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함께 돌자 서울 한바퀴⑨ 북촌·삼청동·창덕궁
다함께 돌자 서울 한바퀴⑨ 북촌·삼청동·창덕궁
  • 이인우 기자
  • 승인 2012.12.08 09:2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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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한 초겨울 바람과 함께 떠나는 북촌 마을 시간여행

겨울은 옛날이 또렷하게 오르는 계절이다. 마치 늦은 아침햇살을 튕겨내는 처마 끝 고드름처럼 과거가 맑고 투명하게 떠오른다. 저녁 무렵, 목덜미를 파고드는 냉기를 막기 위해 잔뜩 움츠리고 종종걸음치다 문득 보이는 따스한 불빛의 창문도 추억을 살려낸다.

겨울로 들어서는 문턱을 넘어선 12월 초, 골목골목마다 조선부터 근현대사의 흔적을 오롯이 간직한 종로 북촌마을과 삼청동이 새롭게 다가온다. 한 걸음 더 바깥쪽으로 나오면 조선 왕조의 600년 역사가 잠든 창덕궁과 창경궁이 또 한 번의 겨울을 나고 있다.

경복궁의 동쪽, 옛 벼슬아치들이 모여 살던 북촌을 중심으로 한 종로 골목길로 겨울여행을 떠나보자. 야트막한 언덕길을 오르다보면 먼 곳에서 두런두런 소리 내며 살아나는 추억을 만날 수 있다.

○비원 직접 본 서울시민 얼마나 있을까

▲ 창경궁 가는 길 창경궁은 창덕궁 돈화문의 동쪽 반대편에 있기 때문에 시민들의 발길이 뜸한 편이다.
창덕궁은 경복궁 다음으로 큰 조선의 궁궐이었다. 2차 왕자의 난으로 왕위에 오른 태종 이방원이 1405년 정궁인 경복궁을 대신할 이궁으로 창건했다. 이후 1592년 임진왜란 당시 경복궁이 불에 탄 뒤 흥선 대원군 이전까지 300여 년간 정궁 역할을 했다.

창덕궁도 임진왜란으로 소실됐으나 선조의 환도 이후 가장 먼저 재건해 정궁으로 사용했다. 인정전 등 지금 남아있는 전각들도 대부분 선조 이후 중건한 건물이다.

창덕궁은 정문인 돈화문과 인정문․인정전을 중심으로 한 외전과 대조전을 중심으로 한 정침, 주변 전각으로 구성된 내전, 그리고 후원으로 구분된다. 창덕궁뿐만 아니라 경복궁, 창경궁 등 조선의 궁궐은 인정전, 근정전 등 외전보다 뒤로 길게 이어진 내전과 후원에 진면목을 담고 있다. 특히 창덕궁은 비원으로 부르는 후원의 가치가 독보적이다.

창덕궁 후원은 비원과 금원(禁苑)․북원(北苑)으로 나뉜다. 후원은 태종 당시 처음 조성됐고 임진왜란 뒤인 광해군 때 창덕궁을 복원하면서 새로이 건물을 짓고 연못을 조성했다. 이후 인조와 숙종 때 많은 정자와 건물을 지어 지금까지 전해 온다.

창덕궁 후원에는 100여종이 넘는 수종에 300년이 넘는 거목들이 있고 계류와 연못․정자들이 자연과 조화를 이룬다.

후원은 또 5개의 큰 공간으로 나뉜다. 제1공간으로 부용지와 부용정, 영화당과 춘당대, 어수문을 일주문으로 하는 주합루와 서향각, 희우정과 기오정 그리고 사정(四井)기념비각이 있다.

제2공간은 불로문을 지나 애련정과 애련지, 사대부집을 본떠 지은 연경당이 있다. 마지막 제3공간으로 반도지․관람정․승재정․반월지․존덕정․일영대 등이 연못과 괴석, 그리고 정자와 나무숲으로 조화를 이루고 있다.

▲ 인조가 창덕궁 후원의 가장 깊은 곳에 만든 옥류천은 정자와 우물, 나무가 어우러진 비경을 연출한다.
제4공간은 옥류천 공간으로 청의정․태극정․농산정․취한정․소요정 등이 둘려있고, 인조의 친필이 새겨진 소요암과 창덕궁의 명당수인 옥류천의 원천인 어수우물 옥정수가 있다. 제5공간은 산마루에 취규정․능허정․청심정이 있는 공간으로 후원 중 가장 고요하고 적막하여 은사의 안식처와 같은 느낌을 준다.

▲ 창덕궁 후원.
이런 창덕궁 후원을 직접 본 서울시민은 과연 몇 명이나 될까. 주말 하루 시간을 내 창덕궁을 방문하면 하루가 금세 지날 정도로 깊은 후원에 빠져들 수 있다.

하지만 후원을 둘러보기 위해서는 창덕궁 관리소 홈페이지(http://www.cdg.go.kr/)를 통해 예약해야 하고 관람시간도 90분으로 제한된다. 관람료는 성인 5000원, 어린이 2500원, 안내인과 동행하며 설명을 듣는 제한관람이다.

