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경덕
신림동 오복연립
벽에 ×자가 크게 그려져 있다
×표 밑 붉은 페인트로 써놓은
이사 갓씀 이사 갓씀
두어 집을 남기고 벽은 붉은 글씨로 덮여 있다
연립주택 앞 늙은 벚나무
찢어진 현수막을 붙들고 시위 중이다
‘재건축 결사 반대’
오래 앓았던 글씨가 바람에 날리고
삼층 꼭대기 빨랫줄 수건 한 장
백기처럼 펄럭인다
가스통이 뒹구는 집앞 공터
문짝 없는 장롱과 부러진 의자들
봄비에 시름시름
벚나무 아래, 낯선 사내들 앉았다 가고
벽을 타고 퍼져간 붉은 글씨
깨진 유리창으로 하나 둘 기억이 빠져나간 집
머리띠 두르고 구호를 외치던
사람들은 어디로 갔는가
혼자 남아 시위 중인 오복연립 벚나무
종일 허공에 꽃잎을 뿌리고 있다
작품출처 : 마경덕(1954 ~ ), 『신발論』
■ 신림동 오복연립 벚나무도 “종일 허공에 꽃잎을 뿌리고” 있을까요. 꽃이 피는가했더니 그새, 곡우입니다.
이맘때면 우리는 비에 꽃이 지는 것을 못내 아쉬워하고는 하지요. 누구는 꽃이 지는 게 아쉽다고 한잔 하러 가기도 하고 또 누구는 꽃비 내리는 길을 일부러 걸어보기도 하겠지요. 그렇지만 너무 아쉬워만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봄비는 꽃을 떨어뜨리러 오는 게 아니라 수고한 오복연립 벚나무에게 물 한 모금 주러 오는 것일 테니까요. 꽃자리에 열매를 달아주러 오는 것일 테니까요.
“머리띠 두르고 구호를 외치던” 그 사람들도 이제는 저마다 귀한 열매를 잘 키워가고 있어야만 하는 사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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