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도성 동소문, 혜화문(惠化門)
한양도성 동소문, 혜화문(惠化門)
  • 나각순 서울시사편찬위 연구간사
  • 승인 2010.09.03 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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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각순의 ‘서울 문화유산 둘러보기’ 20]
▲ 혜화문 정면.   ⓒ나각순

혜화문(惠化門)은 태조 5년(1396) 도성을 쌓을 때 축조된 동소문으로, 당시는 ‘홍화문(弘化門)’이라고 하였다.

지금의 종로구 혜화동과 성북구 동소문동ㆍ성북동을 잇는 혜화동고개 마루에 위치해 있었다. 따라서 도성의 동북쪽에 위치하여 함경도ㆍ강원도 등 북방과 직결되는 관문 구실을 하였으니, 실질적으로는 숙청문(숙정문)을 대신하여 북대문의 구실도 겸하였다.

그런데 성종 24년(1493) 상왕궁이었던 수강궁(壽康宮)을 대비들을 위한 창경궁으로 수축하여 동궐(東闕)의 경내로 삼으면서 그 정문을 ‘홍화문’이라고 하였다. 이에 창경궁의 궁성 정문 이름과 서울성곽 동소문의 이름이 중복되어 혼동을 가져왔다. 따라서 중종 때 이 동소문의 이름을 홍화문에서 ‘혜화문’으로 개칭하였던 것이다.

즉, 중종 1년에 처음으로 혜화문이란 이름이 등장하여 동소문의 명칭이 혜화문으로 개칭된 것은 중종 때인 것으로 확인된다. 그런데 조선 후기 김정호의 《대동지지》에는 중종 6년(1511)에 혜화문으로 개칭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성문 개칭 시기에 대한 혼선이 있으나, 그 의미를 이해하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하겠다.

동소문의 원래 이름을 궁궐의 정문이름으로 사용하였으니, 그 의미 역시 조선왕조 5대 궁궐의 정문에 ‘화(化)’ 자를 넣어 왕도정치에 따른 임금의 성덕이 궁궐 밖에 사는 백성들을 교화하여 아름다운 풍속을 유지하게 인도하고자 함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거기에 ‘클 홍(弘)’ ‘크게 할 홍’자와 어우러져 큰 교화를 기대하고, 만인을 크게 교화시켜 평화롭게 사는 세상을 기원하였음을 알 수 있다.

비록 봉건제 신분제 사회를 영위하였지만 민본을 바탕으로 안정된 국가운영을 꾀하였으니 현재의 정치덕목과 질적인 차이는 없는 것이다.

또한 개칭된 ‘혜화’의 이름 또한 임금으로 상징되는 성덕에 의한 정치행위가 큰 은혜로움이 되어 도성 밖에서 생업에 종사하는 만인을 교화하고자 하였던 뜻은 지닌 것이니, 본래의 이름이었던 ‘홍화’와 의미상으로 거의 같은 것이라고 할 것이다.

이러한 민본사상의 표현은 성문의 보수공사 과정에서도 엿볼 수 있다.

즉 문종 1년(1451)에는 동대문과 함께 동소문을 수리하였으나 공사가 완료되지는 않았다. 백성들이 힘들므로 급하지 않은 일은 정지하도록 지시하면서 동소문에는 우선 녹각성(鹿角城)을 설치하게 하였다. 녹각성이란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나무말뚝을 박아 설치하는 임시 방어용 목책을 의미하며, 마치 사슴뿔과 같은 장애물을 설치한 것이다.

이것은 동소문 자체가 훼손된 것이 아니라 동소문과 인접한 성곽이 붕괴되어 녹각성으로 임시 수축을 한 것으로 보인다. 민생이 하늘로 삼는 것은 먹는 것이었으니, 임금은 백성들이 농사짓는 시기를 빼앗으며 안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가능하면 농한기에도 민력을 쉬도록 하고 그 여력으로 생업에 힘쓰게 하여야 성군이 되는 것이었다.

한편 영조 15년(1739)에는 혜화문의 문지도리와 문짝이 부러지고 상하여 밤에 문을 닫지 못하므로 어영청(御營廳) 군인 10여명으로 지키도록 하였고, 영조 20년(1744)에는 예전에 문루가 없던 것을 어영청에 명하여 세우게 하고 편액을 걸었으며, 속칭 동소문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임진왜란 때 문루가 파괴된 것을 이때에 와서야 중건하였기 때문에, 예전에는 문루가 없었다고 표현된 것이다.

영조 때에 중건된 혜화문은 일제 때에 철거되었다.
일제는 1913년 <시가지건축취체규칙>을 공포하고 도성 내에 성곽을 철거하여 신작로를 만들고 각종 공공건물들이 들어서기 시작하였다. 1911년부터 1917년 4월까지 기간에 도로 확장과 개설 계획에 따라, 혜화문은 1916년경에 철거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1928년에 문루가 철거되고 1939년에는 성문마저 철거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현재의 혜화문은 원위치인 동소문로 가운데에서 서북쪽으로 약 30m 정도 옮겨 1992년 12월 29일에 이전∙복원공사를 시작하여 1994년 10월 15일에 완공되었다. 혜화문 터는 확장된 8차선 도로 중앙에 있었는데, 도로를 원 지반보다 약 5~6m 낮추어 조성하였기 때문에 문지는 완전히 훼손되었다.

