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함께 돌자 서울 한바퀴⑧ 종로4~6가
다함께 돌자 서울 한바퀴⑧ 종로4~6가
  • 이인우 기자
  • 승인 2012.11.23 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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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골목 들어서면 여기가 1970년대 서울, 옛 정취 살아있는 역사의 거리

종로3가와 4가가 겹치는 종묘부터 종로6가 흥인지문까지는 가장 옛 서울다운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빠르게 변화하는 개발과 발전도 종로 뒷골목에 이르면 갑자기 속도를 줄인다. 종로 큰 길의 폭을 함부로 넓히지 못하듯, 뒷골목에 찐득하게 배어 있는 세월의 흔적도 쉽게 지우지 못한다.
특히 종묘와 서울 중심을 동서로 가르며 남북 축으로 이어진 세운상가는 2012년까지 남아있는 1970년대의 유물이다. 세운상가뿐만 아니라, 종로 전체가 서울시에서 영구보존해야 할 살아 있는 유물인지 모른다.

○조선 600년 숨 쉬는 장엄한 목조건물

▲ 종묘 영년전에서 종묘대제를 재현하고 있다. 종묘대제는 2001년 종묘제례악과 함께 유네스코 '인류구전 및 무형유산걸작'으로 선정되어 세계무형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종묘공원광장에 어르신들이 모이는 이유는 서울뿐만 아니라 인근 도시와의 접근성이 좋기 때문이다. 또 바로 이곳이 조선왕조 600년의 역사를 그대로 간직한 종묘라는 상징성도 있다.


▲ 문화재청은 한국문화재보호재단과 문화체육관광부 후원으로 지난 10월6일과 20일 오후 2시, 두 차례에 걸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종묘 정전에서 조선시대 세자빈이 혼례 후 처음 종묘를 참배하는 의례인 종묘 묘현례(廟見禮)를 재현했다. 사진은 정전 앞 세자빈 대례복(적의) 착용 모습. [사진=문화재청 제공]
종묘는 태조 이성계가 자신의 4대조 신위를 모시면서 자리 잡았다. 이후 세종대에 7칸의 제실이 다 채워지자 옆에 영녕전을 세우고 태조의 4대조를 따로 모셨다. 하지만 후대 왕들의 제실이 늘어나면서 현재 정전은 19칸에  19명의 왕과 30명의 왕후 신위를 모셨고 영녕전도 늘어 15명의 왕과 17명의 왕후를 모셨다. 영녕전은 주로 단명했거나 단종과 같이 왕위를 찬탈 당한 뒤 후에 복원된 왕을 모시고 있다.
이처럼 제실을 늘리다보니 종묘 정전은 동아시아에서 가장 긴 목조건물이 됐다. 실제로 종묘 뜰에 서서 제실을 보면 장엄한 용마루에 위압감을 느끼게 된다. 19칸의 단층 건축물이 주는 압도적인 엄숙미는 정전의 뒷벽에 가장 잘 드러난다. 뒷벽은 한 칸의 구획도 하지 않고 일체형으로 만들어 보는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기운을 내뿜는다. 600년을 이어온 한 왕조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제실의 풍모를 그대로 담아낸다.
이같은 가치가 알려지면서 종묘는 199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뿐만 아니라 종묘제례(중요무형문화재 제56호)에사 춤과 함께 연주되는 음악인 종묘제례악(중요 무형문화재 제1호)은 2001년 유네스코 인류구전 및 무형유산걸작으로 등록됐다. 종묘제례는 매년 5월 첫째 주 일요일에 어가행렬과 함께 전주 이씨 종친의 제사로 거행된다.


▲ 종묘제례 재현. 어가행렬이 종묘제례 봉행을 위해 경복궁에서 종묘로 향하고 있다.
종묘가 있는 자리는 행정구역상 종로3~4가가 연결되는 종로구 훈정동이다. 훈정동의 옛 이름은 ‘더운 우물골’이다. 이곳에 있는 우물은 여름에 얼음처럼 차고 겨울에는 김이 오를 정도로 따뜻했다고 한다. 종묘대제 에 반드시 이 물을 길어 사용했고 임금의 어수로도 사용했다고 한다. 우물 자리는 지금 어르신들이 모이는 종묘공원광장이다.

