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민주·정의가 숨 쉬는 국립4·19민주묘지
자유·민주·정의가 숨 쉬는 국립4·19민주묘지
  • 나각순 서울시사편찬위 연구간사
  • 승인 2011.10.11 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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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각순의 서울의 문화유산 돌아보기-52]

국립4·19민주묘지는 강북구 수유제4동 산9-1번지에 총면적 9만6837㎡의 부지로 조성돼 있다.

이곳은 우리나라 헌정사상 최초로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부정과 불의에 항거하다가 희생된 선열들의 혼백이 자유·민주·정의로 살아 숨쉬는 묘역이다. 국립4·19민주묘지의 시설은 성역공간 2만9405㎡에 묘역·참배로·유영봉안소·기념관 등이 있으며, 이용공간 7845㎡에 다목적광장·연못·주차장이 있다.

산림공간 5만9587㎡는 잔디밭·산림으로 구성됐고 21m 높이의 탑주 7개가 우뚝 솟은 사월학생혁명기념탑과 기념탑비, 7m 높이 화강암 탑주 20개로로 구성된 만장과 수호자상·자유의 투사·수호예찬의 비·정의의 불꽃·민주의 뿌리 등 11종의 조형물이 있다. 

묘역은 2009년 현재 모두 4개 묘역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제1 묘역은 4·19혁명 당시 사망자와 부상 후 사망한 사람, 제2묘역은 4·19혁명 부상자로서 나중에 사망한 사람, 제3묘역은 4·19혁명 유공건국포장수상자의 묘역이며, 제4묘역은 예비묘역으로 돼 있다.

안장 능력은 모두 547개 묘로 제1묘역 215기, 제2묘역 108기, 제3묘역 75기, 제4묘역 149기 등이다. 그런데 현재 안장 묘수는 285기로 제1묘역은 215기, 제2묘역은 52기, 제3묘역은 18기, 제4묘역은 비어있다. 안장된 인물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은 고 김주열이 있다.

김주열은 3·15마산부정선거반대시위에 참여하였다가 세상을 떠나 제1공화국 정권의 붕괴와 1960년 4·19혁명의 직접적 도화선이 된 인물이다. 또 중앙대 남녀학생으로 혁명에 참가 순국한 후 영혼결혼식을 올린 고 서현무·김태년 학생, 유서를 남긴 고 진영숙 학생 등이 남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유영봉안소는 4·19혁명정신의 승화 공간으로, 희생자의 영정과 위패를 모시고 있다. 매년 4월 18일에 유족과 4·19단체 회원 등이 참석하여 추모제를 올리고 있다. 4월학생혁명기념탑은 국립4·19민주묘지 중앙에 위치하고 있으며, 높이 21m의 화강석 탑주 7개로 구성되어 있다.

1960년 4월 불의와 독재에 항쟁하다가 희생된 4·19혁명 희생정신을 기리고자, 1962년 3월 23일 재건국민운동본부 안에 각계각층을 망라한 기념탑건립위원회를 구성하고, 1962년 11월 21일에 기공하여 전국민의 성금과 국고보조로 1963년 9월 20일 제막식을 거행하였다. 설계?조각은 김경승金景承, 문장은 이은상李殷相, 글씨는 김충현金忠顯이 썼다. 그리고 기념탑비의 비문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960년 4월 19일 이 나라 젊은이들의 혈관 속에 정의를 위해서는 생명을 능히 던질 수 있는 피의 전통이 용솟음치고 있음을 역사는 증언한다. 부정과 불의에 항쟁한 수만 명 학생대열은 의기의 힘으로 역사의 수레바퀴를 바로 세웠고 민주제단에 피를 뿌린 185위의 젊은 혼들은 거룩한 수호신이 되었다. 해마다 4월이 오면 접동새 울음속에 그들의 피묻은 혼의 하소연이 들릴 것이요 해마다 4월이 오면 봄을 선구하는 진달래처럼 민족의 꽃들은 사람들의 가슴마다 되살아 피어나리라."

4·19혁명기념관은 2층 건물로 1층에는 4·19혁명의 배경과 내용을 영상매체로 형상화하여 전시하고 있으며, 2층에는 4·19혁명의 역사적 의의와 재평가에 대한 정보검색과 유물전시장 등이 마련되어 있다. 영상세미나실도 운영하고 있다.

이렇게 국립4·19민주묘지는 이승만정권의 독재와 3·15부정선거에 맨손으로 대항하여 희생을 당한 분들의 안식처로 4·19혁명에 참가하여 우리나라 민주주의를 위해 헌신과 희생하신 분들의 영령들이 잠들어 계시는 성스러운 곳이다.