▲ 복원된 혜화문-안쪽.   ⓒ나각순

복원된 성문은 장방형 무사석으로 육축을 높게 마련하고 그 가운데에 홍예를 두어 통로를 마련하였다. 체성은 높이 5.3m 폭 8.6m이며, 홍예의 높이는 3.9m 폭은 3.75m이다. 홍예 내부통로의 폭은 4.37m이고, 홍예대석의 높이는 1.98m이다. 육축 위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 우진각지붕을 두었다.

문루의 구조는 원형 초석 위에 기둥을 세우고 2익공에 창방 위에 화반을 두고 겹처마에 양성마루를 하였다. 바닥의 중앙 칸에는 장마루를 깔고, 판벽을 설치하였다. 문루 둘레에는 높이 1.4m 폭 0.6m의 전돌 여장을 둘렸으며, 원∙근총안을 설치하고 안쪽 좌우에는 등성계단과 협문을 두어 문루에 오를 수 있도록 하였다.

혜화문은 여진(女眞)의 사신이 조공하기 위해 한양에 입성할 때 이용하던 문으로, 여진의 지정숙소인 북평관이 동대문 안 동학(東學)이 있던 현 이화여대 부속병원 언저리에 있었으므로 그 통로가 되었다. 이렇게 서울성곽의 성문에는 일정한 격이 있었으니 숭례문과 흥인문 등 대문은 궁궐의례에 따른 임금의 행차와 사대외교의 통로가 되었던 격이 높은 통행의 문이었고, 교린의 외교사절이 통하는 격이 낮은 왕래는 동소문과 광희문 등 소문을 통해서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리고 문루의 바닥 천장에는 대개 용을 그려 넣었는데 혜화문에는 성 밖의 새로 인한 피해를 막기 위해 새의 우두머리 격인 봉황을 그려 모심으로써 피해와 소란을 막고자 하였던 일종의 비보사상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 혜화문에서 바라본 낙산 서울성곽.   ⓒ나각순

한편 혜화문 주위에는 갖바치와 같은 특수한 신분이 집단으로 살던 곳이기도 하다. 이는 혜화문 안쪽 오늘날 혜화동교차로 동북쪽 언덕에서 성균관대학교에 이르는 지역이 반촌(泮村)이었던 데서 연유된 것이다.

반촌은 문묘 동쪽 일대를 가리키는데, 이곳에는 고려시대 성리학을 들여온 안향(安珦)이 국자감에 기증한 사노비가 조선시대 한양천도 이후에 현재의 위치에 문묘를 마련하게 됨에 따라 이 일대에 집단으로 거주를 마련하였던 것이다.

반촌은 반궁(泮宮) 즉 문묘ㆍ성균관이 있는 마을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곳은 서울 동촌(東村)의 경승지를 이루어 양반관료들이 거주하였고, 아울러 문묘에 예속되어 공자(孔子)를 모시는 제사에 올리는 제물인 희생(犧牲)을 준비하고 청소를 하던 천인신분이지만 성현(聖賢)을 모시는 일을 하는 특수 신분층인 반인(泮人)이 거주하던 곳이었다.

따라서 그 생활범위가 넓어져 혜화문 밖에서 희생을 준비하고 남은 짐승의 가죽으로 생활용품을 만들던 일을 하면서 집단 거주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성균관 유생들이 정부시책이 잘못되었다고 판단하여 올바르게 바로잡고자 집단의사를 표현하던 전통이 있었다. 즉 공관(空館)ㆍ공재(空齋)ㆍ권당(捲堂) 등이 그것인데, 성균관이나 숙조인 동재ㆍ서재를 무단으로 비우고, 식당에 나가지 않아 출석점수인 원점(圓點)을 받지 않는 등 일종의 수업거부를 단행하고, 궁궐에 나아가 상소 즉 유소(儒疏)를 올리는 일을 단행하였다. 즉 나라 정치가 정의에 의해 이루어지게 촉구하고, 국가 위기에는 목숨을 바쳐 국난을 극복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정의를 지키고자 했던 기운이 성균관의 동쪽에 있는 궁궐 안으로 전해졌고, 혜화문을 통하여 전국에 펴져나가 나라의 안정을 꾀하는 토대를 마련하였던 것이다.

특히 영조 때는 혜화문 안쪽 혜화문 교차로 근처 아파트가 있는 곳에 사현사(四賢祠)가 설치되어 중국의 당ㆍ송시대 모범적인 4명의 태학생을 모셨고, 그 후에는 조선의 태학생도 함께 모셔 제향을 올렸다. 이러한 성격을 계승하여 조선 후기 만인소(萬人疏)를 준비한 영남의 선비들이 이곳에 소청(疏廳)을 마련하고 임금에게 올리는 상소를 준비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이 혜화문이 주는 의미는 임금과 선비를 비롯한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서로 자기에게 주어진 역할을 수행하며, 화합하여 공존하는 가치를 실현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오늘날 정치적 갈등을 해결하는 실마리도 혜화문을 운영한 조상의 지혜로부터 찾아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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