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 오후
봄날 오후
  • 박성우 시인(우석대 교수)
  • 승인 2012.04.16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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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 오후

 

 

 

 

 

-김선우-

늙은네들만 모여앉은 오후 세시의 탑골공원
공중변소에 들어서다 클클, 연지를
새악시처럼 바르고 있는 할마시 둘
조각난 거울에 얼굴을 서로 들이밀며
클클, 머리를 매만져주며
그 영감탱이가 꼬리를 치잖여― 징그러바서,
높은 음표로 경쾌하게
날아가는 징·그·러·바·서,
거죽이 해진 분첩을 열어
코티분을 꼭꼭 찍어바른다
봄날 오후 세시 탑골공원이
꽃잎을 찍어놓은 젖유리창에 어룽어룽,
젊은 나도 백여시처럼 클클 웃는다
엉덩이를 까고 앉아
문밖에서 도란거리는 소리 오래도록 듣는다
바람난 어여쁜, 엄마가 보고 싶다

작품출처 : 김선우(1970~), 『내 혀가 입 속에 갇혀 있길 거부한다면』

■ 봄비가 내리던 봄날 오후였어요. 시집을 읽다가 책갈피에 끼워져 있는 꽃잎을 발견했어요. 검게 말라붙은 목련꽃잎이었지요. 하지만 언제 끼워 넣었는지 어디서 끼워 넣었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는 꽃잎. 까마득 잊은 사이 까마득 늙어버린 꽃잎.
우리가 놓친 사이 까마득 늙어버린 꽃잎은 저기 탑골공원에도 있네요. 까마득 늙었으나 “거죽이 해진 분첩을 열어/ 코티분을 꼭꼭 찍어바르”는 어여쁜 할마시 둘. 어디, 개나리꽃 목련꽃 진달래꽃 산수유꽃 살구꽃 벚꽃 같은 꽃만이 꽃이겠습니까. 바야흐로 꽃 피는 봄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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