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서울역-백무산
밤 서울역-백무산
  • 박성우 시인·우석대교수
  • 승인 2012.05.25 10:0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늦은 밤 서울역 대합실
오가는 사람 번잡한 광고판 아래
여자 신발 한켤레 코를 맞춰 단정하게 놓여 있다
누가 벗어두고 간 것일까

오래 붙들고 놓지 않는 전화를 끊고
망설이다 목적지를 바꾸고 차표를 교환하고
울먹이던 전화소리 귀에 쟁쟁한데
다시 와보니 신발은 그대로 있다

어릴적 강 건너 나환자촌에 신문을 넣기 위해
매일 새벽 건너야 했던 강
어느 가을 새벽안개 속 바위 위에
여인이 벗어놓고 간 하얀 코고무신을 보았다
안개 짙어 물은 보이지 않은데
강은 내 발목을 오래 붙잡고 있었다
누군가 곁에 있어주어야 할 것 같았다

삶의 벼랑에 서면 걸어온 발을 다 벗어버리고 싶어서일까
발을 벗고 여자는 어디로 흘러간 것일까
역 앞 대로에는 앰뷸런스 소리 또 요란하게 달려가고

막차 안내방송이 울리고 신발은 그대로 있고
사람들이 빠져나가는데
죽음만큼 다른 삶을 찾아가는 역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작품출처 : 백무산(1955~    ),
『그 모든 가장자리』

■  서울역 대합실은 여전히 북적거리겠지요. 막차 안내방송이 흘러나올 무렵엔 마지막 분주함까지도 더해지겠지요. 우리는 흔히 백무산 시인을 노동시인으로만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편협한 생각이 백무산 시인을 좁은 의미의 노동시인으로 자꾸 묶어두려 했던 건 아닐까요. 우리네 비루한 가장자리의 삶을 가만가만 어루만지고 있는 이 시 「밤 서울역」은 어떻습니까. 늦은 밤 서울역 대합실 광고판 아래에 “여자 신발 한 켤레가 코를 맞춰 단정하게 놓여” 있군요. 신발을 가지런히 벗어 놓은 여자는 대체 “어디로 흘러간 것일까”요.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