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진 정사(政事)의 산실, 창덕궁 인정전
어진 정사(政事)의 산실, 창덕궁 인정전
  • 나각순 서울시사편찬위 연구간사
  • 승인 2011.09.08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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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각순의 '서울문화유산 돌아보기'-51]

▲창덕궁 인정전.
창덕궁(昌德宮) 인정전(仁政殿)은 창덕궁의 정전으로 나라의 주요 행사나 문무백관의 조회(朝會)를 받고 외국사신을 맞이하던 곳이다. 또 군신 간에 새해 인사를 나눌 때와 왕세자와 세자빈을 책봉할 때, 대비의 수연 등 경사가 있을 때 왕이 나아가 신하들의 축하를 받던 곳이기도 하다.

한편 창덕궁 인정전은 임진왜란 이후 경복궁이 소실되어 복원되지 않았던 273년 간의 기간에는 법궁의 정전이 되어 조선왕조 후기의 역사상 중심 무대가 되었던 데서 큰 의미가 있는 궁전이다.

인정전은 태종 5년(1405) 처음 창덕궁이 창건될 때 지어졌다가, 태종 18년에 인정전이 좁다고 하여 중건하였다. 이어 세종 즉위년(1418) 7월에 박자청(朴子靑)으로 하여금 고쳐 짓게 하여 2개월 만에 준공하였다. 그 뒤 단종 때 해체 보수공사가 있었으며, 임진왜란으로 인해 불탄 것을 광해군 원년(1609)에 중건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때는 인정전만 화재를 면하였으며, 1777년(정조 1) 9월에 이전에 없던 품계석(品階石)을 인정전 앞뜰에 설치하였고, 이후 다른 궁에도 품계석을 설치하게 되었다. 동쪽은 문신들이 서게 되며, 서쪽은 무신들이 서게 되는데 좌우 에 1품에서 3품까지는 정(正)·종(從)으로 4품에서 9품까지는 정의 품계석이 설치되어 각 열 12개씩 모두 24개의 품계를 새긴 돌이 세워져 있다.

순조 3년(1803)에 다시 화재를 당하여 이듬해 중건되었다. 다시 헌종 8년(1842)에 대대적인 수선공사가 있었고, 철종 7년(1856)에 와서 건물이 퇴락하여 완전 해체 보수공사를 하였다. 이때에는 순조 4년의 중건(重建) 예를 그대로 따랐으므로 건축 양식에는 변화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1907년 고종이 순종에게 양위하고 나서 순종은 창덕궁에 이어하였는데, 이 무렵 창덕궁에 서양식 가구와 실내장식이 도입되었다. 인정전 내부의 회흑색 전돌로 깔린 실내바닥을 서양식 쪽널마루로 만들고 전등이 설치되었다. 출입구를 제외한 창문 아래 부분의 외벽에 전벽돌로 쌓았던 화방벽이 철거되고, 대신에 목재로 큼직한 머름대와 궁판으로 바꾸었다.

창문 내측에 별도의 오르내리창이 설치되고, 휘장을 설치하기 위한 커튼 박스도 만들어졌다. 지붕의 용마루 양성에 당시 이왕가를 상징하는 오얏꽃문장〔李花紋章〕을 장식하여, 한 국가의 상징 건물을 한 가문의 건물로 격을 낮추었다. 그러나 현존 인정전은 순조 4년 때의 양식을 그대로 간직하여 이때의 건물로 볼 수 있다.

인정전은 정면 5칸, 측면 4칸, 2층 팔작 기와지붕으로 된 내9포·외7포의 다포(多包)집으로 국보 제225호로 지정되어 있다. 조선 궁궐의 정전이 공통적으로 5칸인 것은 황제국인 중국의 7칸 규모에 대하여 제후국의 의례적인 관계를 엿볼 수 있는 구조이다.

