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십리, 그 밤
왕십리, 그 밤
  • 박성우 시인
  • 승인 2011.12.02 22:5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박성우의 ‘PoemEssay’

소월 풍으로…김민정

눈이 내리고
내리는 눈이니 나는
잠이나 잘까 하였는데
쌓이는 눈이니 나는
꿈에나 들까 하였는데

눈이 내리고
내리는 눈 따라 걸어가는
소녀의 발자국은 온데간데없고
쌓이는 눈 위로 주저앉은
소녀의 엉덩이는 젖지 않는 기적이라

채찍 소리 들리고
들리는 채찍 소리이니 나는
잠이나 깰까 하였는데
깨는 잠이니 나는
꿈에나 날까 하였는데

채찍 소리 들리고
들리는 채찍 소리 맞춰 뜀을 뛰는
소녀의 발장단은 가여워도 가없으니
그친 채찍 소리 위로 똬리 튼
소녀의 줄넘기는 잿밥처럼 첫눈이라

작품출처 : 김민정(1976~) 시집『그녀가 처음, 느끼기 시작했다』

■ 첫눈 오는 날 만나자는 약속, 친구들끼리 연인들끼리 선후배끼리 한번쯤은 해보셨죠? 하지만 그 약속이 어디 잘 지켜지던가요?
첫눈이 폭설로 오는 경우가 아니라면, ‘첫눈이 온 게 맞다.’ ‘아니다, 그건 첫눈이라고 말 할 수 없다.’ 등등 의견도 분분하지요.

몇 송이만 날리다가 멈춘 눈을 첫눈이라 할 수 있을까요. 대체 얼마만큼 눈발이 날려야 첫눈이라 할 수 있을까요. 그것 참 애매합니다.
어느 해. 왕십리에 내렸던 첫눈도 그렇군요.

눈이 내려 “내리는 눈 따라 걸어”보지만 “발자국은 온데간데없”군요. 엉덩방아를 찧어도 “엉덩이는 젖지 않는 기적”이 일어나는군요. 해서, 소녀는 줄넘기나 하는 밤이군요.
그래도 첫눈은 첫눈 아닐는지요.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