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문화유산, 창덕궁(昌德宮) ②
세계문화유산, 창덕궁(昌德宮) ②
  • 나각순 서울시사편찬위 연구간사
  • 승인 2010.10.08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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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각순의 '서울문화유산 둘러보기' 23]
창덕궁의 건물 배치

▲ 창덕궁 돈화문 처마선. ⓒ나각순

다음으로 창덕궁의 배치구조를 살펴보자. 창덕궁은 크게 돈화문과 인정문‧인정전을 중심으로 한 외전과 대조전을 중심으로 한 정침과 주변 전각으로 구성된 내전, 그리고 후원으로 구분된다.

창덕궁의 지형은 넓게 트인 평지가 아니라 후면에 북악의 응봉에서 내려오는 낮은 산언덕이 있고 그 좌우로 평지를 이룬 곳으로, 건물의 배치는 이러한 자연지리적인 지형을 이용하여 이루어졌다.

따라서 궁의 서남모퉁이에 정문을 두고 그 동북방향에 정전과 부속 행각을 두었으며, 정전의 동쪽에 내전을 배치하고 후방의 산언덕 기슭을 이용하여 후원을 조성하였다.

여기서 순조 26년(1826)경에 편찬된 ‘동궐도(東闕圖)’를 중심으로 순조 연간과 그 이후의 전각배치를 살펴보자. 궁의 담장은 남으로는 정문인 돈화문을 출발하여 종묘 뒤의 작은 언덕을 따라 이어지고, 그 동쪽은 창경궁에 연결되며, 서쪽은 작은 개천 밖으로 개천을 따라 북으로 뻗었으며, 북방은 후원으로 되어있다.

돈화문을 들어서서 오른쪽으로 꺾어 금천교를 지나 진선문에 이르고, 이 문을 들어서면 남쪽에 내병조와 호위청 등이 있다. 다시 왼쪽으로 꺾어 돌면 정전의 정문 인정문이 나타나며 진전문과 인정문 주변은 사방 모두 행랑으로 둘러싸여 있다. 남향한 인정문을 들어서면 품관 표석이 남북으로 늘어서고 그 뒤로 월대 위에 남향하여 정전인 인정전이 우뚝 자리잡고 있다. 인정전의 앞뜰은 모두 돌로 깔려 있으며 동서 사방에 월랑이 있다.

▲ 창덕궁 부용지와 주합루. ⓒ나각순

인정전 동쪽에 편전인 선정전이 남향하여 있고 사방에 행각이 있으며, 특히 남행각 중앙문에서 선정전 중앙 바로 앞까지 복도 4칸이 나있다. 이와 같이 돈화문에서 금천교를 건너 진선문을 지나 인정문을 거쳐 인정전과 선정전까지의 구간은 창덕궁의 가장 중심이 되는 곳으로 외전의 핵심이 된다.

이밖에 외전을 형성하는 건물은 크게 보아 선원전 등 인정전 서쪽 일대의 건물군과 공상청‧내반원 등 인정전 남쪽의 건물군이다.

선정전 동편으로 내전의 일곽이 전개되는데 희정당의 뒤로 대조전이 있고 그뒤에 경훈각 등의 건물이 있다. 중전의 정침인 대조전은 인정전의 동북방에 남향하여 있고, 그 동서쪽에 흥복헌과 융경헌이 접하고 있으며 정면 중앙에는 작은 월대가 있고 남쪽에 선평문과 좌우행각이 앞뜰을 둘러싸고 있다.

대조전의 북쪽으로 동서에 전각이 둘 있는데, 서쪽은 2층 누각으로 상층은 숙종이 피서를 즐겼다는 징광루이고 하층이 경훈각이며, 동쪽은 집상전이다. 집상전은 대조전과 같이 용마루가 없는 건물이었으나 화재 후 중건되지 않았다. 경훈각과 집상전 사이에는 후면의 경사지에 장대석으로 화계(花階)를 꾸미고 괴석과 화목을 심어 조경하였다.

희정당 동편에는 성정각(誠正閣) 등 부속건물이 있으며, 그 옆으로 왕세자의 처소인 중희당(동궁)이 있었고, 그 등성이 아래 낙선재와 창경궁이 접해 있다.

이러한 창덕궁의 건물배치는 법궁이었던 경복궁과는 매우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즉 경복궁은 외전과 내전이 앞뒤에 놓이고 정문과 정전은 남북 직선 축 상에 나란히 놓여 질서정연한 대칭구조를 가지는데 반하여 창덕궁은 자연 지형조건에 맞추어 자유스럽게 배치되어 있다.