○동편제 서편제 나뉜 어르신 아크로폴리스

▲ 종묘공원은 광장에 놓여진 바둑판에서 바둑을 두고 있는 어르신들. [사진=뉴시스]
종묘광장공원은 매일 서울 어르신들과 멀리 인천, 아산, 의정부시에서 무임 전철을 타고 올라온 지방 어르신들이 뒤섞인다.
한 자리에 모여 화합의 마당을 가지면 좋으련만 어르신들은 각기 다른 성향을 가진 3개의 집단으로 나뉜다. 공원 동쪽은 극우적 논리를 가진 보수파 어르신들이다. 세력이 가장 강하다. 서쪽은 이른바 반골 야당 세력들이다. 그리고 중앙에는 이 편도 저 편도 아닌 중도파가 자리 잡는다.
이들 종묘 어르신들은 쌀쌀한 날씨에도 자리를 잡고 박학다식하고 언변이 뛰어난 ‘연사’의 말에 일희일로(一喜一怒)한다. 보수파 어른신 쪽에서 야당이나 진보세력을 좌익분자로 규정하고 호통을 치면 반대쪽에선 이명박 정권과 새누리당 비판에 목소리 높인다.


대선을 코앞에 둔 11월 종묘는 완연한 ‘동편제’와 ‘서편제’로 갈려 예각의 대립을 보인다. 하지만 어르신들의 집회는 해가 지기 전 일찌감치 폐장한다. 저마다 무사히 또 하루를 보낸 것에 안도하며 집으로 돌아가는 발길을 서두른다.
날씨가 아주 추울 때면 종로3가역이 어르신들의 대피소가 된다. 또 이 역을 지나는 지하철 1호선은 출근시간 후부터 퇴근시간 전까지 오고 가는 어르신들로 가득찬다. 종묘는 대한민국 어르신들의 가장 큰 놀이터다.

○종로에서 퇴계로까지 김수근 유작 세운상가

▲ 세운상가는 고 김수근 씨가 설계, 1968년 완공한 국내 최초의 주상복합 건물이다. 종로 3가에서 퇴계로 3가까지 일직선으로 이어져 70~80년대 초까지 최대의 전자상가(사진 왼쪽)였으나 이후 급속히 쇠락해 2015년까지 서울의 녹지 축으로 재개발할 예정이다.
서울 곳곳에는 시간이 멈춘 골목이 남아있다. 종묘 맞은편 종로3가에서 남쪽 퇴계로3가까지 일직선으로 세워진 세운상가도 1970년대 모습 그대로 남아있다.
서울시가 2006년 재정 비촉진구역으로 지정한 뒤 2010년 재개발 사업성을 평가하기 위해 연구용역을 발주했으나 재개발사업 1단계만 끝내고 진척되지 않고 있다. 문화재청이 종묘의 경관을 해친다며 새로 지을 건물의 최고 높이를 69m(기존 122m)로 낮추면서 사업성이 크게 낮아졌기 때문이다. 서울시는 당초 재개발 2단계 사업으로 폭 90m, 길이 290m의 녹지대를 만들 방침이었다. 2015년까지 세운상가를 포함한 8개 상가를 철거하고, 폭 90m, 길이 1㎞인 녹지축을 만들겠다던 ‘세운초록띠공원 조성사업’을 위해서였다.
서울시는 인근 건물의 용적률을 높여 녹지축 조성비용(1조4,000억원)을 지주가 부담토록 할 계획이었으나 문화재청의 건물높이 제한에 부딪힌 상태다. 하지만 서울시와 SH공사는 이미 주민 보상금 등으로 총 2150억 원을 집행, 진퇴양난에 빠져들고 있다.
이런 와중에 종로 세운전자상가에서 세운청계상가, 대림상가, 을지로 삼풍상가, 퇴계로 진양상가까지 퇴락의 길을 걷고 있다. 세운상가는 1966년 윤락업소가 즐비하던 종로와 퇴계로 일대의 정비 사업을 진행하면서 건축가 김수근이 종로3가와 퇴계로3가를 공중 보도로 연결하는 주상복합건물을 완공했다. 8~17층짜리 건물 8개가 모인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주상복합 건물이었다.
김수근의 대표작인 이 상가는 건축사적으로도 큰 가치를 갖는다. 서울의 중심에서 남북 축을 잇는 단일 건축물로서 70년대 산업화의 상징이라는 가치도 빼놓을 수 없다. 하지만 재개발 바람이 불면서 세운상가 양쪽 골목에 들어찼던 시계와 귀금속, 조명, 전자전기 관련 점포가 빠져나가 퇴락한 풍경으로 남았다. 한 때 유명 연예인과 고위공직자들이 입주했던 상가 아파트도 전형적인 서민아파트로 남아있다.

