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함께 돌자 서울 한바퀴⑦ 종로1가~3가
다함께 돌자 서울 한바퀴⑦ 종로1가~3가
  • 이인우 기자
  • 승인 2012.11.16 15:3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서울 서민들의 남루와 삶의 진정성이 만나 따스한 불 밝히는 거리

종로1가에서 3가의 늦은 밤거리에서는 동동거리는 시민들과 택시의 술래잡기가 이어진다. 택시 기사들은 아무나 태우지 않는다. 너무 멀리 가는 시민을 태웠다가는 다시 돌아와 영업하기 어렵기 때문에 기피 대상이다.

종로의 밤 풍경은 늘상 술 냄새에 젖는다.  시민들은 인사동과 길 건너 관철동, 3가 쪽으로 내려와 낙원상가 골목과 반대편 서울시네마 뒤편까지 빼곡한 술집에서 쏟아져 나온다.

○종로 거리에 얽힌 간단치 않은 사연

▲ 2010년 10월 14일 종로구 피맛골 일대에서 재개발 중 발견된 조선시대 관영 상설점포인 시전행랑터에서 유적발굴을 하고 있다.
80년대 어느 가수는 ‘종로에는 사과나무를 심어보자’라고 노래했지만 그가 외쳤던 ‘아아아~ 우리의 서울, 우리의 서울’은 그리 간단치 않다.
종로는 수많은 사연이 겹겹이 쌓인 서울의 가려진 모습을 은근슬쩍 드러낸다. 특히 조선 왕조를 떠받쳐온 육조거리가 있던 세종로에서 동쪽으로 이어진 종로1가~종로3가가 그렇다.
나이 지긋한 시민들은 ‘종3’이란 말을 들으면 순식간에 타임머신을 타고 60년대로 돌아간다. 40~50년 전의 서울과 지금의 서울. 피맛골이 온전했던 10~20년 전의 서울과 지금의 서울. 같은 장소가 전혀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종로의 골목골목은 그렇게 담벼락 낙서처럼 빼곡한 시간의 사연을 담고 있다.

○육조거리 뒤편 ‘피맛골’ 사라진 자리

▲ 2009년 5월 12일 오후 서울 종로구 피맛골 일대 건물해체작업이 한창인 가운데 시민들이 지나가고 있다.
종로1가는 대한민국 권력의 심장부인 세종로에서 시작된다.
세종로는 옛날 광화문 앞 육조거리였다. 경복궁을 중심으로 이조, 병조, 호조, 예조, 형조, 공조 등 6개 중앙기관이 늘어서 있었다. 1990년대 해체한 중앙청(옛 조선총독부)이 그 뒤를 이었다. 지금 육조거리에 남아있는 정부 부처는 세종문화회관 옆의 외교통상부(예조)와 미국 대사관 옆 과학기술부(공조)가 전부다. 나머지는 과천 정부청사로, 일부는 다시 세종시로 이전했다.
조선시대 세종로는 종로 1가에서 왼쪽, 3가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여기서 종로3가까지 나간 뒤 다시 남쪽으로 길을 내 숭례문으로 향했다. 지금 세종로와 연결된 태평로-남대문-서울역 길은 일제 강점기에 전차길을 내며 새로 닦았다.
남대문에서 경복궁까지 이르는 길은 조선시대 우리나라에서 가장 넓은 길이었다. 특히 지금의 종로는 벼슬아치들의 왕래가 잦았다. 이들이 지난 때면 상민들은 일제히 바닥에 엎드려 고개를 함부로 들지 못했다. 이같은 번거로움을 피하기 위해 종로에는 샛길이 발달했고 대표적인 예가 ‘피맛길’이다. 관헌이나 양반이 탄 말을 피한다는 피마(避馬)에서 유래한 ‘피맛길’은 따라서 서울이 조선의 왕도(王都)였다는 사실은 가장 잘 보여준다. 지배세력의 관점에서가 아닌 백성의 입장에서 본 왕도를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서울시는 도시개발을 앞세워 피맛길을 하나하나 철거하고 고층 복합빌딩을 세우는데 급급했다.

