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 - 심재휘
첫사랑 - 심재휘
  • 박성우 시인·우석대교수
  • 승인 2012.05.07 09:4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장충동에 비가 온다
꽃잎들이 서둘러 지던 그 날
그녀와 함께 뛰어든 태극당 문 앞에서
비를 그으며 담배를 빼물었지만
예감처럼 자꾸만 성냥은 엇나가기만 하고
샴푸향기 잊혀지듯 그렇게 세월은 갔다
여름은 대체로 견딜 만하였는데
여름 위에 여름 또 여름 새로운 듯
새롭지 않게 여름 오면
급히 비를 피해 내 한 몸 겨우 가릴 때마다
비에 젖은 성냥갑만 늘었다 그래도
훨씬 많은 것은 비가 오지 않은 날들이었고
나뭇가지들은 가늘어지는 운명을 향해 걸어갔다
가늘어지기는 여름날 저녁의 비도 마찬가지였지만
그 후로 많은 저녁들이 나를 지나갔지만
발 아래 쌓인 세월은 귀갓길의 느린 걸음에도
낡은 간판처럼 가끔 벗겨지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면 마른 꽃잎에게 묻는 안부처럼
들쳐보는 그 여름 저녁에는 여전히
버스만 무심하게 달리고 있었다
이별도 그대로였다
비가 오는 장충동 네거리 내 스물 두 살이
여태껏 그 자리에 서 있던 거였다

작품출처 :  심재휘(1963~ ), 『적당히 쓸쓸하게 바람 부는』

■ 연둣빛 오월입니다. 오월은 늦봄일까요. 초여름일까요.
어린이날인 입하(立夏)가 여름이 시작되었다는 알리기도 전에 어찌된 일인지 올해는 지난 사월 말부터 여름에 닿아 있는 것만 같습니다.
첫사랑처럼 뜨거운 여름.어찌되었든 첫사랑에도 색깔이라는 게 있다면 딱 이맘때쯤의 연둣빛이 아닐까하는 싱거운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첫사랑은 이루어지기는커녕  “엇나가”거나 “삼푸향기 잊혀지듯 그렇게” 잊혀지기 마련이지요.
첫사랑을 떠올려보는 일은 “마른 꽃잎에게 묻는 안부처럼” 쓸쓸한 일이지요.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