창덕궁 후원
 
한편 창덕궁 후원은 일명 금원(禁苑)‧북원(北苑)‧비원으로 불리는데 창경궁의 후원이 되기도 한다. 후원이 처음 조성된 것은 태종 때로 거슬러 올라가며, 광해군 때 창덕궁을 복원하면서 새로이 건물을 짓고 연못을 조성하였으며, 인조와 숙종 때 많은 정자와 건물을 지었다.

현재도 그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으며 100여종이 넘는 수종에 300년이 넘는 거목들이 있고 계류와 연못‧정자들이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옛 궁궐의 조경 수법을 보여주고 있다.

▲ 창덕궁 후원 옥류천. ⓒ나각순

후원은 제1공간으로 부용지와 부용정, 영화당과 춘당대, 어수문을 일주문으로 하는 주합루와 서향각, 희우정과 기오정 그리고 사정(四井)기념비각이 있다. 제2공간으로 불로문을 지나 애련정과 애련지, 사대부집을 본떠 지은 연경당이 있다.  제3공간으로 반도지∙관람정∙승재정∙반월지∙존덕정∙일영대 등이 연못과 괴석, 그리고 정자와 나무숲으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제4공간은 옥류천 공간으로 청의정∙태극정∙농산정∙취한정∙소요정 등이 둘려있고, 인조의 친필이 새겨진 소요암과 창덕궁의 명당수인 옥류천의 원천인 어수우물 옥정수가 있다. 제5공간은 산마루에 취규정∙능허정∙청심정이 있는 공간으로 후원 중 가장 고요하고 적막하여 은사의 안식처와 같은 느낌을 준다.

창덕궁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실

창덕궁에서 일어난 주요 역사적 사실은 중종반정과 연산군의 축출, 인조반정과 광해군의 축출, 이괄의 난의 의한 반란군의 한성점령, 효종의 대조전에서의 승하와 북벌계획의 좌절, 숙종 때의 경신대출척‧기사환국‧인현왕후의 폐출‧갑술옥사‧신임사화 등의 정치적 혼돈, 정조의 규장각 설치와 실사구시 학문 및 문예부흥 등을 들 수 있다.

▲ 조선왕조 마지막 왕실의 출입문, 단봉문. ⓒ나각순

근대 제국주의 침략과정에서 전개된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의 발발과 고종의 피신 및 청군과 일본군의 창덕궁 침입이 있었다. 급기야 불법적인 일제의 사주를 받아 병탄을 추진하던 이완용 집단은 대조전 흥복헌에서의 어전회의를 강요하였고, 급기야 윤덕영이 순종의 후비 순정황후 윤씨로부터 강탈한 옥새를 임의로 찍어 위임장을 날조하였다.

그리고 남산의 통감관저에서 순종의 수결이 없는 조약문에 날인하여 일주일이나 민심 동향을 살피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1910년 8월 29일 발표된 조약문에 의해 대한제국은 멸망을 고하게 되었으니, 친일매국관료와 일제의 만행은 우리 5천년 역사에 유일한 외세에 의해 식민지 전락의 경험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보전

우리 민족사의 가장 아픈 경험을 한 궁궐, 창덕궁, 이제 우리나라 정원의 특징을 가장 잘 간직한 모습으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정원으로 인정되었다. 창덕궁은 유구한 역사의 터전이었고, 특히 국권을 지키지 못한 아픔을 간직한 곳이었기에 우리의 가슴을 아리게 하는 현장이었다.

이러한 역사성과 더불어 자연 지세에 따라 조화를 이루며 자리한 궁궐건물이 우주의 질서를 함축하여 배치된 모습이니, 그 탁월한 보편적 가치와 진정성은 1997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높이 평가되고 있다.

이제부터는 보존과 자연의 질서에 역행하지 않는 관리에 진정성 어린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며, 관광자원으로서의 활용에 보다 적극적이고 창조적인 아이디어가 반영되어야 할 것이다.

이에 무엇보다도 관리와 보전에 주인의식이 강조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아무리 훌륭한 자원이 있다하더라도 주인다운 주인이 없으면 남의 것이 되고 마는 것이 세상의 흐름인 것이다. 우리 문화의 자존을 위해 다 같이 참여하고 실천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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