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발 달린 짐승이 되어 - 최종천
네 발 달린 짐승이 되어 - 최종천
  • 박성우 시인
  • 승인 2012.10.19 17: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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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 그러니까 1970년대에
마장동 뚝방 판잣집에서 먹고 자며
당시 서울시 제일의 우범지역이던 신설동 노벨극장 앞에서
구두닦이를 하고 있을 때 우두머리 형의 애인이었던 ‘누님’은
전라도 쑥부쟁이 촌가시네였다.
여름에는 우리들이 일층으로 내려오고
겨울에는 우리들이 이층으로 올라갔다.
한여름 밤 판잣집이 삐거덕거리며 흔들리면
나보다 먼저 들어온 닦이 선배들은 히죽거리며 웃었다.
다음 날 형이 없는 시간에 저녁을 먹으면서
야, 너희들 왜 히죽거리고 그러냐?
느그덜도 앞으로 살아 봐, 투정을 고봉밥으로 퍼주던 누나
나는 한참이 지나면서 그 사연을 알게 되었다.
판잣집이 삐거덕거리는 소리는 형과 누나가
네 발 달린 짐승이 되어 사랑을 하는 소리였던 것이다.
사랑이고 뭐고를 떠나 나는 그들의 그런 몸놀림을 긍정했다.
사랑의 몸짓에선 누구든 네 발 달린 짐승으로 퇴화한다.
사랑을 회복하기 위해선 우리 문명으로부터 도망쳐야 하리라

■작품출처 : 최종천(1954~    ),  『2012 오늘의 좋은 시』

■아는 분들은 익히 아시겠지만 최종천 시인은 몸으로 시를 쓰는 시인입니다. 몇 안 되는 진짜배기 노동자 시인이지요. 언젠가 어느 심사 자리에서 최종천 시인을 잠깐 뵌 적이 있었는데요. 산전수전 다 겪은 시인의 웃음에서 묘한 편안함이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삶에 있어서나 시에 있어서 진정성을 닮고 있는 시인다운 웃음이었다고나 할까요.
지금은 능수능란한 용접공 시인이지만 1970년대엔 신설동 노벨극장 앞에서 구두 닦는 일을 했었군요. “야, 너희들 왜 히죽거리고 그러냐?” 고봉밥을 퍼주는 누나는 잘 살고 있겠지요? 비록 풍요롭진 않지만 저 웃음소리 가시지 않는 마장동 뚝방 판잣집의 저녁이 행복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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