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의 법궁, 경복궁(景福宮) ②
조선왕조의 법궁, 경복궁(景福宮) ②
  • 나각순 서울시사편찬위 연구간사
  • 승인 2010.09.24 0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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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각순의 '서울문화유산 둘러보기' 22]

 

▲ 경복궁 근정전. ⓒ나각순

1945년 광복 후 경복궁은 공원으로 개방되는 한편 총독부청사 건물은 미군정청과 대한민국 정부청사로 이용되었다.

한편 건춘문 북쪽으로 옮겨졌던 광화문은 6․25전쟁 때 문루가 소실되었으며 1968년 본래 자리에 옮겨져 복원되었다. 이때 시멘트로 된 문루가 만들어지고 박정희대통령이 쓴 한글 광화문 현판이 걸리게 되었다.

1971년에는 궁의 동북 담장 가까이에 목조 기와건물의 모양을 한 철근콘크리트조의 국립중앙박물관이 지어졌다. 1986년 정부청사가 세종로에 새로 지어져 옮겨감에 따라 구 조선총독부청사 건물로 국립중앙박물관이 이관되었고, 그 자리에는 국립민속박물관이 옮겨왔다.

이어 1995년 광복 50주년을 맞아 조선총독부건물의 돔 부문이 절단 제거되는 공사가 시작되어 조선총독부 건물은 완전 철거되었다. 그리고 1988년 제24회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만춘전이 복원되면서 시작된 경복궁 복원공사가 계속되었다. 1990년 4월부터 옛 건물지에 대한 본격적인 발굴조사사업을 시작하여 경복궁의 기본 궁제(宮制)를 복원하고 수도 서울의 상징적 문화유산을 조성하고자 하였다.

이미 강녕전과 교태전 등 침전과 그 부속건물 12동은 복원되었고, 이후 빈전(殯殿)인 태원전(泰元殿)과 동궁인 자선당(資善堂) 및 비현각(丕顯閣) 등이 복원되어 정궁의 기본 궁제를 갖춘 경복궁의 완전한 옛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조선 초기에 건립된 경복궁의 궁궐배치는 근정전을 중심으로 한 전조(前朝)와 강녕전을 중심으로 한 후침(後寢)의 전형적인 전조후침(前朝後寢)의 궁궐배치 구조를 가지며, 그 뒤에 후원구조도 갖추었다. 이는 남북 일직선상에 건물을 배치하여 다른 궁궐의 정전과 침전들이 좌우에 놓이거나 앞뒤 관계가 불분명한 것과 비교되며, 이는 조선왕조의 정궁으로 특히 엄격한 규범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오문(午門)인 광화문에서 근정문까지가 외조(外朝), 근정문에서 사정전까지가 치조(治朝) 혹은 내조, 그리고 강녕전∙교태전 등의 침전으로 이루어진 연조(燕朝) 등 삼문삼조(三門三朝)의 궁궐 전형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리고 광화문과 함께 건춘문과 영추문 등 3문이 설치되어 궁성의 대체적인 구성이 이루어지고, 세종 15년(1433) 신무문이 건립되어 궁성의 4대문이 완성되어 전통적인 면모를 갖추었다.

흥선대원군 중건 이후의 경복궁 배치는 1897년 이후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북궐도형(北闕圖型)>과 <북궐후원도형(北闕後園圖型)>에 의해 알 수 있는데, 전각의 구성내용은 《궁궐지(宮闕志)》에 수록되어 있다. 광화문 안에 홍례문이 있고 그 안에 개천 어구가 있어 서쪽에서 동쪽으로 흘러나간다.

어구에 돌다리인 영제교가 놓여 있고 다리를 건너면 정면 3칸의 중층 지붕으로 된 근정문이 있고, 문을 들어서면 정전인 근정전이 2단의 높은 월대 위에 정면 5칸 측면 5칸의 중층 지붕으로 우뚝 솟아있다.

근정전 뒤의 사정문을 들어서면 왕이 정사를 보는 사정전이 있고 그 동서쪽에 만춘전과 천추전이 모두 남향하여 자리하고 있다. 사정전 뒤 향오문(嚮五門)을 들어서면 정면에 연침인 강녕전이 있고 그 앞 동서 양쪽에 연생전과 경성전이 있다.

강녕전 뒤에는 양의문(兩儀門)이 있고 문안에 왕비가 거처하는 교태전(交泰殿)이 있다. 그 뒤로는 후원이 전개되어 소나무가 우거지고 연못과 정자들이 여기저기 자리하고 있다. 홍례문에서 이곳까지는 동서로 회랑이 각 건물을 둘러싸고 있으며, 이밖에 궁 서쪽에 의정부 청사로 쓰였던 수정전(修政殿)이 있고 그 위에 경회루가 있으며, 건춘문과 영추문 안에 수많은 건물이 배치되어 있었다.