○박가분 바르면 박색도 천하일색

▲ 박가분.
종로4가는 일제강점기 조선 여성들의 필수 화장품인 ‘박가분’이 탄생한 곳이다.
두산그룹 창업자인 박승직 전 회장(1864~1950)이 지금의 종로4가인 배오개 자택에서 박가분을 만들어 팔기 시작했다. 이전부터 보부상으로 전국을 떠돌며 부를 쌓은 박 전 회장은 1896년 배오개시장에 포목상 ‘박승직상점’(종로4가 15번지)을 개설했고 구한말 관직에 진출, 정삼품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까지 올랐다. 이후 1906년 한국 최초의 경영인 단체인 한성상업회의소 상임의원에 뽑혀 국채보상운동에 참가하기도 했다.
종로4가는 두산그룹의 뿌리이기도 하면서 옛 육의전이 있던 서울 상업의 중심지였다. 그 흔적은 서울의 대표적인 재래시장인 정로5가 광장시장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광장시장은 육의전에서 피륙을 주로 거래했듯이 지금도 한복 옷감인 주단 등 원단 도매시장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광장시장은 1905년 박승직과 장두현·최인성·김한규 등이 당초 ‘배우개장’이라 부르던 시장에 광장주식회사(廣壯株式會社)를 설립해 90여 개의 점포를 두었다.
이후 6·25 전쟁을 거치면서 월남 피난민들이 생활 수품과 군용물자, 외래품이 거래하면서 지금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 광장시장은 서울 도심의 대표적인 재래시장이자 세계 각국의 관광객이 들르는 길거리 음식의 명소로 자리잡고 있다. '마약김밥'.(오른쪽)
2000년대 후반 광장시장은 상인들이 주로 찾던 노점과 작은 식당이 알려지면서 예상치 못했던 유명세를 얻게 됐다. 이 시장은 이제 서울시민뿐만 아니라 외국에도 널리 알려지면서 해외 관광객 1000만 명 유치의 선봉에 섰다.
광장시장 중앙통로를 중심으로 한 먹을거리 장터는 저녁시간이면 발 디딜 틈 없이 가득찬다. 한겨울에도 간이 걸상에 깔아둔 전기장판의 온기에 추운 줄 모르는 외국인들과 시민들이 어깨를 부비며 노점 음식을 즐긴다. 그중 ‘마약김밥’으로 알려진 꼬마김밥과 한 접시 1만 원대의 육회, 4000원짜리 녹두전은 전국적인 명성을 얻고 있다.

○약국거리 건너편은 앵두나무 묘목상

▲ 종로 5가는 1957년 보령약국이 들어선 뒤부터 약국거리가 만들어졌다. 하지만 이미 조선시대부터 한약상들이 몰려있던 약업거리로 유명했다고 한다.(사진 왼쪽) 종로 5가 광장시장에서 6가까지 대로변 인도에 몰렸던 묘목, 화훼시장이 2010년 동대문종합시장 기업은행 맞은편 양사길로 이전해 규모가 줄었으나 매년 봄이 오면 많은 시민들이 찾는 명소로 남아있다.
광장시장을 끼고 있는 종로5가 대로변은 ‘종로약국’을 유명하게 만든 약국거리다. 이 일대는 약 20여 개의 대형 약국이 밀집, 시중보다 싼 가격에 처방약이나 일반 약품을 판매한다. 워낙 많은 물량이 거래되는 까닭에 도매가 판매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종로 약국거리의 효시는 보령제약 김승호 회장이 1957년 문을 연 보령약국으로 알려졌다.
보령약국은 지금까지 당시 자리를 지키고 있는데다 인근에 보령제약 빌딩까지 들어서 있다. 1950년대 당시 종로5가에는 의정부와 포천, 철원 등으로 향하는 시외버스 터미널이 있었고 그만큼 유동인구가 많았다. 보령약국이 문을 연 뒤 후발 약국이 하나 둘 모이기 시작했고 1970년대부터 전국 도소매상이 모여드는 ‘약국거리’로 자리 잡았다. 전국 제약회사들은 종로5가 약국거리에 베테랑 영업사원을 배치한다. 제약회사 영업사원들은 약국 몇 곳만 거래해도 월 매출목표의 상당액을 채울 수 있다고 귀띔한다.
종로5가에서 6가에 이르는 대로변 인도는 또 사계절패랭이, 앵초, 호주풍란, 매말톱꽃 등 화훼와 매화, 목련, 앵두, 모과, 감나무 등 묘목을 파는 노점상의 중심지였다.
특히 매년 3월부터 4월까지는 묘목을 흥정하는 시민들이 큰 길에 차를 세워 교통 혼잡이 되풀이되기도 했다. 종로구는 2010년 이들 화훼·묘목상인들을 동대문종합시장 맞은편에서 충신시장까지 이어지는 양사길로 집단 이주시켰다. 양사길 화훼·묘목거리는 과거에 비해 규모가 크게 줄었다.

