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문화유산, 창덕궁(昌德宮) ①
세계문화유산, 창덕궁(昌德宮) ①
  • 나각순 서울시사편찬위 연구간사
  • 승인 2010.10.01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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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각순의 '서울문화유산 둘러보기' 23]

▲ 창덕궁 정문 돈화문. ⓒ나각순

창덕궁은 사적 제155호로 지정되어 종로구 와룡동에 자리하고 있다. 태종 5년(1405)에 건축되었는데, 처음에는 정궁인 경복궁에 대하여 이궁으로 창건되었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경복궁이 소실되어 조선말 흥선대원군에 의해 복원될 때까지 약 300년 동안 정궁의 구실을 하였다. 그리고 창경궁과 더불어 동궐(東闕)이라고 불렀다.

창덕궁 조성

제1차 왕자의 난을 계기로 개경에 환도했던 조선왕조는 다시 정종 2년(1400) 제2차 왕자의 난을 계기로 정안군 이방원이 태종으로 왕위에 올라 자주 한양환도문제를 의논하였다. 태종은 개성에 남고자 하는 대신들의 의견을 무릅쓰고 태종 4년(1404) 10월 한양환도를 결정하고 먼저 왕이 정사를 수행할 궁궐을 새로 지을 것을 계획하였다.

이미 9월에 한경이궁조성제조(漢京離宮造成提調)을 임명하고, 상지관(相地官)을 한성에 보내 이궁 터를 잡게 하였다. 이때 이궁 건설계획의 반대에 부딪쳐 신도이궁조성도감(新都離宮造成都監)을 궁궐보수도감(宮闕補修都監)으로 고치기도 하였다.

10월에 들어 태종은 하륜의 말에 따라 무악 부근에 도읍할 만한 곳을 찾아보고, 6일 한성에 들어와 이궁을 향교동(鄕校洞, 고려시대 향교가 있던 곳) 즉 지금의 창덕궁 터에 궁을 지을 것을 명하였다.

궁궐 공사는 이궁조성도감제조 이직(李稷) 등의 설계와 감독으로 진행되었다. 태종 4년 10월에 착공한 후 5년 10월에 준공되기까지의 공사 중에는 한성부와 인근 군현의 많은 군졸과 승도‧농민 등이 동원되었으며, 농사철에는 농민을 돌려보내고 선군(船軍) 들로 대신하기도 하였다.

이 동안 태종은 5년 2월에 다시 한양으로 나와 연화방(蓮花坊) 조준(趙浚)의 집을 임시 거처로 삼아 자주 공사 현장에 나아가 공사 규모를 정하기도 하고, 종친 근신들과 함께 주연을 베풀어 감독관 등을 위로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주연을 이궁 경연청에 마련하기도 하고, 정전에서 정사를 보았던 것을 보면 이때에 벌써 중요한 건물들이 세워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8월에 들어 한양환도를 서둘러 10월에 한성으로 옮길 것을 의정부에 맡기고, 한양에 분사(分司)를 설치하고 한양의 관아건물과 관원들의 거주처를 수리하게 하였으며, 이를 위해서 충청도와 강원도의 인부를 징집하기도 하였다. 태종은 1405년 10월 11일 한양 환도와 더불어 그날로 신궁 건설 현장에 나아가 제조 이하 부역군인들을 위로하고 포상하였다.

이어 10월 20일 왕이 신궁에 들어가게 되는데, 이날은 한경(漢京) 환도와 신궁 낙성의 축하행사를 겸하였고 이때 신궁을 ‘창덕(昌德)’이라 이름하니, 덕을 쌓아 크게 이루어 교화(敎化)에 힘쓰라는 뜻으로 왕도정치를 이루는데 이를 교훈 삼고자 한 것이다. 이때 찬성사 권근은 화악시(華嶽詩)를, 좌정승 하륜은 한강시(漢江詩)를 지어 환도와 신궁 낙성을 축하하였다.

