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이 보이는 창- 장대송
남산이 보이는 창- 장대송
  • 박성우(시인·우석대교수)
  • 승인 2012.06.22 11:2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테이프를 올려놓고 밟자
마그네틱 이레이저가 윙윙거렸다

흔적만 남았을 뿐, 돌아오지 않을 소리를 쥐고
남산이 보이는 창 앞에 섰다
흐린 날 남산이 보이지 않는다고
늘 애처로워하던 그는 흐린 창으로 떠나갔다

지워지지 않은 소리는
지워진 소리를 찾고
지워진 소리는 침묵한다

강바닥 밑으로 향하는 지하도를 나와 침묵하는 눈들
잠시 무엇인가를 좇아 땅 위로 올라와서 낯선지
저 움푹 패인 것 같은, 튀어나온 것 같은 허초점(虛焦點)
지워지지 않은 마그네틱 테이프 속에 갇힌 소리들이 저럴까

기억하고 싶은 기억은 지우고
지우고 싶은 기억만 기억한다 하고 간 그대
뿌연 창으로 남산을 바라보던 뿌연 눈
그 허초점은 여전한가

언제부터인지 소리는 뭉쳐져 뇌 속에서 곱사등이로 살고 있다

■작품출처 : 장대송(1962~  ),  시집『옛날 녹천으로 갔다』

■ 일을 하다 지칠 때면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창밖을 내다보고는 합니다. 딱히 무언가를 보려는 것이 아니라 잠시 숨을 돌려보자는 것이겠지요. 어디론가 가고 있는 사람들을 멍하니 내려다보기도 하고 흐릿한 하늘을 별생각 없이 올려다보기도 합니다. 문득 창밖을 바라다봤을 때, 그러니까 그때. 눈에 들어오는 풍경이 남산이라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지만 시인에게 있어 남산은 자꾸 ‘허초점’이 잡히는 아픈 산입니다. 뿌연 창밖으로 보이는 남산은 눈에 안 들어오고 “기억하고 싶은 기억은 지우고 / 지우고 싶은 기억만 기억한다 하고 간 그대”만 아릿하고도 애련하게 들어올 뿐입니다. “흐린 날 남산이 보이지 않는다고 / 늘 애처로워하던 그”가 아른거릴 뿐입니다. 필경, 시인에게 있어 ‘그’는 “갇힌 소리”이자 갇힌 풍경일 것입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