○조선의 프리미엄 주거단지 북촌 한옥마을

▲ 국가수준 학업성취도 평가(일제고사)가 전국적으로 치러진 6월 26일 오전 일제고사를 반대하는 어린이와 학부모들이 도심 속 거리 박물관 서울 북촌 한옥마을을 찾아 현장학습 체험을 하고 있다.
북촌은 청계천과 종로의 북쪽에 있는 마을이란 뜻이다. 남쪽의 남산 기슭부터 지금의 명동역 인근을 일컫던 남촌의 반대편이다.

북촌과 남촌은 지리적 차이뿐만 아니라 신분적 차이도 분명했다. 북촌에서 남쪽을 향했을 때 오른쪽은 경복궁, 왼쪽은 창덕궁과 창경궁이다. 이 때문에 북촌에는 조선시대 벼슬아치들이 몰려 살았고 자연스럽게 기와집이 들어찼다.

반면 남촌은 과거에 급제하지 못한 가난한 양반이나 중인들이 살았던 곳이다. 가난한 선비의 기개를 뜻하는 ‘남산골 딸깍발이’라는 말도 여기서 나왔다. 이에 비해 북촌은 한결 여유롭고 번듯한 동네로 조선시대 서울의 유산계층 밀집지였다.

1906년 호적 자료에 따르면 북촌 전체인구 1만241명(1932호) 중 양반과 관료가 43.6%를 차지했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60~70년대를 거치면서도 북촌은 서울 토박이들의 중심으로 명맥을 유지해왔다.

하지만 70년대 말부터 강남개발이 시작되면서 북촌 토박이들도 서울 각지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1980년대 초 북촌의 작은 기와집 한 채를 사뒀다가 몇 해 지나지 않아 다시 팔았던 정모(57) 씨는 아직도 당시를 후회한다. 그대로 집을 갖고 있었다면 집값이 크게 뛰었을 거란 생각에서다.

정씨의 사례와 같이 북촌은 옛 것을 내세우지만 서울의 다른 지역 못지않은 개발과 변화를 겪어왔다. 북촌은 1999년 주민조직 ‘(사)종로북촌가꾸기회’의 요구로 서울시정개발연구원과 주민, 전문가, 서울시가 나서서 북촌 가꾸기를 시작해 새롭게 만들어졌다.

▲ 북촌 한옥마을의 게스트 하우스에서 서울의 밤을 보낸 외국인 관광객들이 골목길을 내려오고 있다.
현재는 2001년부터 본격적으로 시행된 서울시의 ‘북촌 가꾸기’ 사업에 따라 속속 개량화한 한옥을 중심으로 서울의 관광명소로 자리 잡았다. 북촌의 많은 한옥 주인들은 게스트 하우스를 운영, 해외 관광객들을 끌어들이고 있다.

또 북촌문화센터를 비롯, 한옥체험관과 민화공방, 금박공방, 닥종이 공방 등이 있고 북촌동양문화박물관, 북촌생활사박물관 ‘오래된 향기’, 세계장신구박물관 등 많은 사설 박물관도 발길을 끌고 있다.

○서울에서 가장 Hot한 거리 ‘삼청동길’

▲ 경복궁 담장을 끼고 있는 삼청동길의 초겨울 풍경.
북촌에서 내려와 경복궁 쪽으로 걸어가면 삼청동길과 만난다. 삼청동길은 지하철 3호선 안국역 1번 출구를 나와 풍문여고를 끼고 정독도서관 쪽으로 가면서도 찾을 수 있다.

또 경복궁 광화문 동쪽 동십자각을 끼고 돌아가는 도로를 따라 걸어가도 된다.
삼청동은 이곳에 도교(道敎)의 태청(太淸)·상청(上淸)·옥청(玉淸) 3위(位)를 모신 삼청전(三淸殿)이 있었던 데서 유래했다는 설과 산과 물이 맑고, 인심 또한 맑고 좋다고 삼청(三淸)이라 했다는 설이 있다.

지난 19일 배우 이영애 씨가 삼청동에 한류숍을 내기로 했다는 기사가 쏟아져 나왔다. 이씨는 2005년 영화 ‘친절한 금자씨’ 이후 7년째 작품 활동을 중단해 왔다는 점에서 관심을 끌었다.

결혼 후 양평에서 육아에 전념해 온 이씨가 삼청동에서 첫 대외활동을 시작할 정도로 이 지역은 서울의 ‘핫 플레이스’가 된 지 오래다. 청와대가 멀지 않고 국무총리 공관이 있는 삼청동은 광화문 앞에서 명륜동으로 넘어가는 샛길이었다.

하지만 90년대 후반부터 이 지역에 들어선 식당이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시민들의 발길이 잦아지기 시작했다.

최근 삼청동은 유럽 등에서 수련하고 돌아온 젊은 요리사들이 속속 ‘오너 셰프’ 음식점의 문을 열면서 새로운 트렌드를 이끌고 있다. 여기다 밀려드는 시민, 관광객을 겨낭한 패션·소품 가게도 너도나도 개성 있는 인테리어로 색다른 도시 풍경을 만들어낸다.