창덕궁 궁궐 이름의 의미

▲ 창덕궁 낙선재. ⓒ나각순

창덕궁 낙성 때 궁궐의 이름의 유래에 대한 기록은 찾아 볼 수 없으나, ‘궁궐지’에 10세기에 순조가 지은 ‘창덕궁명병서(昌德宮銘幷序)’가 있어 그 의미를 알 수 있다. 이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대저 창(昌, 창성할 창)은 성(盛, 성할 성∙많을 성∙클 성)이요, 덕(德)은 도(道, 사람이 지켜야 할 근본 이치-길)이다. 성(盛)은 성(聖, 통할 성-크게 통하여 사람을 교화함, 지극할 성)이요, 도 또한 성(聖)이다. 성(聖)이 있은 연후에 도가 있고, 도가 있은 연후에 반드시 덕이 있으며, 덕이 있은 연후에야 비로소 창성하게 할 수 있다. 창성하고자 하면 옛 삼로(三老) 동공(董公;董仲舒)이 한무제(漢武帝)에게 고한 말을 생각하면 될 것이다. 사람은 인(仁, 인자∙자애∙사랑)하다.

왜냐하면 사람은 하늘에서 받아 타고난 것은 모두가 선(善)인데(맹자의 성선설), 사욕(私慾)에 가려서 다만 그 본성을 잃었을 뿐이다. 비록 본성을 회복하고자 하나 그 근본이 무너지면 수리하려 해도 어찌할 수가 없다. 만일 총명하고 예지가 있어 그 본성을 다하는 자가 있다면 하늘은 반드시 그에게 명하여 억조창생의 임금과 스승으로 만들 것이다. 그러므로 요(堯)∙순(舜)이 천자의 자리에 있을 때 고요(皐陶)와 직설(稷契)이 그를 보살피는 재상이 되었던 것이다.

임금이 되어서는 임금의 도리를 다하고, 신하가 되어서는 신하의 도리를 다하는 것이니, 이 창덕궁의 명(銘)이 어찌 단순한 궁의 이름일 뿐이겠는가. 인군(人君)은 창덕(昌德)에 힘써야 한다는 뜻이다. 옛날 신하가 대부분 전각의 이름으로써 임금의 덕을 힘쓰게 하였으니, 전각의 이름이 어찌 금판(金板)에 새겨 단청으로 장식하여 한갓 아름다움을 감상하는 도구일 뿐이겠는가.

이에 명(銘)한다. 창(昌)은 창성하게, 성(盛)은 왕성하고 크게 하라는 뜻이다. 창의 뜻이 크니, 이 건물 이름의 교훈에 힘써야 한다. 한양의 남쪽이요, 왕도의 근본이라. 덕으로 이름하는 것은 덕의 근본을 밝히라는 뜻이니, 성(聖)을 본받고 덕에 힘써야 한다. 덕에 힘쓰면 국운이 길고, 국운이 길려면 오직 덕에 맞아야 한다. 큰 덕은 반드시 오래가며, 그 영향이 만방에 미칠 것이다.

창건된 창덕궁의 전각은 크게 외전과 내전으로 구성되었는데, 외전은 편전 3칸 보평청 3칸 정전 3칸 등 74칸, 내전은 정침청 3칸 동서침전 각 2칸 등 118칸의 규모였다. 그리고 이궁인 창덕궁의 정전과 내전의 건물이 모두 경복궁에 비하여 작은 편이지만 전정(殿庭)만은 경복궁의 동서 각 80척, 남 178척, 북 43척과 거의 같은 규모였다.

창덕궁의 변화

그런데 궁이 완성되었다고 하나 아직 궁궐로서 여러 시설이 미비하여 태종 연간에 궁내에 누각을 새로 짓고, 궁의 외문을 새로 세웠으며, 정전인 인정전을 다시 짓는 등 계속적인 건물 영건이 있었다.