또한 선열들의 혼이 담겨있는 성역으로서, 장차 우리나라를 이끌어나갈 동량으로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민주주의의 산 교육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그리고 참배객들에게는 민주혁명의 의의와 생활 속에서 나라사랑 정신을 일깨우고, 내방객들에게는 아름다운 경관과 쾌적한 환경을 조성하여 묘역 전체를 열린 공간으로 활용하게 함으로써 나라사랑 보훈정신의 계승과 민주 성지로서의 의미를 고취하고 있다.

나아가 4·19혁명의 희생자에 대한 예우와 보훈을 통하여 국민정서의 화합과 함께 민족정기의 발현으로 승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국립4·19민주묘지의 연혁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961. 2. 1   국무회의에서 공원묘지 설립 결의 
 1962. 12. 21 기공식(재건국민운동 본부) 
 1963. 9. 20  묘지준공 및 기념탑 제막(199위, 약 1만3000평) 
 1964. 3. 28  서울특별시로 소유권 변경 등기 
 1993. 10. 20 성역화사업 착공(종전 1만3000평에서 4만1000평으로 확장, ‘의거’를 ‘혁명’으로 격상) 
 1995. 2. 1   4·19국립묘지관리소 직제 신설 
 1995. 4. 17  성역화사업 준공 
 1995. 4. 18  국가보훈처로 관리 이전
 1995. 4. 19  4·19혁명 35주년에 ‘국립묘지’로 승격. 재개방
 1997. 4. 19  4·19혁명기념관 개관(우리나라 민주이념의 최고 성지가 됨)
 1997. 4. 25  국립4·19묘지규정 제정(대통령령 15360호) 
 2006. 1. 3   국립4·19묘지에서 국립4·19민주묘지로 개칭
            (국립묘지의설치및운영에관한법률 제7649호)
 2006. 7. 27  국립4·19묘지관리소에서 국립4·19민주묘지관리소로 개칭
             (국가보훈처와그소속기관직제에대한대통령령 제19625호)

그럼 여기서 4·19혁명의 전개과정과 의미를 살펴보자. 4·19혁명은 자유를 위해 정의감에 불타는 학생들과 국민들이 혼연 일체가 되어 독재와 불의를 물리치신 자유·민주·정의에 대한 열망의 결과로서 이 땅에 민주이념의 확고한 정착을 가져온 역사적인 사건이었으며, 그 정신의 계승은 헌법전문에 명시되어 있다.

4·19혁명은 한동안 혁명·의거·학생운동 등으로 지칭되었다가, 5·16군사정변 뒤에 ‘의거’로 공식되었다. 그러다가 1960년대 말부터 단순히 ‘4·19’로 불리는 등 역사적 개념과 가치판단이 정립되지 않았다. 물론 전공학자들은 ‘4·19’ ‘4·19혁명’ 등을 혼용하여 썼지만, 중·고등학교 교과서나 정부의 공식적인 기록은 ‘4·19’ ‘4·19의거’였다.

그러다가 1993년에 이르러 김영상정부가 출범하여 민족사의 정통성 복원사업의 일원으로 의거를 혁명으로 격상시키면서 그 의미를 재조명하여 ‘4·19혁명’으로 평가를 받아 교과서에 사용되고 있다. 광복 후 우리 경제는 자생력을 잃고 외국의 원조에 의존하였으며 이승만 자유당 정권은 자신들의 장기집권을 꾀하며 부산 정치파동, 사사오입 개헌, 반대세력에 대한 폭력 등 온갖 정치적 부정과 탄압을 일삼았다.

그리고 대규모의 부정선거가 자행됨에 따라 이승만정권의 독재를 규탄하고 많은 사람들이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를 요구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국민의식의 민주화는 대체로 광범위한 민주적 교육과 6·25전쟁 후 급속한 도시화의 결과이다. 따라서 정치세력의 판도는 도시지역에서의 자유당 약세와 민주당 강세로 나타나게 되었다.

1950년부터 1960년 사이에 이승만 정권은 공산주의자들과의 휴전협정을 반대하는 대중시위와 행진, 이승만을 재선에 나서도록 부추겼던 대중시위, 일본 당국의 재일교포 북송결정에 항의하는 대중집회 등 대중시위를 조작해 냈지만, 국민 사이에는 점차 인기를 잃어갔고, 경찰력에 유지하는 현상이 되었다.

