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주류사회가 백성들과 소통하는 도구로 적극적인 한글 사용에 나섰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이같은 연구는 조선에서 한글을 언문이라고 천시했다는 통념을 정면으로 반박한 것이다.
김봉좌 한국학중앙연구원 전임연구원은 ‘조선시대 관청문서의 대민(對民) 유포와 한글 사용’이란 제목의 연구논문에서 조선시대에 “폭넓은 계층의 백성에게 왕 및 관청의 뜻을 전달하고자 할 때에는 중앙관청에서부터 지방관청에 이르기까지 한글 번역을 적극적으로 이용함으로써 소통을 시도했다”고 분석했다.
이번 논문은 14일 ‘조선 후기 사회의 소통과 한글’이란 주제로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인문한국사업단이 주최한 제17회 HK워크숍에서 발표됐다.
김 연구원에 따르면 왕의 명을 양반 관료뿐만 아니라 한자를 모르는 일반 백성에게까지 미치게 하려면 왕명(王命)이 담긴 문서를 한글로 작성하는 것이 불가피했다는 것이다.
김 연구원은 그 대표적인 사례로 ‘윤음(綸音)’을 꼽았다. 윤음은 범국가적인 시행을 요하는 사안을 관료와 백성에게 알리고자 할 때 책자 형태로 제작해 배포한 문서다. 사안에 따라 주요 내용을 한글로 번역해 한문과 함께 실었다.
왕명을 한글로 번역해 반포하게 한 최초의 기록은 성종실록에 나온다. 성종 3년(1472) 의정부에서 근검절약에 힘쓰라는 왕의 전교를 받들어 전지(傳旨)를 인쇄해 반포할 것을 건의하자 성종이 이를 한글로 번역해 부녀자와 어린 아이들도 모두 알게 하라고 명했다는 기록이 있다.
선조는 임진왜란 당시 백성 가운데 왜군에게 투항하는 이에게 아군으로 돌아오면 용서할 뿐 아니라 면천(천민 신분에서 벗어남)하거나 벼슬까지 내리겠다고 회유하는 한글 문서를 발표했다.
영조와 정조 때 이르면 한글로 표기된 왕명 문서가 가장 활발하게 작성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