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어가는 달- 민 구
기어가는 달- 민 구
  • 박성우 (시인·우석대교수)
  • 승인 2012.08.10 10:1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달이 기어간다
산꼭대기에 허물을 벗고 똬리를 틀던 달이
서울시내 한복판으로 스멀스멀 기어 내려온다
달리는 덤프트럭 바퀴에 밟힌다 터져서 내장이 튄다
납작해진 가죽, 양화대교 아래 떠있는 꼴이 우습다
헤엄칠 줄 아는 달, 굶주린 새가 지느러미를 쪼아도 끄떡없는 근육
갑자기 내 머리에 오줌을 싸는 건 누구 바짓가랑이에서 튀어나온 달?
나 어릴 적, 집에 돌아오면 부엌에서 접시를 핥던,
작은 기척에도 찬장 구석으로 숨는 앙증맞은 달
못 본 척하면 먼저 와서 안기는 넉살 좋은 딸
어느 날 내 눈에 알을 까고 먹구름 속으로 숨어버렸네
아직도 잠에서 깨면 팔베개를 하고 있는
놀라서 달아나다가 그만
창살에 끼어버린……

■작품출처 : 민 구(1983~  ),  계간『딩아돌하』, 2012 여름호
■ 조금 전, 소낙비가 지나갔습니다. 거리의 회화나무가 일순간에 휘청거렸고 미처 우산을 준비하지 못한 사람들은 건물입구나 버스정류장 쪽으로 마구 내달렸습니다. 후다닥 달려 나가는 소낙비 못지않게 사람들의 걸음도 참 빨랐습니다.
오늘 같은 밤에는 한껏 말끔하게 닦인 달이 두둥실 떠오르겠지요. 아파트와 아파트 사이로, 가로수와 가로수 사이로, 덤프트럭과 덤프트럭 사이로 떠오르겠지요. 기어이 양화대교 아래로 내려와 유유히 헤엄을 치겠지요. 달도 이런 여름엔 시원시원 젖고 싶겠지요.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