기단은 2중의 월대로 되어있는데 이것도 중국의 3중 월대와 비교된다. 월대의 짜임은 지대석(地臺石) 위에 이중의 장대석(長臺石)을 쌓고 그 위에 부연(附椽)이 있는 장대갑석을 놓았다. 상월대의 길이는 45척, 아래 월대 길이는 61척 5치이고, 북쪽의 낙수첨계(落水檐階) 즉 댓돌은 10척이다.

기단 전면 중앙과 그 좌우에 3단의 돌계단이 설치되어 있는데, 이는 월대 앞뜰에 놓여 있는 삼도로 된 어도와 이어져 있다. 중앙의 소맷돌에는 돌짐승의 머리가 조각되어 돌출되어 있고, 가운데 답도 중앙의 판석 위에는 구름이 에워싼 가운데 한 쌍의 봉황새가 조각되어 있고 그 앞면과 양쪽 계단석 앞면에는 당초문(唐草文)을 새겼다.

나래를 활짝 펴고 구름 속을 노니는 봉황새의 양각된 모습은 왕실을 상징하는 문양이고, 그리고 계단석 앞면에 양각으로 새겨진 당초문 넝쿨무늬는 민초(民草)라 하며 백성을 상징한다. 즉 민초들이 옹위하는 왕실로 하늘의 천손이 백성들과 어울려 사는 홍익인간(弘益人間) 이화세계(理化世界)를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삼도와 상월대 및 기단은 전돌로 마감되어 있고, 하월대와 삼도 밖의 조정 마당은 모두 부정형의 박석(薄石)을 깔았다. 그리고 인정전 뒤에는 담장 아래 5단의 화계(花階)가 조성되어 있다. 인정전 건물은 이중기단 위에 장대석 댓돌을 한단 더 높이고 그 면에 원형 초석을 놓고 초석 높이와 같게 고막이돌을 짜 돌렸다.

기둥은 모두 원주(圓柱)로 하층은 10개의 평주(平柱)와 10개의 고주(高柱), 그리고 4개의 우고주(隅高柱, 모퉁이 기둥)로 되고, 중앙 후면 고주와 평주간(平柱間) 사이에 방형 평면의 옥좌(玉座)가 놓였다. 상층도 18개의 병연주(幷聯柱)와 하층에서 올라오는 우주(隅柱)와 고주로 구성되었다.

하층의 축부(軸部)는 전면 중앙 3칸과 후면 중앙의 1칸, 좌·우측의 1칸만을 문비(門扉)를 달기 위하여 하방(下枋)만을 짜 돌렸고 그 외의 문은 모두 사분합(四分閤)의 광창(光窓)을 들이기 위하여 높직한 머름창방을 짜 돌렸다.

사분합 위 즉 기둥 윗몸에는 창방(昌枋)이 결구(結構)되고 그 위에 평방(平枋)을 놓아 공포를 받았다. 상층은 멍에창방 위로 중방을 들여 빗살문의 교창(交窓)을 받게 하고 그 위는 하층과 마찬가지로 하였다.
외관상으로 보면 하층의 창호는 사면에 고창을 두고 전후의 중앙 칸만 문이 네 짝인 4분합문, 나머지는 모두 3분합문이고, 2층에는 사면에 교살창만 설치하였다.

현재 하층의 문을 여닫는 방법은 모두 밖으로 여는 형식인데, 일제 때 개수되기 전에는 정면 양단부의 협칸(夾間)은 아래를 밀어 밖으로 열거나 뗄 수 있게 되어 있었고, 나머지 문은 모두 안쪽으로 열게 되어 있었다. 이는 각종 행사나 잔치 때 정전 앞에 차일을 높이 설치함에 있어서 장애가 되지 않게 한 것으로 보인다. 지금도 차일을 치기 위한 쇠고리가 기둥과 평방, 그리고 상월대의 마당에 박혀있다.   

