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평생 연극무대 지켜온 노배우의 ‘봄날’
70평생 연극무대 지켜온 노배우의 ‘봄날’
  • 이인우 기자
  • 승인 2011.12.10 08:1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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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문화상 받은 서울토박이 오 현 경 씨
▲ 원로 배우 오현경

노(老)배우는 무대를 떠나지 않는다.

대학로 아르코극장에서 지난달 30일부터 18일까지 공연되는 연극 ‘레미제라블’의 완고한 왕당파 노인 질노르망 역. 배우 오현경(75)이 프랑스 대혁명의 격랑 속에서 한 축을 맡는다.

그는 “질노르망은 짧게 각색한 레미제라블에서 제외되기 일쑤인 인물”이라며 “그렇지만 이번 공연에서는 외손자인 청년 마리우스가 몸담은 공화파와 대립하는 보수적인 왕당파를 상징한다는 의미를 살렸다”고 설명했다.

극중 질노르망처럼 배우 오현경은 이번 공연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 한국 연극을 대표하는 배우들이 주축이 돼 무대를 만든 레미제라블은 ‘50대 연기자 그룹’이 이끌고 있다. 이들 ‘50대 연기자 그룹’은 1980년대 초반 대학로에서 활동하던 연극인 20명이 만든 ‘30대 연기자 그룹’의 후신. 배우 오현경은 이들의 대선배 연극인이다.

후배 연극인들이 뜻을 모아 레미제라블을 무대에 올렸고 오현경을 극단의 기둥으로 모셨다. 오현경은 “50대 연기자 그룹이 참여를 부탁해 흔쾌히 수락했다”며 “그런데 개런티는 고사하고 거마비도 없다”고 털어놓았다.

이런 말을 하는 노배우의 표정은 편안해 보이는데다 유쾌하기까지 하다. 이번 작품에서 유일하게 개런티를 받는 배우는 극중 바리케이트 장면의 군중 역할을 맡은 젊은이들뿐이다. 물론 50대 연기자 그룹이 아닌 오디션을 거친 청년들이다.

이들은 연습기간을 포함해 4개월여 동안 단돈 100만 원을 받는다. 월 30만 원이 안되는 출연료다. 배우 오현경은 이런 연극판이 너무 익숙하다. 서울고 연극부에서 연극을 시작한 그는 올해로 60년에 가까운 무대인생을 살아온 셈이다. TV 드라마와 영화에도 출연했지만 본업은 여전히 연극배우다.

그는 연극에 대해 ‘현장예술’이라는 점을 거듭 강조했다. 배우와 관객이 같은 장소, 같은 장소에서 교감을 이루어야 비로소 완성되기 때문이다. 또 배우의 자존심을 얘기했다.

그는 “배우는 주어진 여건 속에서 최선을 다해 관객과 만나고, 컴컴한 객석에 앉은 누군가와 내밀한 교류를 이룬 뒤 그가 감동을 안고 돌아갈 때 자존심을 지킬 수 있다”고 말했다. 이런 자존심 하나로 고희를 넘겼고 다시 무대에 오른다.

그는 누군가 자신의 연극을 보았다고 하면 먼저 “언제 보았냐”고 묻는다. 이런 질문을 할 때마다 가장 긴장하게 된다고 한다. 연기가 항상 같을 수 없고, 혹여 자신이 만족하지 못하는 무대를 누군가 보았다고 할까봐 긴장하게 된다. 배우로서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이기도 하다.

그는 “잘 아는 누군가 실수한 무대를 보았다고 하면 ‘아이고, 왜 하필 그때 왔냐’고 한탄한다”며 웃었다.
실제로 이런 일이 있을 때면 잘 주지 않는 초대권을 줘서라도 다음에 꼭 한 번 더 와달라고 부탁하기도 한다. 그리고 다음 무대를 본 관객이 잘 보았다고 한 뒤에야 마음을 놓는다.

여간 ‘깐깐한’ 배우가 아닌 셈이다. 이러한 결벽은 남에게가 아니라 항상 자신에게로 향한다. 남들에게는 지나치게 겸손하고 조심스러운 편이다. 인터뷰 중간 중간, 혹여 남의 이야기가 잘못 나오면 당사자가 오해할 수 있으니 잘 다듬어달라고 부탁하고는 했다.


오현경은 내년 3월 그가 가장 아끼는 작품 ‘봄날’을 다시 무대에 올린다. 그는 “봄날은 배우 오현경의 이야기가 모두 담겨있는 작품”이라고 말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희곡작가 이강백이 쓴 봄날은 5공 정권의 서슬이 퍼렇던 1984년 극단 성좌에서 초연했던 작품이다.

오현경은 초연에 이어 2009년, 올해 봄 3차례 아버지 역을 맡았다. 내년 봄 다시 한 번 봄날의 늙은 아비로 연기하게 된다. 지난 4월 봄날 공연 당시 한국공연예술센터 웹진 hanpac과의 인터뷰에서 오현경을 가슴에 남을 얘기를 했다.

아버지를 업어주는 장남 역할의 배우 이대연이 “지난 공연때보다 가벼워지신 것 같다”고 하자 오현경은 “나이가 들어가면 내려놓는 게 많아지니 가벼워져야지”라고 대답했다. 연극 ‘봄날’의 늙은 아버지와는 전혀 다른 배우 오현경의 대답이다.

‘봄날’은 집안에서 절대권력을 휘두르며 회춘에 대한 욕망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아버지와 아들들과의 갈등과 화해를 그린 작품이다. 배우 오현경은 ‘봄날’의 아버지와 달리 자신의 말처럼 하나씩 내려놓으며 살아왔다.

그는 3대째 서울에 살아야 토박이라는 조건을 갖춘 서울사람이다. 3대조인 증조부는 고향 경북 영양의 천석지기였다. 증조부가 가솔을 이끌고 상경한 뒤 대를 이어 살았던 곳이 종로구 수송동. 지금 레지던스호텔 서머셋 팰리스 서울 자리였다. 오현경은 이곳에서 태어난 뒤 안국동 걸스카웃회관 뒤편에 있던 한옥으로 이사해 자랐다.

재동초등학교와 경기중을 졸업한 뒤 정해진 코스와 같은 경기고에 진학하지 않고 서울고에 입학한 것이 연극을 시작한 계기가 됐다. 대학도 서울대를 마다하고 연세극회가 있는 연세대를 지원했다. 집안의 반대도 적지 않았으나 연기에 대한 열정을 잠재울 수 없었다. 완고한 영남 유림이자 천석지기 살림에 관심 두지 않고 외길을 달려온 75년이었다.

영화 와이키키브라더스 등에서 빼어난 연기를 보인 배우이자 연기보다 더 출중한 글을 써대는 딸 오지혜 씨 얘기가 나오자 배우 오현경의 얼굴은 무대를 밝히는 조명처럼 빛났다. 그는 “그 아이가 얼마 전 민노당에 입당했다가 탈당했다고 하더라”며 “아마 정당이라는 딱딱한 구조가 체질에 잘 맞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 자유로운 기질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듯 하다. 오현경은 지난 2일 받은 ‘서울시문화상’에 대해 “정작 주인공인 수상자는 뒷전이고 시상자가 주인공이 되는 이해할 수 없는 시상식을 겪어야 했다”며 우리사회의 뿌리 깊은 관료주의에 고개를 내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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