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레비전은 시청자를 끝없이 자극한다
텔레비전은 시청자를 끝없이 자극한다
  • 김진웅 선문대학교 언론광고학부 교수
  • 승인 2012.11.25 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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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진웅 선문대 언론광고학부 교수

텔레비전은 늘 자극적인 것을 찾는다. 어떤 자극인가는 중요치 않다.

오직 강한 자극을 선호한다. 시청자는 텔레비전이 전하는 자극이 강할수록 더욱 주목하고, TV 수익도 이에 비례하여 증가한다. 따라서 TV는 시청자를 이중적으로 대한다. 먼저 TV는 시청자를 정보수용자로 대한다. 시청자는 일상생활을 영위하기 위해 다양한 정보를 필요로 한다.

텔레비전은 이를 전문적으로 제공하여 욕구를 해소시켜 준다. 다른 한편 텔레비전은 시민을 소비자로 대한다. 소비자는 물질적 욕구충족의 구체적 대상으로 상품을 필요로 한다. 텔레비전은 광고를 통해서 기업과 소비자를 매개한다. 정보중개인이자, 상품중개인인 셈이다.

이 중에서 텔레비전은 어느 역할에 더 충실할까? TV의 행위를 결정하는 요인은 무엇일까? 무엇보다 자신의 이해관계가 반영된다. 즉 자신의 생존기반 형성이 우선시 되는데, 이는 결국 누가 자신에게 ‘빵’을 주는가의 문제이다.

독일 어느 사상가의 말처럼 텔레비전은 ‘빵’을 제공하는 자를 위해서 노래한다. ‘빵’을 제공하는 자는 국가(권력), 시민(국민), 기업(광고주) 등 다양하다. TV 조직형태(국영·공영·민영)도 이에 따라 규정된다. 오늘날 대다수 텔레비전은 광고에 의존하는 상업미디어이다. 고로 광고주 기업의 이해를 충실하게 대변할 수밖에 없다. 이는 TV의 자유의지를 넘어서는 문제이다. 선택이 아니라 필연적 결과이다.

정보 중개인이자 생산자로서 텔레비전은 사회 전반에 영향력을 행사한다. 고로 어느 누구도 텔레비전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서로를 이어주고, 홍보해주고, 감시하고 정보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보통 TV는 필요악의 존재로 인식된다. 따라서 ‘불가근 불가원(不可近 不可遠)’ 원칙이 뒤따른다. 그럼에도 사람들의 주목을 필요로 하는 집단에게 텔레비전은 필수적 존재이다. 텔레비전을 통해서 국민, 소비자에게 구애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즉 자신을 지지하거나(투표행위, 여론형성 등), 상품을 구매토록 한다.

이러한 역학관계로 텔레비전은 이중적 파트너십을 형성한다. 앞으로는 시청자와, 뒤로는 정보 의뢰인과 마주한다. 시청자에게는 늘 웃는 모습으로 친절하게 대한다.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아니 24시간 우리에게 서비스하면서도 오히려 그쪽에서 늘 고마움을 표한다. 텔레비전은 참 좋은 친구다. 아무 조건 없이 지속적으로 시청자를 사랑하니까!

다른 한편 텔레비전과 정보의뢰인의 관계는 비공식적이다. 마치 타인의 눈을 피해 둘만의 시간을 갖고 싶어 하는 신혼부부처럼. 그렇지만 이들 사이가 늘 좋은 것만은 아니다. 때로는 싸우고 파경에 이르기도 한다. 정치적 의뢰인은 권력이 힘이고, 경제적 의뢰인은 돈이 힘이다. 이에 상응하는 텔레비전의 힘은 시청자의 눈길이다.

최대 다수의 눈길, 이것을 붙잡아야 TV는 산다. 따라서 죽기 아니면 살기로 피곤하고 지친 시청자의 의식, 감각을 깨우려 온갖 자극을 가한다. 울리고 웃기고 벗기고 죽이고…. 이를 도모하려 TV는 늘 궁리한다. 이른바 대박을 터트리기 위해 계획하고 연출한다. 시청자가 잠들거나 흩어지면, TV는 비상이 걸린다. 그러니 시청자를 끝없이 자극해야 한다.

일찍이 이를 간파한 사람은 미국의 언론비평가 닐 포스트맨(Neil Postman)이다. (우리 모두는 TV를 즐긴다. 죽음에 이를 때까지!) 텔레비전의 에로스(Eros)가 우리에겐 ❈타나토스인 셈이다. 무서운 일이다.       

❈편집자 주 타나토스=그리스 신화에서 ‘죽음’을 비유한 신적 존재. 프로이드는 자기 보존적 본능과 성적 본능을 합한 삶의 본능을 에로스(Eros)라 했고, 공격적인 본능의 집합체인 죽음의 본능을 타나토스(Thanatos)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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