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교동 황혼
서교동 황혼
  • 박성우
  • 승인 2011.12.25 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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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 연

 

 

 

 

 

 

 

서교동 황혼

                               - 허 연

비둘기 한 마리가 으깨어져 있는 차도를 걸으며, 오늘 또 몇명의 이름들과 몇소절의 노래가 내 머리에서 사라졌다. 이방인들이 성채를 지은 땅에 비둘기를 묻으며 유랑하는 아이들이 비닐봉지처럼 펄럭이는 걸 본다.

나는 늘 그렇듯 눈을 반쯤 뜨고서 호쾌한 소식은 이제 없음을, 변명도 없음을, 피 묻은 나이가 됐음을 알아차린다. 단지 아주 천천히 빙하기가 이 모든 걸 쓸어가버리기를. 소식에는 독이 묻어오기 시작했다. 아무도 구름무늬 표범의 안부나 개기일식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한심해지고 싶었다든가, 문득 생각났다거나.

이런 소식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피아의 식별이 소식의 전부였다. 아니면 분노가 어색해서 누군가를 미화했거나. 그날, 사람들이 그리고 노래가, 나를 잊기 시작한 것이다. 식탐과 왕년이 남아 비틀대며 택시를 잡는다. 시속 팔십킬로쯤의 속도로 그날밤 황혼은 저물었다. 멀리서 온 소식에는 독이 묻어 있었다.

■ 연말이 되고 보니, 사람 만날 일 참 많지요? 이래저래 송년모임 쫓아다니느라 몸도 어지간히 축나고, 마음도 어지간히 축나고 있겠지요?

송년모임이라는 게 그래요. 연말에 한 해를 보내며 그해의 온갖 괴로움을 잊는 모임이 되어야 하는데, 온갖 괴로움을 가져오는 모임이 될 때가 더 많은 것 같아요. 거기서거기인 “식탐과 왕년” 그리고 저편과 이편을 가르는 온갖 정치 얘기, 아니면 “독이 묻어” 있는 “분노”와 비틀거림.

앞으로는 “구름무늬 표범의 안부나 개기일식에 대해” 도란도란 얘기할 수 있는 모임을 갖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그러다가는 “호쾌한 소식”도 주고받는 모임 말이에요.

작품출처 : 허연(1966~) 계간 <창작과비평> 2011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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