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사실명제로 지어진 낙산 성벽
공사실명제로 지어진 낙산 성벽
  • 나각순 서울시사편찬위 연구간사
  • 승인 2010.04.28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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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각순의 ‘서울 문화유산 둘러보기’ 3]

낙산은 조선시대 한양도성의 좌청룡, 즉 동쪽 관문에 해당하는 산이었다. 낙타산ㆍ타락산이라고도 하였다. 그리고 ‘낙’(駱)자는 ‘마’(馬) ‘각’(各)으로 나누어지니 각기 말을 타게 되는 형국으로 붕당의 형성과 정치세력 사이의 갈등이 출현될 것을 예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낙산의 산등성이를 따라 서울성곽이 철옹성처럼 둘려 있어, 서울시민으로 하여금 나라와 내 고장을 지키는 역사의식을 고취하는 데 기여하고 있기도 하다.

▲ 서울성곽 낙산 성벽. ⓒ 나각순

세종 때 충청도민·전라도민이 축조

낙산의 성벽 축조는 태조 때는 경상도 주민, 이어 세종 연간에는 충청도와 전라도 주민이 동원되었다. 세종 4년(1422년)에 토성 부분을 석성으로 고쳐 쌓을 낙산 구간에 해당하는 ‘래’(來)에서 ‘세’(歲)자까지 10구간은 충청도 주민, ‘율’(律)자에서 ‘려’(麗)자까지의 15구간은 전라도 주민이 동원되어 모두 석축으로 개축하였다. 이때 동원된 주민의 출신 지명을 새긴 암각 글씨가 남아 있다.

▲ 부안 평택 지명이 보인다. ⓒ 나각순

즉 낙산 성벽이 끊긴 정상 부분 위․아래로 오산(예산의 옛 이름)ㆍ단양ㆍ결성(홍성군 결성면)ㆍ평택(조선 초 충청도에 속함) 등 충청도 지명이 보이고, 철거된 이화여대부속병원 축대 아래 부분에 동복(화순군 동복면)ㆍ함열(익산시 함열읍)ㆍ옥구ㆍ김제ㆍ정읍ㆍ해진(해남과 진도)ㆍ무안 등의 전라도 지명이 보인다.

이렇듯 세종 4년에 축조된 낙산 성벽에 지명 실명제가 이루어졌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성벽이 무너지거나 훼손될 경우 해당 지역주민이 다시 동원되고, 지방수령 등 감독관의 징계를 전제로 한 것이었다. 이러한 공사실명제는 우리 조상들이 조선왕조실록과 비변사등록 등 철저한 기록을 남겨 한 점 의혹 없이 투명하게 공사를 수행하려 한 노력과 표리관계를 이루는 것으로, 부정과 비리로 얼룩진 오늘날의 사회지도층 행각에 경종을 울리는 반면 거울이 되는 것이다.

1704년 훈련도감에서 재건

▲ 숙종 때 훈련도감 성곽 축조 책임자 이름이 새겨져 있다. ⓒ 나각순

이러한 공사실명제의 전통은 조선후기 한양도성을 재건한 삼군영 군인들의 축조 현장에서도 볼 수 있다. 즉 숙종 30년(1704년)에 도성 방위계획에 따라 낙산지역의 성곽 축조는 훈련도감에서 담당하였다. 흥인문(동대문) 가까이 있는 낙산 남쪽 끝 성곽 부근에 동대문 바로 북쪽에 “訓局 策應兼督役將十人 使韓弼榮 一牌將折衝成世珏 二牌將折衝全守善 三牌將司果劉濟漢 石手都辺首吳有善 一牌辺首梁六賢 二牌辺首黃承善 (三牌辺)首金廷立 康熙四十五年四月日改築”라고 새겨져 있어, 숙종 32년(1706년)에 훈련도감에 소속된 사ㆍ패장ㆍ석수ㆍ도편수ㆍ편수 등 공사에 참여한 책임자를 지금도 알 수 있다. 역사 속에 남긴 떳떳한 이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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