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엔 혼자 사냥하는 게 아닌데
요즘엔 혼자 사냥하는 게 아닌데
  • 이승희
  • 승인 2011.10.14 0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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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희의 소통과 관계]

경상도 사나이는 과묵하고 무뚝뚝하다는 고정관념과 달리 우리 남편은 사근사근한 성격에 말수도 적지 않다.

그러나 내가 말을 시작하면 ‘용건만 간단히’를 강조하고, 얘기 도중에 어떻게 해주라는 것이냐며 말을 자꾸 자른다. ‘도움이나 해결책을 묻는 것이 아니고 그냥 그렇다는 얘기다’라는 나의 대답에 별 필요 없는 말을 왜 하냐며 구박한다. 가정에서의 대화는 ‘정보’가 아니라 ‘유대’가 더 중요하다고 남편에게 쏘아 붙이고, 일부러 아주 시시콜콜한 이야기까지 더 늘어놓는다.

결혼한 친구나 선후배를 보면 부부간 대화 상황은 우리 집과 별반 다르지 않다. 남자들은 지쳐서 퇴근하면 부인들이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필요도 없는 이야기만 한다고 투덜거린다. 반면, 여자들은 자기 남편이 밖에선 잘만 떠들면서 집에선 그냥 들어주는 것도 못한다고 불만이다. 이는 비단 서로 성격이 맞지 않은 부부만의 상황이 아니다.

남녀 사이에 대화가 잘 통하지 않는 건 성격이나 관심영역의 차이 때문이 아니라 서로 언어에 대한 개념 자체가 다른 게 원인이다.

예로부터 주로 사냥을 담당하던 남자는 많은 말을 하지 않았다. 동물을 쫓거나 잡는 데 필요한 정보 전달만이 중요했다. 반대로, 주거지에 남아 음식을 하고 가족을 돌보았던 여자는 대화가 활발했다. 가족, 이웃들과 친해지고 유대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많은 말을 해야 했다.

남성은 혼자서 먹잇감을 찾아다니며 필요한 말만 하면 됐지만, 여성은 둥지 수호자로서 여러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만들고 유지하는 친교 목적의 수다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개념은 지금까지도 남녀의 언어생활에 영향을 주고 있다.

실질적으로 언어사용량 통계 관련 연구를 보면, 남성은 평균적으로 하루에 2000에서 4000 정도의 단어를 사용하지만 여성은 6000에서 8000 정도의 단어를 사용한다고 한다. 이를 전제하면, 남편은 이미 회사에서 하루 할 말을 거의 소진해 버린 반면, 아내는 상대적으로 많이 남아있다.

더욱이 ‘정보’를 중시하는 남자 입장에서 ‘친교’를 위한 여자들의 수다는 잘 이해되지도 않고 들어주기도 귀찮은 것이다.

요즘 퇴직한 남자 선배들을 만나면 되게 수다스럽고 시끄럽다. 별 것도 아닌 얘기를 서로 주고받고 하고 또 한다. 그리고 그런 시간들이 재미있고 좋단다. 사냥 않고 들어앉아 보니 도란도란 얘기 나누는 것 자체만으로도 즐겁고 서로 통하는 ‘수다’의 재미도 쏠쏠한가 보다.

에고, 늦은 정년 보장된 우리 남편은 언제나 이 맛을 알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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