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자기’의 수난시대
우리 ‘자기’의 수난시대
  • 김원진 서강대학교 신문방송학과 3학년
  • 승인 2012.10.12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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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기야 뭐해?”
여기서 ‘자기’는 일상에서 주로 사랑스런 연인을 부르는 애칭으로 사용된다. 아마 여보 다음으로 많이 쓰이는 애칭이 아닐까 싶다. 부부들이 나와 갈등을 털어놓는 프로그램의 이름도 <스타 부부쇼, 자기야>다. 단어의 연원을 찾아보니 자기(自己) 자신만큼 아끼는 사람이니까 '자기‘라고  부르지 않겠냐는 속설만 떠돈다. 그럴 듯하다. 뜻이 어찌됐든 자기는 소중한 존재임에 틀림없다.

이렇게 애지중지 다뤄야할 우리 ‘자기’가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고 있다. 동년배의 주변 친구, 선후배할 것 없이 너도나도 ‘자기’ 때문에 소리 없는 아우성을 친다. 여기, 나를 비롯한 청년들을 괴롭히는 두 개의 자기가 있다.

선두주자는 자기소개(서)다. 취업시즌을 맞아 다들 글쟁이가 됐다. 요새는 스토리텔링이 대세라서 드라마틱하게 자신의 삶을 포장해야 면접관의 눈에 들 수 있다고 한다. 물론, 적절한 과장과 절제의 미덕은 기본. 동시에 자신의 장점을 업무에 최적화시켜 서술한 자기소개서가 되어야지 서류전형을 통과할 수 있다고 한다. 다들 표준형으로 몇 개의 자기소개서를 써 놓고 조금씩 고치며 돌려쓰기 바쁘다. 기업에선 업무용 용어를 선호한다 하여 팀 과제는 팀 프로젝트로, ‘계획을 세우다’는 ‘전략을 수립한다’ 정도로 바꿔 쓴다고도 한다.  

어떤 지인은 교환학생 당시 경험했던 노숙인을 상대로 한 음악봉사 활동을 자기소개서에 썼다. 마침 학교에 전문적으로 자기소개서를 컨설팅해주는 전문가가 왔다고 해서 본인이 작성한 글을 들고 갔다고 한다. 그랬더니 전문가 왈. “이건 외국 경험이잖아요. 외국에서 경험이 우리나라에 적용되겠어요? 기업은 이렇게 현실성이 떨어지는 거 좋아하지 않습니다. 웬만하면 다시 쓰세요.”

아예 프로필사진부터 의상, 면접 그리고 자기소개서까지 종합적으로 컨설팅을 해주는 곳도 있다. 비용이 만만치 않지만, 워낙 남들이 우러러 보는 직장에 들어가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는 추세라 꽤 많은 학생들이 찾는다고 한다.

자기소개서에 못지않은 게 바로 자기계발(서)다. IMF체제가 시작하는 시점과 맞물린 2000년대 초부터 불었던 자기계발의 열풍은 오늘날에도 여전하다. 대다수 독자는 20, 30대다. 대부분의 대형서점에는 자기경영이라는 이름으로 자기계발서를 모아둔 코너도 있다. 인문학, 사회과학 서적이 1쇄(3000부)를 넘기기 힘든 상황에서 일련의 자기계발서는 만 단위를 훌쩍 넘는 판매고를 어렵지 않게 올린다. 
 

자기계발서에서 초점을 맞추는 세속적 성공 그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다. 인간이라면 하고자 하는 분야에서 성공을 추구하는 욕망이 있다. 분명 어떤 의미에서 나태함을 자극해주는 긍정적인 면이 있긴 하다. 다만 개인의 영달을 최우선시 하고, 인문 고전 독서마저 사회적 성공의 수단으로 삼는 자기계발서가 베스트셀러의 상위권을 점유하는 사회가 건강하다곤 볼 수 없을 게다. 이외에도 자기계발서는 실패는 곧 개인의 노력 부족이라는 미국식 개인주의를 설파하기도 한다. 자기계발서가 던지는 메시지를 독자들은 곧잘 내면화한다.

앞서 언급한 두 가지 ‘자기’에는 공통적인 함의가 있다. 기업 혹은 사회는 개인에게 점점 더 많은 것을 스스로 투자해서 배우길 바란다. 우리는 초, 중, 고등학교부터 부모의 돈으로 학원에서 예습을 한다. 기업은 대학에서 회계정도는 교양으로 습득해야 인재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기업은 신입사원 재교육 의무를 회피하고, 대학은 취업인재양성소로 변질되어 간다. 또, 대학생들에게 영어는 기본, 교환학생은 필수, 공모전 입상이면 금상첨화다. 물론 이 모든 걸 자기 스스로 해내야 한다. 그러다 우리 ‘자기’는 조금씩 지쳐간다. 

경제가 어려워 자살자 수가 급격히 증가했다는 그리스의 자살율은 한 달에 350명 꼴. 한국은 심각한 경제 위기에 봉착하지 않았음에도 한 달에 1290명의 비율로 시민들이 자살을 택한다. OECD 국가 중 자살율 1위를 수 년 째 굳건히 지키고 있다. 결국 남는 건 우두커니 홀로 서 있는, 혹사당한 ‘자기’ 뿐이기 때문이다. 황금만능주의에서 탈피해 공동체를 염려하고 타인을 도우며 살아가라고 했던 초등학교 도덕교과서에 진하게 그어진 밑줄은 그토록 공허했던가.

너무 많은 짐을 짊어진 우리 ‘자기’의 수난시대를 여기서 끝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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