이러한 시대상황에서 1960년 2월 28일 장면 부통령 선거연설 청취를 방해하는 일요일 등교 지시에 항의하는 대구학생시위가 있었다. 1960년 3월 15일 정부통령선거에 부정선거가 극에 달하였다. 이 날 마산에서 이승만정권의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시민·학생들의 데모에 경찰의 무차별 발포와 체포·구금으로 희생자가 속출하였고, 경찰관서와 자유당 소속 국회의원 및 경찰서장 자택 등이 습격당했다.

이 과정에서 80여 명의 사상자(7명 사망)가 발생했으며, 주모자로 구속된 26명은 공산주의자라는 누명을 쓰고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당시 17세였던 김주열은 이 시위에 참가한 후 행방불명되었는데, 4월 11일 그의 시체가 왼쪽 눈에 길이 17㎝, 폭 3㎝의 미제 최루탄이 박힌 처참한 모습으로 마산 앞바다에 떠오른 것이 한 낚시꾼에 의해 발견되었다.

이에 마산의 모든 시민이 규탄·궐기하여 연 3일에 걸친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김주열의 시신은 1960년 4월 13일 밤 11시 마산을 출발하여 14일 아침 고향인 전북 남원군 금지면 용정리에 도착하여 마을 선산에 묻혔다. 그는 죽기 하루 전인 3월 14일 마산상업고등학교에 합격했다. 성격은 차분했으며, 책임감이 강하고 영웅전을 즐겨 읽었다고 한다.

3·15정부통령 선거 때 내무부와 각 도의 경찰이 실질적인 선거본부가 되어 투표총계를 조작하고 날조하였다. 1960년 이승만의 강력한 대적자로 여겨졌던 민주당 대통령 후보인 조병옥이 죽게 되자 이승만의 재선은 확고한 것이었다. 따라서 이승만의 노령을 배경으로 실제 싸움은 부통령선거에서 현직 부통령인 장면과 자유당 후보자 이기붕 사이에 벌어졌다.

여기서 이기붕을 당선시키기 위한 부정선거는 공공연히 진행되었다. 즉, 자유당원에게 검사 받는 3인조·5인조 공개 투표, 자유당 완장부대 동원으로 민주당 지지자 위협, 유령유권자 조작, ‘4할사전투표’ 등 부정과 폭력이 난무하고, 경찰은 공개적으로 자유당후보를 지원하였다.

선거 결과 이승만은 총 투표수에서 당선에 필요한 1/3보다 두 배 이상 많은 표를 얻었다. 이기붕은 180만 표를 얻은 장면을 제치고 840만 표로 부통령에 당선되었다. 국회에서는 민주당이 선거가 ‘불법적인 것이고 무효’라고 주장하였고, 반정부시위가 선거 전후 전국에 걸쳐 대도시에서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특히 마산의 김주열 시체 발견과 더불어 비화된 마산시민들의 부정선거 규탄대회와 시위대에 대한 총격은 더욱 격렬한 데모로 진행되었다.

그리고 ‘피의 화요일’ 이라 불린 1960년 4월 19일, 학생들은 이른 아침부터 선언문을 낭독하고 거리로 뛰쳐나와 국회의사당에 모인 학생 시위대열은 경무대 방향으로 나아갔다. 시위대의 숫자는 이미 10만 명을 넘었고, 최루탄과 공포 사격으로 저지하던 경찰의 1차 저지선은 학생과 시민들을 막을 수가 없었다.

시위대는 경찰의 최후 저지선인 경무대를 향해 달려갔다. 여기서 경찰은 발포하기 시작했고 학생들의 시위는 폭동으로 변하였다. 전국적으로 부산·광주·인천·목포·청주 등과 같은 주요 도시에서 수천 명의 학생들이 가세하였다. 서울에서만도 자정까지 약 130명이 죽고, 1000여 명 이상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경찰이 시위대에 발포하기 시작한 직후, 우리나라의 주요 도시에 계엄령이 반포되었다.

4월 19일 이후 데모와 폭동이 연일 계속되었다. 이제 학생이 아닌 일반시민들도 가담하였다. 그러나 군대는 유혈사태를 경계하고 재산의 파괴를 방지하는 데 신경을 쓰면서 방관하는 태도를 견지하였다. 4월 21일 내각이 전국의 혁명적 사태에 대한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

그리고 이승만은 이기붕을 모든 정치활동으로부터 물러나도록 하였다. 이어 당시 부통령이었던 장면은 이승만이 대통령직에서 사임할 것을 촉구하면서 부통령직을 사퇴하였다. 시위대들은 새로운 선거의 실시하고 이승만의 즉각적인 사퇴를 요구하였다. 시위대는 점점 과격해져 반공청년단과 자유당간부의 집을 파괴 방화하였다.