○개발 바람에 밀린 뭉근한 해장국 맛

▲ 2008년 8월 서민들의 애환이 서린 피맛골과 술꾼들의 단골 속풀이장소인 청진동 해장국골목 일대가 거대한 24층 빌딩 숲으로 변한다.
종로1가 교보빌딩 뒤에 세워진 20층 높이의 주상복합 ‘르메이에르 종로타운’은 피맛골을 점령한 재개발의 아이콘이다. 2009년 입주를 시작한 ‘르메이에르 종로타운’이 들어서기 전까지 이곳 ‘피맛골’에 얽힌 서울시민들의 사연도 둥지를 잃게 됐다.
재개발이 시작되기 전인 2007년까지 종로1가 피맛골은 넉넉하지 않은 시민들이 ‘열차집’ ‘청일집’ ‘남도식당’ ‘대림’ ‘서린낙지’ 등에서 소주와 막걸리 한 잔으로 고단한 하루를 씻어내던 곳이었다. 또 70~80년대는 경찰에 쫒기는 운동권 학생들의 은신처였고 더 거슬러 올라가 일제강점기 독립투사들이 미로 같은 골목길에 몸을 숨기기도 했다. 
피맛골에서 한 걸음 비켜선 청진동에 있던 ‘청진옥’은 국내 해장국의 대명사로 시민들의 숙취를 달래 왔다. 하지만 청진동까지 밀어닥친 재개발 바람에 청진옥마저 ‘르메이에르 종로타운’으로 자리를 옮겨 옛 토렴방식을 버리고 펄펄 끓는 따로국밥식 해장국을 내고 있다. 청진옥 해장국의 은근한 맛이 사라진 것처럼 옛 피맛골의 정취도 이제 찾을 길 없다.
종로2가 YMCA회관 뒤의 일명 서피맛골도 종로1가 피맛골 재개발 이후 몰락하고 있다.
과거 대학생들이 몰리던 서피맛골은 최근 주요 음식점, 술집이 잇따라 빠져나가면서 급속히 슬럼화하고 있다. 더욱이 지난 6월 서울시가 인근 인사동 일대를 ‘소단위 맞춤형 재개발 지역’으로 지정하면서 ‘서피맛골’을 제외, 지역 상인들이 반발하는 등 몸살을 앓았다.
서피맛골은 한 때 40여 개의 주점이 빼곡이 들어서서 호황을 누렸으나 2002년 큰 화재가 난 뒤부터 찾는 시민들이 줄기 시작했다. 현재 서피맛골에는 4~5개의 주점만 남아 영업을 계속하고 있으나 개발도, 지속도 아닌 도시정책 때문에 앞날을 내다볼 수 없다. 과거 주점으로 가득했던 골목은 대부분 철시한 상태로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보이고 있다.

