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천, 개발에 묻힌 역사와 문화
청계천, 개발에 묻힌 역사와 문화
  • 강안나
  • 승인 2012.08.24 1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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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만드는 서울>

청계천 복원 논의가 이루어지던 때 학생이었던 나는 사실 청계천이 뭔지도, 청계천 복원이 어떻게 이루어지는 지에도 관심이 없었을 뿐더러 청계천에 대한 추억도 기억도 없다.

마침 지난 7월 황평우 한국문화연구소 소장님과 함께 청계 광장에서 투어를 가질 기회가 있었다. 동고서저(東高西低) 지형인 우리나라의 강은 대부분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는데, 청계천은 특이하게도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고 있다. 인왕산과 삼청동(북악산)에서 흘러내려온 물줄기가 광화문에서 모여 한강으로 흐르는 것이 청계천이라고 한다.

삼청동에 많이 가보았지만 삼청동 어디에 물이 흐른다는 거지? 삼청동의 카페길은 복개, 즉 하천을 콘크리트로 다 덮었다는 사실! 서울이 옛 도성이긴 했지만 그 옛날엔 자연이 살아있었나 보다.

캄캄한 콘크리트 아래서 아무도 모르게 쓸쓸히 물이 흐르고 있다는 생각을 하니, 가슴 어딘가가 갑갑해졌다. 그렇다면 시민들의 휴식공간이 된 지금의 청계천이 그 옛날에는 어떤 의미였을까? 500년 전 청계천도 도시 공사의 결과물이었다. 배수가 되지 않으면 물이 넘쳐서 도시가 침수되는데, 그 당시 하수구가 있을 리 만무하고 청계천이 도시의 배수기능을 하였던 것이다.

단지 그 뿐이었을까? 요즘 서울의 부가 강남과 강북으로 나뉜다면 그 당시의 지표는 청계천이었다. 청계천 북쪽(현재의 광화문, 삼청동, 효자동)에는 부자들, 권력자들이 거주하였고 청계천 남쪽으로는 이 보다 낮은 상인들이나, 일반 백성들이 살았던 것이다.

청계천 주변에는 도편수(건축가), 역관(외교관) 등과 같이 프로페셔널한 기술을 가진 중인들이 거주하였다. 60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청계천이 한강으로 바뀌었지 결국 사람을 분류하려는 것은 변함이 없다.
청계천의 다리 이름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부근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고 한다.

마전교는 말을 파는 장사꾼들이 많았고, 모전교는 과일을 파는 모전(毛廛)이 많이 모여 있었다. 효경교는 맹교 혹은 소경다리라고도 하였는데 부근에 시각장애인들이 많이 살아서 그렇게 불렀다고 한다. 수표교는 물의 양을 측정하다 다리였는데, 얼마큼 수표가 잠겼느냐에 따라 사람들에게 위험을 알리기도 하고, 때로는 사람들의 출입을 금하기도 하였다.

현재 수표는 홍릉으로 이전되어 청계천에서 볼 수 없다. 또 하나 재미있는 사실은 숙종임금이 장희빈을 수표교에서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는 역사적 러브스토리가 숨겨져 있다는 것이다. 이런 숨겨진 이야기를 발굴하고 알린다면 무의미하게 지나갔던 돌, 장소, 다리 하나하나가 큰 의미들로 다가올 수 있을 것 같다.

광통교 아래는 특이한 조각이 새겨진 돌이 있는데, 이는 정릉에서 나온 것이라고 한다. 정릉을 감싸고 있던 병풍석에서 돌을 띄어와 청계천 복구 때 사용하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세밀하게 조각된 석판들은 제대로 관리되지 않아 각이 희미해지고 형태를 알아볼 수도 없었다.

아이러니 하게 진짜 광통교는 몇 미터 옆으로 이동시켜 놓고 새 다리를 세운 후 광통교 터만 사적으로 지정하였다. 광통교가 없어진 것도 아니고 버젓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는데 무엇이 크게 바뀐다고 다리를 역사적인 자리에서 이동시켰어야만 했을까?

당시 이명박 서울시장은 문화와 역사는 살리기 위해 청계천을 복원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 어느 곳에 문화와 역사가 있단 말인가.

문화유산은 과거의 모습을 간직한 채 남아 있을 때 역사로써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몃 번을 왔다 갔다 해도 돌덩어리밖에 보이지 않았는데 그날에야 비로소 청계천이 역사가 되고 문화가 되어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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