공포의 짜임은 상·하층 같게 내4출목, 외3출목으로 밖은 삼제공에 모두 쇠서를 만들고 그 위에 삼분두(三分頭)된 보머리를 두었다. 내부는 살미첨차 뒷몸이 모두 한데 모여져 운궁(雲宮)이 되고 이 운궁이 뻗어 올라가 주간(柱間)에서는 내목도리(內目道里)를 받았고 보 아래에서는 보를 받는 양봉(樑捧)이 되었다. 가구(架構)는 고주간(高柱間)을 대량(大樑, 대들보)이, 4면의 툇간(退間)에는 고주와 평주간을 퇴량(退樑)이 지나도록 하였다.

천장은 우물천장인데 고주 내의 정간(正間) 천장과 툇간의 천장과는 규모를 달리 하였다. 고주 사이 중앙 천장에는 보상화문(寶相華紋) 등을 투각한 운궁(雲宮)과 낙양 초각(草刻, 화초무늬를 새긴 장식)을 설치하고 그 위쪽으로 감입(嵌入)하는 형식의 보개천장(寶蓋天障)을 시설하였다.

그 가운데 꽃구름 사이에 한 쌍의 봉황과 여의주을 조각하여 매달아 놓아 구름 위로 봉황이 날아가는 듯하다. 정간 우물천장의 청판에도 한 쌍의 봉황을 그렸고 툇간에는 6엽의 연화문을 각각 5개씩 채색하여 그렸다.

그 아래 고주 어간에 용상(龍床)이 있다. 여기에는 보개를 높이 달고, 따로 꾸민 닫집에 어좌를 놓았다. 원래는 전돌을 깐 바닥 위에 높다란 평상 위에 놓고, 이곳에 오르는 계단〔寶階〕과 난간〔寶欄〕을 둘렀으며, 용상 뒤로 곡병(曲屛)과 일월오봉(日月五峰, 또는 日月五嶽)·십장생(十長生)이 그려진 병풍을 둘러 설치하였다. 이로써 일월의 음양의 조화 속에서 국토를 지키는 오악의 신이 보우하여 국가의 경영이 원만하게 이루어지기를 기원하였던 것이다. 

일월오봉 병풍은 임금의 내실에도 장식되었고, 의궤에 보면 야외행사 때 왕의 자리를 이 그림으로 상징하였다. 또 어진 제작 때는 가리개로 만들어졌으며, 중간 점검 때는 여기에 걸어놓고 보았다. 그림의 내용은 해와 달, 그리고 수·금·목·화·토를 상징하는 5개의 산봉우리, 넘실거리는 파도, 한 쌍의 폭포, 네그루의 소나무 등이 대칭으로 그려져 있다.

이러한 일월오봉도의 자연 상징은 《시경(詩經)》의 <천보(天保)> 시의 내용을 표현한 것으로 해석된다.

용상 뒤의 곡병(曲屛)과 일월오봉(日月五峰, 또는 日月五嶽)·십장생(十長生)이 그려진 병풍.
즉 “하늘이 당신을 보호하고 안정시키며/ 매우 굳건히 하네./ 높은 산과 같고 넓은 땅과 같으며/ 강물이 흐르듯/ 달이 점점 차오르듯/ 해가 떠오르듯/ 결코 무너지지 않으리./ 소나무이 무성함과 같이/ 당신의 후계 끊임이 없으리. 이렇게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왕권의 상징과 유구한 왕조의 계승을 상징하는 의미가 있으니, 성리학적 정치이념을 간직하며 표현한 그림인 것이다. 나아가 임금의 권위를 뒷받침해주는 장엄인 것이다.

한편 십장생은 불로장생(不老長生)을 상징하는 열 가지 사물과 동식물을 일컫는다. 먼저 자연에서 해·달·산(山)·천(川), 동물로는 거북·학·사슴, 식물로는 대나무·소나무·영지(靈芝, 불로초)를 가리키는데, 그 외에 돌(바위)·물(폭포)·구름으로 표시하기도 하며, 신선의 불로장생을 뜻하는 천도(天桃)를 그리기도 한다.