○애달픈 종삼의 기억과 돈의동 쪽방촌

‘종삼’은 조선시대부터 1968년까지 ‘몸 파는 여성’들의 지분 냄새가 자욱했던 거리였다.
서울시사편찬위원회에 따르면 돈의동 103번지를 중심으로 옛 피카디리극장(롯데시네마)까지는 조선시대 색주가거리, 일제 강점기 항일 성향이 강한 기녀들이 모인 홍등가로 이어졌다.
광복 후 곧바로 닥친 6·25를 거치며 난민들의 집단 거주지가 된 뒤 60년대 국내 대표적인 사창가 ‘종삼’이 만들어진다. 한 때 ‘종삼’에는 2000여 명 이상의 성매매 여성이 살았다.
‘종삼’은 60년대 국내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무대였다. 소설에서 ‘종삼’은 가난한 지식인의 남루와 도피적 일탈의 장소로 그려지곤 했다. 또 당시 5·16 군사쿠테타로 좌절한 4·19 혁명 세대들이 퇴폐적 허무를 발산하던 곳이기도 했다. 특히 군 입대를 앞둔 친구를 끌고 가 인근에서 술을 먹이고 떠밀어 넣던 ‘통과의례’의 장소로 활용됐던 곳이다.
이런 ‘종삼’이 사라진 때는 1968년이다.
“지난 23년 동안 그늘진 윤락지대로 버려진채 큰 사회 문제가 되어왔던 종로3가 일대 사창가가 없어지게 됐다. 26일 서울시는 ‘종로3가 홍등가 정화추진본부’를 설치, 10월 5일까지 이 지역의 윤락여성을 딴 곳으로 옮기고 포주에 대한 채무도 모두 무효화하도록 하는 한편 앞으로 이 지역의 사창가에 출입하는 자는 명단을 공표키로 했다.”<동아일보 1968년 9월 27일자>
당시 기사의 사진에는 ‘재래식 한국 기와집이 꽉 들어찬 종로3가 일대… 이제 「윤락지대」라는 오명을 벗게 된다.’는 설명이 붙었다. 
사창가 ‘종삼’은 사라졌지만 ‘재래식한국기와집이 꽉 들어찬 종로3가 일대’의 일부분은 아직 남아있다.
낙원상가 뒤편 돈의동 골목에 남은 한국기와집은 이제 서울의 대표적인 쪽방촌이 됐다. 서울시는 해마다 혹서기와 혹한기를 앞두고 이곳 쪽방촌에 대한 지원방안을 내놓고 있다. 돈의동 쪽방촌 골목은 서울 도심한복판의 이색 지대다. 두 명이 엇갈려 지나기 힘들만큼 좁은 길이 거미줄처럼 이어진다. 골목 끝에는 한 그릇에 2000원씩인 식사를 ‘나누는’ 식당도 여럿 있다.
일부 주민들은 재개발을 원하지만 이곳 아니면 갈 곳 없는 세입자들에겐 버릴 수 없는 안식처다. 개발보다 서울의 역사를 오롯이 간직한 향토사의 유물로 보존하는 편이 바람직하다.

○원각사지10층석탑에 깃든 어르신들

▲ 2012. 10 노인의 날을 맞은 2일 오전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에서 노인들이 모여 있다.
낙원상가 앞쪽의 탑골공원은 삼일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이 모여 처음 만세를 외쳤던 곳이다. 탑골은 이곳에 보존된 원각사지 10층석탑(국보 제2호)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고려시대 지은  흥복사(興福寺)가 있던 자리로 조선 태조 당시 조계종 본사(曹溪宗本寺)로 지정됐지만 1464년(세조 10) 중건하면서 원각사로 개칭했다.
석탑도 이때 세운 것으로 맨 위 3층은 오랫동안 무너져 내려져 있던 것을 1947년에 원상태로 복구했다. 표면 훼손이 심각해 2000년 유리 보호각을 씌웠다.
탑골공원은 일본의 독도 망언이나 교과서 망언 등이 나올 때마다 이를 규탄하는 시위장소로 꼽힌다. 평상시 이곳은 종묘공원까지 가지 않는 어르신들의 휴식처가 된다. 종묘공원의 번잡한 분위기를 싫어하는 어르신들이 모여 담소를 나누다 낙원상가 앞 식당에서 2000~3000원짜리 점심 추렴을 한다.
▲ 악기 상점으로 유명한 낙원상가.
탑골공원의 한쪽 담장 아래는 사주명리를 배운 역술인들이 자리를 차지한다. 파라솔에 비닐을 두른 간이 상담소를 차리고 사주풀이나 관상, 손금, 이름풀이 등을 해준다. 그들의 풀이가 맞건 안 맞건 답답한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는 시민들이 간간히 복채를 내고 진지하게 자신의 운명을 묻는다.
이들 탑골공원 운명철학자들의 한쪽에는 일본과 중국인 관광객들을 태우고 온 대형 관광버스가 진을 친다. 관광객들은 길 건너 인사동으로 걸어가 둘러본 뒤 다시 버스에 오른다.