즉 태종 6년에 광연루(廣延樓)와 해온정(解慍亭)을 짓고 그 앞에 못을 파서 연을 심어 상왕과 종친‧근신들을 불러 연회를 베풀었다. 태종 11년에는 진선문(進善門) 밖에 석교를 만드니 곧 금천교(禁川橋)로서 오늘날에도 창건 때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 돈화문 현판. ⓒ나각순

이듬해(1412) 진선문 남쪽에 ‘교화를 도탑게 한다’는 뜻의 ‘돈화문(敦化門)’이라는 누문을 세우니 이는 창덕궁의 정문으로 이때에 이르러 어느 정도 궁성의 규모가 정해졌다고 하겠다.

아울러 돈화문에는 무쇠 1만 5천근으로 주조한 큰 종을 달아 새벽과 밤늦게 종을 쳐서 시간을 알리고 치안질서를 유지하는데 기여하게 하였다. 그리고 인정전은 준공된 지 10년 만인 세종 즉위년에 개축하였으며, 인정전 개축 후 창덕궁 내에 경연청과 집현전‧장서각 등을 새로 지었다.

이어 단종 때의 한 차례 대대적인 보수공사가 있었으며, 세조 7년(1461) 경복궁에서 창덕궁으로 일시 이어하면서 궁성의 확장을 꾀하여, 이듬해 인가를 철거하고 궁성확장공사를 진행하여 성균관이 있는 반수(泮水)에 이르게 하였다.

아울러 이해 12월에는 궁내 각 건물의 이름을 고쳤으며, 선정전(宣政殿) 등 이때 붙여진 이름이 대체로 현재에 이어져 오고 있다. 그리고 성종 6년(1475)에 대제학 서거정으로 하여금 궐문의 이름을 짓게 하니 선인문(宣仁門)‧금호문(金虎門) 등 29개 문 이름이 정해졌다.

그리고 연산군은 창덕궁에서 정사를 보면서 인정전‧대조전 등 많은 전각들에 대한 개수공사를 명하고 있는데, 당시 정치적 상황으로 구체적인 내용을 알 수가 없으며 여기서 중종반정을 만나 강화로 유배가게 된다.

1592년 임진왜란으로 창덕궁을 비롯하여 경복궁과 창경궁이 모두 불에 타버렸다. 한성에 환궁한 선조는 지금의 경운궁(덕수궁) 자리에 있던 월산대군의 저택을 행궁으로 삼아 7년 동안 왕궁으로 사용하다가 선조 41년(1608)에 세 궁궐 중 창덕궁 재건을 제일 먼저 착수하여 인정전 등 주요 전각들이 복구되고 광해군 1년(1609)에 일차 완성을 보게 되었다.

1차 복구공사 뒤에도 광해군 2년 2차 공역을 벌여 영건청(營建廳) 주관으로 대체적인 공사를 마치었다. 이후 천문관측소인 흠경각(欽敬閣)도 재건되었다.

광해군 때 중건된 창덕궁은 10년 뒤인 인조반정으로 반정군의 실화로 인정전‧약방‧도총부‧춘추관‧홍문관 등 외전을 제외한 대부분의 내전 전각이 불에 타버렸다. 따라서 인조는 경운궁 별당에서 즉위하였으며, 이듬해 이괄의 난과 정묘호란‧병자호란 등으로 창덕궁 중건을 꾀하지 못하고 인조 25년(1647)에 와서야 창덕궁수리도감(昌德宮修理圖監)이 설치되어 승정원‧선정전 등 외전 314칸과 대조전‧희정당‧보경당 등 내전 421칸 등 도합 735칸이 재건되었다.

이 재건공사에는 광해군 때 별궁으로 지었던 인경궁(仁慶宮)의 전각을 헐어내어 그 자재를 그대로 활용하였기 때문에 불과 5개월만에 완공을 볼 수 있었다. 그 공사전모를 기록한 ‘창덕궁수리도감의궤(昌德宮修理圖監儀軌)’가 현재 전하고 있다.

