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도성 서소문, 소의문(昭義門)
한양도성 서소문, 소의문(昭義門)
  • 나각순 서울시사편찬위 연구간사
  • 승인 2010.09.08 17:4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나각순의 ‘서울 문화유산 둘러보기’ 21]
▲ 소덕문(소의문) 터 표석.   ⓒ나각순

소의문(昭義門)은 태조 5년(1396) 도성을 쌓을 때 축조된 서소문으로 당시는 ‘소덕문(昭德門)’이라 하였다.

현재 지하철2호선 시청역에서 중앙일보 방향으로 나가는 언덕마루에 위치해 있었으며, 지금은 대한통운 입구 쪽에 표석만이 설치되어 있다. 즉, 소의문이 있던 자리는 현재 왕복 8차선의 서소문로가 조성되어 그 터를 확인할 수 없다.

▲ 소의문이 있던 곳-서소문 고갯마루 북쪽(좌)과 남쪽.   ⓒ나각순

다만 언덕을 형성하고 있는 지형에서 내리막길이 시작하는 지점을 그 터로 추정할 수 있다. 따라서 소의문은 도성의 서남쪽에 위치하여 강화∙인천 방향과 개성ㆍ평양의 서북방으로 직결되는 관문 구실을 하였다.

서소문 문루는 임진왜란으로 파괴되었으나 재정 여건상 중건되지 못하고 있었다. 그 후 숙종 45년(1719) 예조판서 민진후(閔鎭厚)가 “도성의 문에 누각과 현판이 있었으니 해당 군문에 분부하여 현판을 써서 걸게 하고, 서소문에는 누각을 설치한 후 현판을 걸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고 건의하였다. 당시는 아직 문루가 중건되지 못하여 문루 현판도 없어 재건을 논의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서소문 문루가 중건된 것은 영조 20년(1744)이었다. 소덕문을 속칭 서소문이라 불렀는데 옛날에는 누각이 없었고 금위영(禁衛營)에 명하여 세우게 하였으며, 이때 소덕문의 이름도 소의문으로 개명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한편 서소문의 명칭이 바뀌는 시기에 대해 성종 3년(1472)에 예종 비를 장순왕후(章順王后)로 추존할 때 시호인 휘인소덕장순(徽仁昭德章順)에 ‘소덕’이 들어 있어 이를 피하는 뜻으로 소덕문을 소의문으로 개칭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이러한 내용을《성종실록》에서 찾을 수는 없다. 단지 《궁궐지》《영조실록》에 영조 20년에 소의문으로 고쳐 편액을 걸게 하였다는 기록이 전한다.

영조 때에 중건된 서소문은 1914년경 도로확장으로 철거된 것으로 보인다. 1914년에 발행된 <경성부명세신지도>에 서소문이 표기되어 있으나 이후의 지도에는 보이지 않는다.

▲ 소의문 안쪽(좌), 소의문 성문 밖 거리.   ⓒ나각순

소의문의 형태는 남아 있는 사진을 통하여 대략 살펴볼 수 있다. 언덕배기에 자리잡은 소의문은 장방형 무사석으로 높게 육축을 축조하고, 육축 중앙에 홍예를 앞뒤로 설치하여 통로를 마련하고, 그 위에 문루를 조성하였다.

문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 우진각 지붕이며, 문루 바깥 사방에는 총안이 없는 전돌 여장을 둘렀으며, 좌우 측면의 여장에는 문루로 출입하는 협문을 설치하였다. 성문 안쪽으로 빗물 배수를 위한 누조가 전후 각 2개씩 마련되었다. 그리고 육축에 이어진 성벽에는 원∙근총안이 설치되어 있는 평여장이 연결되어 있다.

한편 창의문과 관련하여 인조반정 때 반정군을 의군(義軍)이라 칭하였고, 그 정의를 상징하는 문 이름을 언급한 것과 관련하여 소의문에서도 의로움을 생각할 수 있는 역사적 사건이 있었다. 즉 인조반정 결과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은 이괄(李适)이 서북 지방의 군사를 이끌고 내려와 한양도성을 점령하는 이른바 ‘이괄의 난’ 때의 일이다.