○콜맨 휘발유 버너 싸게 사려면 종로6가

▲ 종로6가 신진시장 일대는 아웃도어 용품을 백화점은 물론, 시중 대리점보다 싼 가격에 구입할 수 있다. 10~20% 가격흥정이 가능하다.(사진 왼쪽) 아웃도어 용품 매장 바깥에 진열하고 있는 저가 상품들.
종로5가에서 6가에 이르는 청계천 쪽 이면도로는 아웃도어 용품점과 허름한 식당들이 줄을 잇고 있다.
종로의 아웃도어 용품점 거리는 국내 유명 브랜드 대리점부터 여러 브랜드를 판매하는 매장까지 다양하다. 또 이곳에서는 시중보다 훨씬 싸게 등산의류나 등산화, 스틱, 배낭, 등을 구입할 수 있어 등산 애호가들이 발품을 팔고 있다. 지금도 10~20% 정도의 흥정을 벌여 가격을 깎을 수 있다.
특히 시중에서 구할 수 없는 재고 상품도 가격대비 품질이 뛰어나 수명이 오래 가지 않는 계절 용품 수요가 많다. 미국산 ‘콜맨’ 휘발유 버너와 등산용 스틱의 대명사인 독일산 ‘레키’ 등 명품도 시중가보다 싸게 구할 수 있다.
간혹 히말라야 등 고산 원정대의 필수품인 기능성 동계 내복도 파격적인 가격으로 ‘득템’하는 행운을 얻는 경우도 있다. 시장 분위기가 그대로 살아있는 종로 뒷골목에서만 찾을 수 있는 행운이다. 하지만 옥석을 제대로 못 가리는 등산 초보자들은 엉뚱한 물건을 산 뒤 후회할 수도 있다. 가급적 아웃도어 용품을 많이 사용해본 지인과 함께 쇼핑하는 편이 바람직하다.
종로5~6가 뒷골목 식당가는 크게 닭 한 마리집과 생선구이집으로 나뉜다. 모두 2~3만 원이면 술과 밥으로 든든하게 허기를 달랠 수 있는 서민 식당이다. 특히 닭 한 마리 골목은 몇 해 전 큰 화재가 있었지만 오히려 낡은 건물을 리모델링하는 계기가 됐다. 그렇다고 떠들썩하고 정신없는 옛 분위기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음식과 반찬을 던지다시피 테이블에 올려놓고 본체만체 하는 서비스 부재도 여전하다. 하지만 이 골목은 일본인들에게 입소문으로 알려지면서 70% 이상의 테이블이 외국인으로 채워지고 있다.

○주말 새벽 서울 등산객 집합장소

▲ 동대문종합시장은 동대문구가 아닌 종로구 종로 6가에 있다. 서울의 대표적인 관광지에다 국내 봉제산업 경기의 바로미터로 자리잡은 시장이다.
광장시장에서 종로6가 동대문 인근까지를 흔히 동대문시장이라고 부른다. 동대문시장은 자유당 말기 이정재가 여당 폭력조직의 근거지로 삼으면서 악명을 떨치기도 했다. 지금의 모습을 갖운 것은 1970년 동대문 맞은편에 동대문종합시장을 건립하면서부터다. 이후 인근 청계천 쪽에 평화시장이 만들어졌고 1990년부터는 거평프레야, 밀리오레, 두산타워 등 대형 쇼핑몰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동대문종합시장 앞 주차장은 금요일 밤부터 관광버스로 붐비기 시작한다. 금요일 밤부터 토, 일요일까지 이어지는 지방 산행팀을 실어나르는 안내산악회 버스들이다.
안내산악회 관광버스는 토요일 새벽 또 한차례의 주차장 점령을 벌인 뒤 동이 틀 무렵이면 모두 서울을 빠져나간다. 서울시민들이 가장 저렴한 비용을 들여 설악산이며 지리산, 멀리 통영 앞바다 사승봉도의 지리망산까지 오를 수 있는 기회다.
이보다 이른 시간에는 지방에서 옷을 사입하기 위해 올라온 상인들의 관광버스가 줄을 잇는다. 서울시민들이 모두 잠들어 있는 시간이 하루 중 동대문 일대가 가장 바쁜 때이다.
서울시는 옛 동대문운동장을 허물고 동대문디자인프라자를 짓고 있다. 약 1조 원의 예산을 투입한 이 사업이 마무리되면 종로6가까지 다시 한 번 패션산업의 바람이 불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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