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함께 돌자 서울 한바퀴-①정동
다 함께 돌자 서울 한바퀴-①정동
  • 서울타임스
  • 승인 2012.10.16 1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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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유산 1번지, 정동貞洞 첫반째 이야기

 

정동, 시작과 현재
‘정동(貞洞)’은 1396년태조 5년 이성계의 계비 신덕왕후 강씨(神德王后 康氏)의 능인 정릉(貞陵)이 도성 안지금의 정동에 조성되면서 생겨났다. 그러나 정작 정릉은 태종 이방원에 의해 도성 밖 지금의 정릉동으로 옮겨지고, 정동은 정릉의 기억을 새긴 이름만 간직하고 있다. 

1883년 미국공사관이 처음 자리잡은 이후 영국1884, 러시아1885, 프랑스1889, 독일1891, 벨기에1901 등 각국의 공관이 차례로 들어서면서 정동은 서양의 외교가로 변모해갔다. 서양식 교육기관과 종교, 의료 시설 등도 잇달아 들어서자 정동은 자연스럽게 근대 서양 문물이 유입되고 수용되는 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아울러 정동은 근대 시기 제국주의의 세력 다툼 속에 자주 독립국의 위치를 지켜나가기가 매우 어려웠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아관파천(俄館播遷)/ 1896의 현장이자 조선왕조가 자주적 근대국가로 탈바꿈하고자 대한제국을 선포한 뜻깊은 역사의 공간이다.

지금도 근대 역사를 전하는 유산이 많이 남아 있는 정동은 서울 도심 속 ‘근대유산 1번지’로 불린다. ‘근대유산 1번지’ 정동의 또 다른 특색으로 꼽을 만한 것은 유서 깊은 근대유산들이 각자의 내력을 소개하고 전해주는 박물관·전시관 또는 미술관 등으로 단장되어 생활 속에 친근한 문화예술 공간으로 거듭나고 있다는 점이다.

정동에서 만나는 ‘우리나라 최초’와 ‘세계 유일’
19세기 말 정동은 우리나라에 들어온 서양인들의 주요 활동 공간이었다. 미국, 영국, 러시아 등 세계 각국의 외교공관이 정동에 들어서고 서양인들이 모여들면서 자연스럽게 ‘서양인촌’이 형성되었다. 주로 서양인 선교사에 의해 서양식 교육과 의술, 문화 등이 도입되는 ‘다문화 공간’이었던 까닭에 정동에는 ‘우리나라 최초’라는 수식어가 붙는 기록이 적지 않다.

글․사진=강임산 문화유산국민신탁 사무국장

정동에서 만나는 최초들
서양공사관/ 미국공사관 1883, 도성 안 최초
신식 민간 교육기관/ 배재학당 1885
서양인 출생/ 앨리스 R. 아펜젤러 1885
신식 여성 교육기관/ 이화학당 1886
신식 민간 병원/ 시병원(정동병원) 1887
신식 여성 병원/ 보구여관 保救女館, 1887
민간 출판사/ 배재학당 삼문출판사 1888
서양식 결혼식/ 배재학당 학생 박아무개와
이화학당 학생 황몌례 1892
민간 신문사/ 독립신문사 1896
전화 개통/ 경운궁 덕수궁, 1896
근대국가 선포/ 대한제국 1897
서양식 개신교회/ 정동교회 1897
기업/ 동화약품 1897  신약/ 활명수 1897
한국인 여성 의사/ 박에스더 1900
한국인 담임목사/ 최병헌 1903
한국인 여성 학사/ 하란사 1906
한국인 간호사 배출/ 보구여관 保救女館, 1906
파이프오르간/ 정동교회 1918
방송국/ 경성방송국 1927
주둔국의 건축양식을 따른 세계 유일의 미대사관저/하비브하우스 1976

 정동의 문화재
 

 

 

 

 

 

 

 

 

 

 

 

 

 

 

 

 

 

 

 

 

을미사변1895으로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고종이 세자순종와 1년간 피신해 머물렀던 ‘아관파천(俄館播遷)’의 현장이다. 건물은 르네상스식으로 3층의 벽돌 구조이다. 러시아 건축가 사바틴A.I.Scredin Sabatine이 설계하여 1885년 착공하고 1890년 완공하였다. 러일전쟁1904과 을사늑약1905을 거치면서 공사관으로서 기능이 크게 축소되었으나, 1949년까지 공사관으로 쓰였다. 한국전쟁1950 중 건물이 크게 파손되었으며, 이후 몇 차례 보수공사를 거쳐 현재는 망루만 남아 있는 상태이다. 1층에는 아치형 출입구가 있다.
 

 

 

 

 

 

 

 

 

 

 

 

 

 

 

 

 

 

 

1897년 대한제국 선포 후 1901년에 지어진 황실 도서관이다. 서양식 건물로 본래 이름은 ‘수옥헌(漱玉軒)’이다. 중명전은 ‘광명이 계속 이어져 그치지 않는 전각’이라는 뜻으로 1904년 덕수궁의 대화재로 고종의 집무실로 외국사절 알현실로 사용되었다. 1906년 ‘중명전’으로 이름을 바꿨다. 1905년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었던 비운(悲運)의 장소이면서 1907년 헤이그특사 파견의 현장으로 대한제국의 좌절과 국권수호 의지가 담긴 곳이다.1963년 영구 귀국한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에게 기증되어 생활 공간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문화재청이 2006년 매입해 ‘중명전전시관’으로 운영하고 있다.

 

 

 

 

 

 

 

 

 

 

 

 

 

 

 

 

 

 

1885년 4월 아펜젤러(Henry Gerhard Appenzeller)목사가 선교사로 와 한옥 한 채를 구입해 예배를 봄으로서 정동교회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1897년 12월 현재의 자리에 최초의 서양식 개신교회로 건립되었으며, 건축가 심의석이 시공을 맡았다. 정동교회는 일제강점기 항일 활동의 거점으로서, 이곳에서 독립선언문이 비밀리에 등사되었다. 이 때문에 민족대표 33인에 포함된 이필주 담임목사와 박동완 전도사가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한국전쟁 때 큰 피해를 입었으나 1953년 복구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이화학당은 1886년 메리 스크랜튼 부인Mrs. Mary F. Scranton에 의해 설립된 우리나라 최초의 신식 여성교육기관이다.이화학당에 속한 심슨기념관은 미국 컬럼비아 리버 지회의 홀부록Holbrook이 희사한 기금으로 1915년 3월 준공되었다. 지하 1층, 지상 4층의 건물로 6·25전쟁 때 붕괴되었다. 1960년대 초에 복구했는데 남쪽 건물의 외관을 처음 건축할 때의 모습으로 복원하였고 뒷부분은 현대적인 외관으로 처리했다. 외관을 붉은 벽돌로 지은 철근콘크리트구조의 근대 건축물로 학교건축의 초창기 서양 건축양식을 도입했다.당시 세상을 떠난 홀부록의 동생 사라 심슨을 기리는 뜻에서 건물 명칭을 ‘심슨기념관Simpson Memorial Hall’이라 붙였다. 1922년과 1961년에 걸쳐 증축되었고 한때 이화여중 교사로 쓰였다가 현재는 이화박물관으로 운영되고 있다.2002년 2월 28일 등록문화재 제3호로 지정되었으며 학교법인 이화학원에서 소유와 관리를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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