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젊은 날의 저녁
내 젊은 날의 저녁
  • 이지혜 직장인
  • 승인 2012.08.31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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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이의 시선
▲이지혜·직장인

“아기는 안 낳으려고. 나는 기본적으로 삶은 고통 그 자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한 생명에게 삶을 줘서 고통스럽게 하고 싶진 않아. 고통스러운 삶을 사는 것을 보는 것도 괴로워. 내가 다시 엄마 뱃속에 들어가면 난 진짜 이 세상에 안 나온다.”

불판 위 삼겹살들이 지글지글 익어간다.  “우리 소주 한잔할래?”
몇 달 전까지 지역 신문사 편집기자로 일하다 그만둔 친구가 잔을 건넸다. 오랜만에 대구에서 만난 대학 친구의 피부는 한결 맑아져 있고, 표정은 가벼워 보였다.

“야, 정말 결혼하고 나서 회사 관두니깐 ‘진짜 이게 삶이지’ 하는 생각 들더라. 나 아침마다 매일 수영 다니고, 오후에는 일러스트 학원 다녀. 일주일에 한 번은 기타 배우러 다니고. 시간 금방 간대이. 바빠도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사니까 삶의 질이 너무 달라.”

출장이 잡혀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 저녁을 먹은 날, 고깃집을 나오자 어둠이 거리에 내려앉아 있었다. 빈 손바닥 위의 공기는 손가락 사이를 자유자재로 빠져나갔다. 어디를 가든 익숙한 거리의 냄새는 익숙한 생각들을 꺼내왔다.

‘누구와 언제 결혼을 하느냐’는 오래된 물음이 내 젊은 날의 저녁에 찾아오면 어김없이 하늘의 별들은 지쳐 있었다. 고단한 달은 외로운 이의 밤을 얼마나 비춰줬기에 늘 반쯤 감긴 눈으로 나를 내려다봤다.

옆에서 걷고 있던 친구의 남편 자랑이 이어졌다. 지난 어버이날에 남편이 자기 어머니 옷 한 벌 사드리자고 했다는 이야기부터,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절대 돈을 쓰지 않는다는 둥….
“넌 진짜 남편 잘 만난 거야.”

친구에게 한 마디 건네면서 굽은 골목길로 들어섰다. 더운 열기로 가득한 대구를 떠나 시원한 바람이 부는 서울역에 도착했다. 지하철에 몸을 싣고 집으로 향했다.

“이 열차는 당산역까지 운행하는 열차입니다. 자는 분이 있으면 깨워서 함께 내리시기 바랍니다.”
순간, 웃음이 났다. 자는 사람을 깨워서 함께 내리라고? 내 인생에도 안내방송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삶에 대한 근심은 나보다 늘 쉽게 앞서 갔다. 걱정의 산에 오르지는 않았지만 마음은 걱정의 산을 오르락내리락을 반복했다.

집으로 걸어오는 길에서 삶은 어쩌면 평탄한 길로 이뤄져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힘겨워하고 높고 험한 언덕들을 넘고 있다고 생각한 순간이 많았지만 늘 땀을 적시는 바람 한 줌이 내 이마를 스치고 갔으니까.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이 번갈아 가며 이어졌으니까.

신도림역에서 내려 2번 출구로 걸어 나왔다. 세상의 거리는 일상의 순간들로 채워지고 있었다. 스쳐 지나가거나, 뛰어가거나, 누군가를 만나 반갑게 미소 짓거나,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거나, 전화 통화를 하고 있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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