이러한 십장생은 중국과 일본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우리 문화에서만 보이는 것으로, 신선사상과 민간신앙이 결합되어 만들어낸 독특한 관념체제를 도상으로 표현한 것이다.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궁중장식화이다.

인정전 처마는 겹처마, 각 마루는 양성하고 취두(鷲頭)·용두(龍頭)·잡상(雜像) 등을 배치하고 사래 끝에는 토수(吐首)를 끼웠다. 단청은 반초머리의 모루단청이다. 인정전의 편액은 검정바탕에 흰 글씨로 양각되어 있으며, 액자는 칠보문(七寶紋)을 그렸고 네 귀에는 구름모양을 조각하였다.

현판의 글씨는 죽석(竹石) 서영보(徐榮輔, 1759~1816)가 썼다. ‘인정’의 전각 이름은 순조의 인정전명(仁政殿銘)에서 ‘임금은 인(仁)으로써 신하에게 베풀고, 신하는 인으로써 임금에게 바치면, 정사(政事)가 다스려지고 국가가 태평하리라. 태평하고 또 태평하면 국가가 장구하리라.’라는 뜻에서 나온 것임을 밝히고 있다.

즉 인정전은 ‘어진 정치’를 펴는 곳이라는 뜻이다. 한편 어진 정치는 《맹자(孟子)》에서 강조한 유교(儒敎)의 기본 정치사상인 ‘왕도정치(王道政治)’을 표방한 것이다. 즉 맹자는 공자가 가장 중시한 ‘인(仁, 어짐·사랑)’에서 비롯되는 예치주의(禮治主義)를 한 걸음 발전시켜 덕치(德治)를 왕도정치의 바탕으로 삼았다.

여기서 조선왕조를 이끈 역대 왕들은 덕치를 바탕으로 한 왕도정치를 이상으로 삼고 백성들의 안정과 풍요를 위한 정치를 해나가고자 한 의지를 살필 수 있는 것이다. 현재 숙종이 지은 친히 인정전에 임하여 경사를 칭송하고 하례를 받을 때 지은 시인 ‘어제친림인정전칭경수하시음득시(御製親臨仁政殿稱慶受賀時吟得詩)’와 ‘인정전외연시(仁政殿外宴詩)’, 영조가 인정전에 잠시 머물렀을 때 읊은 시인 ‘어제인정전소위시음성시(御製仁政殿少位時吟成詩)’, 순조의 ‘어제인정전명(御製仁政殿銘)’, 대제학 이만수(李晩秀)가 지은 ‘인정전상량문(仁政殿上樑文)’ 등이 전한다.

인정전에서의 주요 사건을 살펴보면 태종 17년(1417) 정월에 연회를 베풀고 가무를 즐겼다. 세종 1년(1419)에는 임금이 원유관에 강사포를 입고 조하를 받았는데, 이때 승려·왜인·회회인 들이 참여하기도 하였다.

임진왜란 전년인 선조 24년(1591) 여름에 일본의 사신으로 조선의 사정을 정탐하러온 평조신(平調信)과 현소(玄蘇)를 접견하고 향연을 베풀기도 하였다. 1734년 숙종이 즉위하여 박태보 등을 인정전에서 친국하였고, 숙종 16년에는 인정전에서 여우가 울어 불길한 징조라고 조정이 술렁이기도 하였다.

또 경종 1년에는 인정전에서 연잉군(영조)이 세제 책봉을 받았고, 영조 3년에는 세자빈을 책봉하고 인정전에서 백관들의 하례를 받았다. 영조 4년에는 도순무사 오명항(吳命恒)이 이인좌(李麟佐)의 난을 평정하고 돌아오자 모든 신하들에게 술을 하사하고 백관들의 하례를 받았다. 영조 23년(1747)에는 대왕대비(숙종비 인원왕후)의 회갑연을 맞아 하례를 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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