고 있는데, 연꽃잎은 큼직하면서도 끝부분이 예리하게 처리되었다.

불상의 뒷면에도 보관 밑으로 내려온 머리카락이 두 갈래로 나누어져 양 어깨 위에 내려와 있고 넓은 천의를 어깨에 두르고 있는데 U자형의 옷 주름이 표현되어 있다. 그리고 머리 뒤에 있는 작은 구멍으로 미루어 원래 광배가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 관음보살입상은 건장한 신체에 긴 목을 하고 있으며, 통통하면서도 갸름하고 부드러운 얼굴모습이나 신체 표현, U자형으로 길게 늘어진 옷 주름, 이중으로 늘어진 천의자락, 단순하고 간략화된 세부 표현 등의 양식적 특성으로 삼국시대 후기인 7세기 전반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아울러 삼국시대 후기에 유행하였던 관음신앙의 단면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가 된다.

더욱이 이 보살상이 발견된 삼양동 지역(성북구 미아동 일대)은 처음에는 위례성(한성)에 도읍한 백제 영역이었다. 이후 고구려에 의해 77년간 그 영향권에 속하였다가 다시 신라가 점령하는 등 정치적·군사적으로 통치 주체가 교체된 요충지로서 새로운 요소가 결합되는 독특한 성격의 불교문화를 형성했던 곳으로 보인다.

한편 이 불상의 발굴 과정에 대하여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한다.

문화재청(당시 문화재관리국)에는 1961년부터 문화재의 가치와 그 의미를 국민들에게 계몽하고 문화의식을 높이기 위하여, 매장문화재가 신고 되면 보상금을 지급하였다.

이에 1967년 1월 삼양동에서 삼국시대 금동관음보살입상을 발굴하여 신고한 52세의 박용출(朴龍出)에게 당시 120만원의 거금이 지급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기록적인 보상금을 발견자에게 안겨준 금동관음보살입상의 발굴경위는 정말 우연한 횡재였다.

박용출은 청량리에서 살던 판잣집이 철거되어 삼양동 산108번지 국유지에 천막을 짓고 정착하였다. 부인이 채소를 팔아 8식구가 겨우 먹고 사는 형편이었다. 이즈음 박용출은 발굴하기 며칠 전 집 뒤 산비탈이 무너져 온 식구가 깔려죽는 무서운 꿈을 꾸었다고 한다.

꿈이라도 불안했던 그는 천막 뒤 산비탈 쪽에 배수로를 깊게 파기로 했다. 1m 쯤 땅을 파고 내려갔을 때 괭이 끝에서 예리한 금속성이 들려, 흙 주위를 헤쳐 보니 뜻밖에 금동불상이 나타났다.

박용출은 이 불상을 파내 며칠간 집에 모시고 있다가 불상전문가인 동국대학교 황수영(黃壽永) 교수에게 갖고 가 감정의뢰를 하였다. 이에 황수영 교수는 이 불상을 보고 깜짝 놀라 당국에 신고할 것을 종용하고, 학계에 이 사실을 보고해 새로운 국보가 탄생하게 되었다고 한다.

(경향신문 1975년 5월 24일자 5면 <문화재발굴사건과 비화>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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