4월 25일 시위의 새로운 물결이 일어났다. 각 대학 300여 명의 교수들이 제자들을 지지하면서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를 요구하며 서울시내를 행진하고 나섰던 것이다. 이러한 대학교수단의 시국선언과 전국민의 궐기는 독재정권의 종말을 결정짓게 하였다. 결국 4·19혁명 당시 185명이 사망하고 수많은 부상자를 내었다.

4월 26일 새로 지명된 외무부장관 허정과, 계엄사령관 송요찬, 그리고 주한 미국 대사였던 맥카나기의 충고를 받아들여, 이승만은 대통령·부통령의 선거가 새로 실시될 것이고, 헌법도 대통령 중심제에서 의원 내각제로 바꾸어질 것이라고 약속하였다.

이렇게 대학교수단의 시위로 시작된 시위의 새로운 물결과 미국으로부터의 압력, 경찰력의 붕괴, 그리고 무엇보다도 군으로부터의 지지결여 등으로 이승만은 1960년 4월 26일 사임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이틀 전에 이승만으로부터 외무부장관으로 임명된 허정은 과도정부의 수반이 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이화장으로 거처를 옮겼다가 4월 28일 부통령 이기붕일가가 스스로 목숨을 끊자 다음날 극비리에 미국 하와이로 떠났다. 그리고 1960년 8월 13일 의원내각제의 장면 내각이 새롭게 출범하였다. 
당시 허정의 과도정부는 단 하나 권력기반인 관료기구와 경찰조직을 포함한 이승만정권의 정부기구 바로 그 정치구조를 깨뜨려야 한다는 모순된 과업이 주어졌다. 정당이나 군부, 어느 사회단체로부터 아무런 기반을 마련하지 못한 채 각 정치단체로부터 무난한 성격의 정권으로 비쳐졌던 것이다.  

허정정부의 정책기조는 대내적으로는  4·19혁명의 여파를 최소화하고 대외적으로는 반공과 미국과의 긴밀한 유대를 지속하는 것이었다. 그런 반면 학생과 언론으로부터 전직 자유당 관리와 부정축재자에 대한 즉각적인 엄벌을 요구받았다. 아울러 군부의 동향을 의식하여 그 중립성을 유지하고자 하여 이승만의 미움을 샀던 이종찬을 국방부장관으로 임명하였고, 미국 관리들과 접촉하기도 하였다.

허정정부는 9명의 전직 각료와 15명의 자유당 간부, 여러 은행의 장, 부정축재자, 정치깡패의 두목들을 체포 기소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공판은 이승만정권의 정치적 이익에 봉사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법원과 검찰청의 현직 관리들에게 의존해야 하는 모순 속에서 진행되어야 했다.

또 국회에서는 경찰중립화법안을 생각하였으나, 실천에 옮기지 못하였다. 따라서 학생과 시민들이 요구하는 혹독한 처벌 요구를 만족시킬 수 없었고, 이는 장면정부로 넘기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허정정부가 이룩한 중요한 정치적 발전의 하나는 정치세력 집단으로서의 자유당의 해체였다.

4·19혁명은 이승만정권과 그의 지지세력에 대항하는 반정부세력에 의한 혁명적 시도였다. 즉 당시 우리 사회는 이승만정권의 권력구조와 새로운 민주교육을 받은 학생으로 대표되는 정치의식계층의 가치관과는 크고 명백한 균열이 있는 혁명적 여건이 조성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시위학생들과 시위 군중들은 그들 스스로의 조직화된 지도력을 가지지 못하였다. 그리고 민주당은 시위운동을 일으키는 데 앞장을 섰다고 주장하였지만, 실제 지도력은 보이지 않았다. 이러한 현상이 4·19혁명은 미완의 민주화과정으로 남게 되었다.

어떻든 4·19혁명은 한국의 정치사 발전에 하나의 획기적인 전기를 이루며 한국 국민의 민주의식 발전을 의미하는 일대 사건이었으며,  민주주의 토착화를 위한 진통과 자기 투쟁을 의미하는 것이다. 즉 공권력의 횡포에 대한 민권의 승리를 의미하며, 주권재민의 민주주의 원리를 입증한 것이다. 나아가 민주이념과 사회정의 실현이 한국이 앞으로 지향해야 할 최고 가치임을 표현한 것이다.

국립4·19민주묘지를 찾아가는 길은 전철4호선 수유역 2번 출구에서 지선버스 01번이나 6번 출구에서 1119번을 이용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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