이렇듯 경복궁의 중심배치는 결국 광화문에서 향오문까지의 전조와 그 후편의 후침으로 이루어졌으며, 다시 외조∙치조∙연조의 3조로 나누는 궁의 삼문은 광화문‧근정문‧향오문이 된다.

외조는 광화문에서 근정문까지인데 이곳에는 수문장청을 비롯한 내병조‧영군직소‧수각 등이 있었고, 치조는 근정전을 비롯한 내삼청‧예문관‧융문루‧융무루‧사정전‧만춘전‧천추전 등이 포함되었다. 또한 후침의 연조에는 강녕전‧연생전‧경성전‧교태전‧흠경각‧자경전 등이 속하였다.

대부분의 건물배치 형식은 남향이고, 각 건물의 중심축은 중앙의 기본축에 평행하고 있다. 그러나 경회루 주변은 중심구역과 다른 분위기 공간을 형성하고 있다.

즉 광화문에서 강녕전까지는 엄격한 좌우대칭의 원칙을 지켰고 절제된 단일 형식의 평면, 공간의 깊이와 건물, 건물과 기단 높이 등이 권위적인 건축으로서의 위계질서를 분명히 하여 형식적이고 권위적이며 이상주의적인 조형공간미를 보여주고 있다.

▲ 경복궁 후원 향원정.   ⓒ나각순

반면 양의문 뒤쪽의 배치는 중심부 건물의 평면형식을 벗어나 경회루의 동서 중심축을 경계로 남쪽에 배치된 건물들은 일자형 평면에서 탈피하고 있으며, 이러한 평면 형식상의 변화는 향원정 뒤의 건청궁까지 계속되고 있다.

경복궁에서 일어난 주요 역사적 사건으로는 태조 7년(1398) 제1차 왕자의 난과 단종 1년(1453) 계유정난(癸酉靖難), 중종 14년(1519)의 기묘사화(己卯士禍), 선조 25년(1592)의 임진왜란(壬辰倭亂), 고종 32년(1895)의 을미사변(乙未事變)과 이듬해의 아관파천(俄官播遷)을 들 수 있다.

그리고 경복궁의 근정전은 왕의 즉위나 세자의 책봉에 따른 조하와 진하를 받고 국가적 행사를 치르던 곳으로 근정전 근정문에서 즉위한 왕은 2대 정종(1398), 4대 세종(1418), 6대 단종(1453), 7대 세조(1455), 9대 성종(1469), 11대 중종(1506), 13대 명종(1545), 14대 선조(1567) 등 여덟 왕이었다.

현재 궁내에 남아 있는 주요건물은 근정전, 근정문과 그 회랑‧문루, 사정전, 수정전, 경회루, 자경전, 천추전, 제수합, 숙향당, 함화당, 향원정, 집옥재, 협길당 등이다. 건춘문과 신무문이 목조로 남아있고 영추문은 철근콘크리트로 중건되어 있으며, 1966년에 철근콘크리크로 중건었던 광화문은 2010년에 목조로 재건되었다. 즉 1988년 제24회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만춘전∙강녕전∙교태전 등 주요 전각이 복원되었다.

이어 동궁인 자선당, 고종과 명성황후에 의해 새로 건립된 궁궐 안 궁궐인 건청궁 경역 및 중궁전 뒤 후궁전에 이어 후원의 신전인 태원전 일대가 중건되고 나아가 그 대미를 광화문이 중건됨으로써 30년 복원사업이 일단락되었다. 즉 2010년 8월 15일을 기해 시멘트 건물로 왜곡되었던 광화문이 1867년에 중건된 경복궁을 바탕으로 하여 목조로 다시 지어지고 방향도 3.75도 서향하게 하여 바로 잡음으로써 경복궁의 정통성을 바로잡게 되었다.

실로 경복궁의 역사는 조선왕조의 역사를 대변한다고 할 수 있다. 아울러 오늘에 이어지는 한국사의 정통성 회복에 그 중심점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고려의 궁궐터를 이어 대한민국 수도 서울의 심장부로 이어졌으며, 우리나라를 상징하는 유적이자 시설물 제1호에 해당되는 것이다.

경복궁은 단순한 휴식공간으로서의 고궁이 아니라 우리 역사의 유구함과 생명력을 찾는 현장인 것이다. 따라서 경복궁의 파란만장한 변화과정을 이해하고, 그곳에서 벌어졌던 정치상황의 명암을 살펴 오늘의 시대상황을 견주어 생각하는 지혜를 키워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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