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는 자기를 읽는 행위이다
독서는 자기를 읽는 행위이다
  • 김진웅 선문대학교 언론광고학부 교수
  • 승인 2012.10.26 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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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진웅 선문대학교 언론광고학부 교수

이제는 완연한 가을이다. 붉게 물든 단풍, 따사로운 햇빛, 풍성한 들녘 등등이 가을의 전령사이다.

숨 가쁜 일상 속에서도 가을에는 누구나 이런 넉넉한 세상을 바라보면서 잠시 숨고르기를 하곤 한다. 삶 속에 매몰되었던 자신을 자연 속에서 관조하는 여유로움이다. 즉 세상읽기이다.

가을은 또한 정신을 살찌우는 독서의 계절이라고 한다. 왜 그런지는 몰라도 가을에는 너도 나도 책 읽고픈 마음이 충만해 진다. 그동안 눈길 한번 제대로 주지 못했던 서가의 오래된 책에도 다가서고, 새로운 책을 구입하고픈 충동도 강해진다.

무언가 알 수 없는 보다 근원적인 것에 회귀하려는 마음이 앞선다. 소우주인 나와 대우주와의 소통 욕구이다.

왜 유독 가을에는 근원적인 욕구가 더 강해질까. 가을은 돌아감이다. 그동안 태양을 좇아 하늘 높이 솟아오른 나뭇잎들은 낙엽이 되어 일제히 땅으로, 자연으로 회귀하는 장관을 연출한다. 지구를 불덩이처럼 달구었던 태양도 점점 싸늘해지고, 낮빛은 점점 어둠으로 변한다.

모든 생명체의 근원은 동일하다. 떨어지는 낙엽이나 들꽃의 시듦에서도 나를 발견하면서 숙연한 마음이 든다. 인간도 생명회귀의 대우주를 온몸으로 읽게 되는 것이다. 

책읽기와 세상읽기는 어떤 대상을 읽는다는 의미에서는 같은 것이다. 활자화된 세상을 읽는 것이 전자요, 자연그대로의 세상을 읽는 것이 후자이다. 책읽기가 머리로 느끼는 행위라면, 세상읽기는 온몸으로 느끼는 행위이다.

책은 압축된 세상이고, 자연은 펼쳐진 세상이다. 하지만 세상이든 책이든 공히 읽기 행위라는 점에서는 같다. <독서의 역사>에서 알베르토 망구엘이 언급했듯이 ‘세상은 방대한 책’이다. 그리고 읽는 주체인 나는 세상에 속한 존재이다. 고로 독서는 자신을 읽는 행위이기도 하다. 따라서 독서를 통해서 자연스럽게 자기성찰이 이루어진다.

사실 자연은 언제나 그대로이다. 단지 외피만 약간 바뀔 뿐이다. 이런 변화를 바라보면서 나를 찾는 몸짓이 독서라고 할 수 있다. 이를 통해 대자연에 속한 나, 또 내 속의 대자연을 느끼게 되는 희열을 맛볼 수 있다. 요즈음 온 천지를 물들인 단풍구경 하느라 행락객들로 넘친다.

단순한 눈요기를 넘어서는 세상읽기라면, 떼를 지어 멀리 달려가는 요란스러움보다는 한적한 서울의 성곽이나 고궁에서 관조의 시간을 갖는 것도 좋으리라. 또 밤에는 책세상으로 빠져드는 가을이 되면 더욱 멋지지 않을까. 

독서는 홀로 하는 고독(孤獨)한 행위이다. 이는 현대인이 처한 군중 속의 고독과는 전혀 다르다. 독서는 능동적 행위이고, 대중의 고독은 분열에서 오는 수동적 상태이다. 능동적 고독을 통해서 당신은 고독(高獨)해 질 수 있다.

어느 저자의 내면세계를 몰래 훔쳐보면서 미소짓는 사람은 오색의 단풍보다 더 아름답다. 출퇴근 붐비는 지하철에서 독서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하나 둘 늘어난다. 그(녀)는 스마트폰 대신 자신의 내면과 마주하는 것이다. 오늘은 그 모습에 나 자신도 놓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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