즉 인조 2년(1624) 갑자(甲子)에 이괄의 뒤를 쫓아온 관군 정충신(鄭忠信)을 공격하였으나, 갑자기 반대방향으로 분 바람 때문에 안현(鞍峴, 무악재)에서 패하였다. 이에 이괄은 도성 안으로 돌아가려고 하였으나, 도성의 백성들은 돈의문과 소덕문(소의문)을 닥아 막아버렸다. 이에 이괄은 숭례문으로 들어와 수구문(광희문)을 통하여 빠져나가 남쪽으로 도망갔는데, 이천(利川)에 이르렀을 때 기익헌(奇益獻)에게 잡혀 죽게 되어 임금이 피난 가 있던 행재소(行在所)에 바쳐졌다.

이렇게 조선시대 비록 내전이었지만 유일하게 전란을 치룬 ‘이괄의 난’ 때 반란군과 관군의 격전장이 바로 인왕산과 안산을 거점으로 돈의문․소의문ㆍ숭례문을 이은 성곽 안과 밖이었다. 특히 백성들에 의해 거부당한 반란군의 행로가 비참하게 끝나고 말았으니, 백성들의 의로운 거사가 돋보인다고 하겠다. 따라서 도성의 서쪽을 가리키며 의(義)로움을 담고 있는 돈의문과 더불어 소의문의 성문의 이름의 가치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소의문은 도성 안 백성들이 세상을 떠나 도성 서쪽 방향으로 운구할 때 이용되는 문이었다. 즉 도성의 남소문 구실을 하였던 광희문과 더불어 시신이 나가는 문이었으니 이 또한 대문이 아닌 격이 낮은 소문의 기능 가운데 하나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 서소문 밖에는 조선후기 대표적인 시전(市廛)인 칠패(七牌)가 있어 상업활동의 중심무대가 되었다. 칠패시장은 17세기 후반에 발달하기 시작하여 19세기까지 번성하였던 시전으로 주 무대는 소의문과 숭례문 밖의 만초천(蔓草川) 변이었다.

18세기 들어 대규모 시장으로 발달하였고 미곡ㆍ포목ㆍ어물ㆍ유기 등 각종 물품이 모이고 판매되었다. 즉 용산과 마포가 가까워 서울도성 안으로 이어지는 중간지대로 상업발달의 좋은 여건이 형성되어 일찍이 난전(亂廛)이 형성되기도 하였던 곳이다.

▲ 시위병영터 표석.   ⓒ나각순

또 소의문 일대는 1907년 대한제국 군대해산에 따른 시위대의 봉기로 일본군과 격전을 벌인 곳이기도 하다. 서소문 남쪽 성곽 안쪽에 당시 시위보병 제1연대 제1대대 병영이 있었다. 그런데 1907년 8월 일제의 압력으로 시위대가 강제 해산당하기에 이르렀다.

이때 제1대대장 박승환(朴昇煥)의 자결을 계기로 서소문 병영에서 총성이 일어나면서 일본군과 전투가 벌어졌던 것이다. 비록 장비의 열세로 패배하였지만 시위대 군인들의 무장봉기는 이후 의병전쟁의 도화선이 되어 그 연장선상에서 독립군과 광복군을 형성하여 일제병탄에서 해방과 광복의 역사의 수레바퀴를 이끌어올 수가 있었던 것이다.

실로 소덕에서 소의로, 덕을 밝게 하여 백성을 지키고자 했던 의지가 밝게 빛나는 의로움으로 나라를 구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이에 오늘에 사는 우리는 소덕문ㆍ소의문의 숨은 뜻을 밝혀 오늘의 갈등과 불신ㆍ불통을 정의를 바탕으로 화합과 신뢰ㆍ소통으로 아름다운 사회를 만들어나가야 할 것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