○조선 초기부터 화원 몰려 살던 인사동

▲ 서울 종로구 인사동 거리가 시민들로 북적이고 있다.
종로2가 인사동은 조선 초부터 미술활동의 중심지였다.
안국동 북쪽의 북촌에 경복궁이나 창덕궁으로 출퇴근하던 벼슬아치들이 살았던 반면, 지금의 인사동 자리에는 중인계급이 몰려 살았다. 이들 중 화원도 적지 않아 오래 전부터 미술촌으로 자리 잡은 것이다.
그 때문인지 1930년대 들어 이 일대에 서적 및 고미술 관련 상가가 들어서기 시작했다. 서울의 대표적인 골동품 거리로 자리 잡게 된 셈이다.
1950년 한국전쟁 이후 또 다른 골동시장으로 들어선 동대문구 황학동 시장이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을 거치면서 장안평으로 강제 소개됐으나 인사동은 오히려 전통문화의 중심거리로 육성됐다. 당시 인사동은 70년대 현대식 화랑이 속속 문을 여는 등 ‘문화의 거리’로서의 면모를 갖춰왔다.
현재 인사동은 상설 미술품 전시판매를 맡고 있는 화랑과 고가구점, 민예품 판매점 등 미술관련 시설과 음식점 거리로 나뉜다.
인사동에는 38개의 미술관과 화랑이 활발한 전시회를 열고 있다. 이 가운데 경인미술관(관훈동 30-1)은 1800년대 지은 한옥으로 구한말 세도가였던 박영효의 사가로 유명하다. 지금 제3전시실로 쓰고 있는 한옥은 박영효가 사랑채로 썼던 것으로 나머지 본채는 갑신정변 당시 불타 사라졌다.
증개축을 통해 복원한 안채는 다원으로 꾸며 시민들과 관광객의 휴식처로 자리잡고 있다.
인사동길은 평일에도 밀려드는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주말이면 시민들까지 나와 가득 찬다. 서울시는 2003년부터 토요일 오후 2시부터 10시까지도 차량 통행을 막다가 지금은 평일에도 통제하고 있다.

○한 때 젊음의 거리 ‘관철동 흥망사’

▲ 2009년 6월 서울시가 '걷기편한 종로거리 만들기' 첫 시범사업으로 종로구 관철동 '젊음의 거리'를 개장 했다.
종각역 4번 출구로 나와 청계천 쪽으로 가면 종로2가 관철동이 시작된다. 80년대 대학생들이 몰렸던 젊음의 거리였다.
지금도 이 일대는 대형학원들이 자리잡고 있다. 새벽부터 어학공부에 나선 직장인과 대학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하지만 과거 흥청망청했던 저녁 풍경은 거의 사라졌다. 서울시는 종각에서 종로3가까지 이르는 대로변의 노점을 관철동 한 곳에 몰아넣고 ‘종각 젊음의 거리’라고 이름 붙였다. 그러나 상인들은 대로변에 있을 때보다 못하다고 입을 모은다.
실제로 종로 노점은 ‘김떡순(김밥·떡볶이·순대)’의 원조로 이름 높았던 시절이 있었다. 종로 시내버스 승강장을 중심으로 몰렸던 노점은 한 때 종로의 상징이었다. 저녁마다 이들 노점은 자욱한 연기를 피워 올리며 닭꼬치 등을 구워댔지만 불평하는 시민은 없었다.
80년대 약속장소로 유명했던 보신각 옆의 3층짜리 커피숍 ‘상·중·하’도 오래 전 사라졌다. 로컬 커피숍과 주점, 식당들이 없어진 자리는 이제 대형 프랜차이즈 업소들이 채우고 있다. 관철동과 잇닿은 청계천 옆에도 강남에 본점을 둔 대형 레스토랑이 들어서고 있다. 그럼에도 이들 대형 레스토랑 분점은 강남보다 낮은 가격대를 유지하고 있다. 강북 지역의 특성에 맞춘 혜택인 셈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