이후 효종에서 숙종을 거쳐 영‧정조 연간에는 창덕궁의 대규모 중건이나 수리는 없었고, 효종 7년(1656)에 장렬왕후 조대비의 거처를 위하여 인정전 북서쪽인 흠경각 자리에 만수전 건립에 착수하여 이듬해 완공되었다.

그리고 현종 8년(1667) 대비인 인선왕후를 위하여 경덕궁의 집희전(集禧殿)을 철거하혀 집상전(集祥殿)을 영건하였으며, 숙종 30년(1704)에 대보단(大報壇)을 후원에 설치하고, 영조 20년(1744)에는 승정원에서 불이나 인정문과 좌우 행각이 소실되어 이듬해 중건되었다.

▲ 창덕궁 인정전. ⓒ나각순

순조 때는 창덕궁에 큰 화재가 있었다. 순조 3년(1803) 인정전이 소실되어 인정전영건도감을 설치하여 1년만에 중건하였다. 인정전의 재건공사는 당시 조선왕조의 정궁 정전을 중건하는 것으로써 당대 최고의 장인들이 동원되어 장려한 건물을 만들었으며, 그 상세한 내용을 기록한 ‘인정전영건도감의궤’가 전한다.
그리고 순조 33년(1833)에는 큰 화재가 발생하여 대조전과 희정당을 비롯한 내전의 거의 대부분을 태워버렸다. 내전의 복구는 영건도감이 바로 설치되어 그해 10월에 착공하여 이듬해 9월에 완공되었는데 ‘궁궐지’에 의하면 전의 건물 터에 같은 규모로 모두 370여칸이 복구된 것으로 나타난다.

그후 헌종 12년(1846) 후궁들을 위한 낙선재가 건립되었으며, 철종 8년(1857)에는 순조 4년에 중건한 인정전을 완전히 해체하는 개수공사가 있었으며 고종 14년(1877)에도 창경궁의 수리와 함께 창덕궁의 수리공사가 있었다.

창덕궁이 마지막으로 큰 화재를 입은 것은 1917년으로 1920에 중수되었다. 당시는 일제강점 시기로 순종은 창덕궁전하(昌德宮殿下)로 격하되어 실질적으로 창덕궁에 유폐된 생활을 하던 때이다. 대조전‧희정당‧경훈각 등 내전의 대부분이 소실되어 순종과 황후는 연경당으로 피신하기에 이르렀다.

4일 후 회의를 열어 건물복구는 한국식을 위주로 하고 양식의 건물도 짓기로 하였으며, 중건 건물은 경복궁의 여러 전각을 철거하여 옮겨 짓기로 하였다. 따라서 경복궁의 교태전‧강녕전‧동서행각‧연길당‧경성전‧연생전‧흠경각‧함원전‧만경전 등을 철거하여 창덕궁 대조전‧흥정당‧흥복헌‧경훈각‧함원전 등을 중건하였다. 원래 1919년에 완공할 예정이었으나 도중에 고종이 승하하고, 3‧1운동이 전개되는 등 큰 사건으로 말미암아 1920년에 가서야 준공을 보게 되었다.

한편 조선왕조 궁궐의 위엄을 떨어뜨리고자 1926년 순종이 대조전에서 승하한 뒤 창덕궁을 내∙외국인에게 관람을 허가하고, 인정전 동서행각과 인정문과 월랑이 전시 용도로 개조되면서 많은 전각이 철거되고 개수되는 등 그 모습이 변형되기에 이르렀다. 광복 후에도 일반시민의 관람이 성행하면서 남아있던 전각들도 나날이 훼손되었고 후원의 모습도 크게 변모되었다.

이에 1976년부터 1978년 사이에 대대적인 정비공사가 이루어져 현재의 모습을 보이며 일반인의 관람도 제한하고 있다. 그리고 1992년부터 인정문과 인정전의 행각을 본 모습으로 복원하고자 기존 행각을 해체하고 기단부의 발굴조사와 더불어 복원공사가 진행되어 현재의 모습으로 완공되었다.

→ 세계문화유산, 창덕궁(昌德宮) ② 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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