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철은 나를 수행자로 만든다
전철은 나를 수행자로 만든다
  • 박성우(시인·우석대 교수)
  • 승인 2012.03.18 03: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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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철은 나를 수행자로 만든다

 

 

 

 

 

 

아침 일곱시 무렵에 전철을 탄다
허벅지가 드러난
치마를 입고 내 앞에 붙어 있는 여자 순간 나는
본능만의 성교를 꿈꾼다 강간이나
추행이라는 무서운 말들이
내 안에 있구나 불현듯
아버지를 죽인 한 아들이 신문 속에서
내 마음과 함께 구겨지고
비명을 지르거나 욕을 해대는 사람들
발은 바닥에서 떨어져 몸뚱이가 날아갈 자세를 취해도
날개는 펴지지 않고
땀냄새와 악다구니만 자갈처럼 날아다닌다
자라나는 아이들 눈에 안 보이는데
담담한 표정으로 신문을 뒤적이는 자여 그대는
어떤 한 경지에 다다른 것처럼 보인다
복잡한 열차 속에서 다른 사람들
문드러지든가 말든가 차가
흔들리는 대로 흔들리고 쏠리는 대로 쏠리며 그대는
침묵한다 키 작은 나는
앉지도 못한 채 면벽 수도하고
오줌을 참고 성욕을 참고 동대문이나
충무로에 내리면 매캐한 바람이 코를 쑤시고
차 안에 남아 있던 자들의
비명은 들리지 않는다
일하기 전에 피곤해진 몸으로
기어가는 우리는 일개미들처럼
까맣게 줄지어 굴속을 오르내리고


작품출처 :  이대흠(1968~),  『눈물 속에는 고래가 산다』


■ 출퇴근길의 지하철은 좀 끔찍합니다. 그야말로 ‘지옥철’이지요. 오죽하면 시인이 “전철은 나를 수행자로 만든다”고까지 했겠습니까. 저 또한 “비명을 지르거나 욕을 해대는 사람들” 틈에 끼어서 “흔들리는 대로 흔들리고 쏠리는 대로 쏠리며” 인내력을 키운 적 많습니다.  특히 지난해에는 32개역을 지나서야 밥벌이 일터에 닿고는 했는데, 그야말로 죽을 맛이었습니다. 그래도 서울 지하철은 1974년 8월 15일 1호선이 개통된 이래 서울 시민의 발 역할을 가장 잘 하고 있으니, 애용할 수밖에 없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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