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 사는 평강공주
서울에 사는 평강공주
  • 박성우
  • 승인 2012.02.11 01: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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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짓달에도 치자꽃이 피는 신방에서 신혼 일기를 쓴다 없는 것이 많아 더욱 따뜻한 아랫목은 평강공주의 꽃밭 색색의 꽃씨를 모으던 흰 봉투 한 무더기 산동네의 맵찬 바람에 떨며 흩날리지만 봉할 수 없는 내용들이 밤이면 비에 젖어 울지만 이제 나는 산동네의 인정에 곱게 물든 한 그루 대추나무 밤마다 서로의 허물을 해진 사랑을 꿰맨다

…가끔… 전기가… 나가도… 좋았다… 우리는…

새벽녘 우리 낮은 창문가엔 달빛이 언 채로 걸려 있거나 별 두서넛이 다투어 빛나고 있었다 전등의 촉수를 더 낮추어도 좋았을 우리의 사랑방에서 꽃씨 봉지랑 청색 도포랑 한 땀 한 땀 땀 흘려 깁고 있지만 우리 사랑 알아서 앞마당 대추나무에 뜨겁게 열리지만 장안의 앉은뱅이저울은 꿈쩍도 않는다 오직 혼수며 가문이며 비단 금침만 뒤우뚱거릴 뿐 공주의 애틋한 사랑은 서울의 산 일번지에 떠도는 옛날이야기 그대 사랑할 온달이 없으므로 더더욱

작품출처 : 박라연(1951~), 『서울에 사는 평강공주』

■ 독자들로부터 참 많은 사랑을 받은 박라연 시인의 이 시는 199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이기도 하거니와 시인의 첫 시집 제목이기도 하지요.

어떻습니까. 이 시를 읽다보니 신혼시절이 절로 떠오르지요? 없는 것이 많아도 마냥 행복하기만 하던 시절. 가끔 전기가 나가도 좋았을 시절. 그야말로 인생의 꽃이었을 그 시절. 미혼들도 이 시에 빠져들다 보면 이것저것 잴 것 없이 곧장 결혼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질 것만 같습니다.

또한, 저렇듯 인정에 곱게 물든 동네에 들어 한번쯤 살아보고만 싶어집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는 ‘인정’이라는 말을 잊고 산지 오래인 것 같습니다. 여전한 것은 “장안의 앉은뱅이저울은 꿈쩍도 않는”다는 것뿐인 것 같습니다. 따뜻한 온정이 넘치는 서울이 그리운 겨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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