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봄, 광화문
2004년 봄, 광화문
  • 박성우 시인(우석대 교수)
  • 승인 2012.04.09 15:4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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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봄, 광화문

 

 

 

 

 

 

                                                                                                                                                    -김해자-

  유모차도 휠체어도 왔다 퀵서비스도 느릿느릿 중절모도 왔다 실업자도 잠시 실업을 잊고 왔다 누군가는 오늘도 굳게 닫힌 일터를 두드리다 왔고 하루 종일 서류더미에 묻혀 있다 왔다 누구도 누구를 위해서 오지 않았다 당도 대통령도 우리의 절대희망이 아니다 우리도 원한다 대통령이 없는 세상을 아니다 우리가 정말 원하는 것은 대통령도 정당도 모른 채 즐겁게 밥 먹고 평화롭게 일하고 사랑하며 살아도 되는 세상이다 좋은 세상이라면 왜 알아야 하는가 공기처럼 바람처럼 빛처럼 생명을 주는 것들은 소리도 형체도 없지 않은가

  하지만 아직은 아니다 있을 건 있어야 하고 없어야 할 것은 없애야 한다 새벽부터 밤까지 본드를 붙이고 밭 갈아도 여전히 먹고살기 벅찬 가난한 백성들이 많은 세상이기에 우리는 이 작은 촛불을 켜든다 힘없는 자에게 힘 있는 자 적이 되는 이 모든 억압을 불 싸지르기 위하여 만인이 만인에게 적이 되고 분노가 되는 세상이 아니라 만인이 만인에게 친구가 되고 위안이 되는 세상을 위하여 한 사람이 촛불 밝혀 한 사람이 더 따뜻해지고
  두 사람이 촛불 밝혀 두 사람이 따뜻해지고 천 사람 만 사람의 촛불로 우리 모두가 환해지도록 지금, 우리는 밝힌다 이 작고도 사소한 촛불 하나를

작품출처 : 김해자(1961~), 『축제』

■ 2004년 봄, 광화문. 대통령 탄핵반대, 촛불들이 넘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8년이 흘렀습니다. 세월 참 빠릅니다.
텔레비전 뉴스를 보다가 끄고 “우리가 정말 원하는 것은 대통령도 정당도 모른 채 즐겁게 밥 먹고 평화롭게 일하고 사랑하며 살아도 되는 세상이다”라는 구절을 오래 들여다보았습니다. 그러다가 저도 시인처럼 중얼거려보았습니다. “좋은 세상이라면 왜 알아야 하는가”
그러다가는 또 중얼거려봅니다. “공기처럼 바람처럼 빛처럼 생명을 주는 것들은 소리도 형체도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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