주말 삼청동길은 이 때문에 사람에 막혀 길을 걸을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인파가 몰린다. 삼청동은 또 관광객 1000만 시대를 이끈 견인차 역할도 톡톡히 하고 있다.

배우 이영애가 굳이 삼청동에 한류숍을 내는 까닭도 이곳에 몰려드는 수많은 관광객을 타깃으로 했기 때문이다.

○외따로 떨어져 쓸쓸한 동십자각

▲ 현재의 동십자각.
광화문 쪽에서 삼청동으로 가는 길 한쪽에 망루 하나가 외따로 서있다.
경복궁의 파수대 역할을 하는 동십자각이다. 동십자각은 반대편 효자동 입구에 있던 서십자각과 한 쌍을 이뤄 경복궁에 접근하는 사람들을 감시하던 시설이었다.

▲ 1907년에 독일인 헤르더 산더가 촬영한 동십자각과 주변 풍경.
원래는 광화문에서 직선으로 이어진 경복궁 담장 끝 모서리에 있었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부를 지으면서 광화문을 옮겼고 1970년대 박정희 정권 당시 이를 복원할 때도 당초 자리에서 14.5m나 뒤로 물러난 자리를 잡아 동십자각만 외따로 떨어지게 됐다.

반대편 서십자각 또한 일제가 허물어 대칭구조가 깨진 상태다. 경복궁을 제대로 복원하기 위해서는 광화문부터 제자리에 옮기고 서십자각도 새로 세워야 한다.

또 일제가 동십자각에서 뜯어낸 망루로 오르는 계단도 원형대로 되살려야 하지만 완전한 복원 계획이 나오지 않고 있다. 이 때문에 경복궁이나 삼청동을 찾는 시민들은 동십자각이 무엇인지, 왜 그곳에 외따로 서있는지 모른 체 지나치고 만다.

○KS 산실에서 시립도서관으로- 정독도서관

▲ 종로구 북촌 아래 소격동 정독도서관은 도심속에서 옛 책의 정취를 듬뿍 느낄 수 있는 보석과 같은 공간이다.
경기고는 우리나라 최고 엘리트를 배출했던 고등학교였다. 경기고를 거쳐 서울대를 졸업한 이들은 흔히 ‘KS 출신’이라고 불렀다.
이들은 60년대 후반부터 70년대 고도성장기를 이끈 테크노크라트로서 중추적 역할을 해왔다. 하지만 70년대 고교 평준화가 시작되고 경기고를 강남구 삼성동으로 이전하면서 ‘KS’도 역사의 뒷길로 사라지게 됐다.

전국 수재들이 다 모였다는 경기고 옛 교정은 그러나 아직 그대로 남아있다. 북촌 아래(종로구 북촌로5길 48)에 있는 서울시립 정독도서관이다. 서울시는 지난 1977년 옛 경기고 건물과 부지를 인수, 시립도서관으로 꾸몄다.

현재 정독도서관은 52만여 권의 장서와 1200여 종의 연속간행물, 1만5500여 점의 시청각자료, 1만2800여 점 이상의 교육사료를 보유하고 있다.

사료관동과 도서관 1·2동, 휴게실 등 가장 오래된 4개 건물은 보존가치가 높아 등록문화재로 지정됐다. 경기고 건축 당시 최신식 설비인 스팀난방을 갖춘 것만으로도 최고 명문학교로서의 위상을 알렸던 건물들이다.

이러한 연혁 때문인지 정독도서관은 서울의 지식인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도서관 시설뿐만 아니라 조선왕조의 흔적도 찾아볼 수 있다.

정문으로 들어간 뒤 오른쪽으로 걸어가면 만날 수 있는 종친부 건물이다. 종친부는 조선 왕의 족보와 얼굴 모습을 그린 영정을 받들고 왕가·종실·제군의 계급과 벼슬을 주는 인사를 다루던 관아였다.

당초 소격동 165번지의 옛 기무사 부지 에 있던 것을 1981년 지금의 위치로 옮겼다.

○아버지에게 ‘때 밀렸던’ 기억, 중앙탕

▲ 북촌마을로 오르는 길 초입에 있는 중앙탕은 45년째 1970년대 동네 목욕탕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설이나 추석을 앞두고, 아니면 많아야 한 달에 한 번쯤 목욕탕에서 때를 밀던 시절이 있었다. 어린아이들은 아버지나 어머니의 손아귀에 잡혀 피부가 벗겨지는 듯한 아픔 속에 때를 밀렸다.

겨울이면 껴입은 내복까지 둘둘 말아 넣은 뒤 먹 고무줄 달린 열쇠로 잠그고 수증기 자욱한 탕 안으로 들어갔다. 목욕탕에 몸을 담그기 전 몸을 헹구기 위해서는 샤워보다 고무 바가지로 물을 떠 끼얹는 게 편했다.

물 때 앉아 미끈거리는 타일을 조심조심 밟고, 집에서 가져간 비누갑과 수건이며 칫솔 등을 누가 쓸 새라 곁눈질도 멈추지 않았다.

1970년대까지 우리가 마음먹고 나섰던 목욕탕 풍경이다. 이런 목욕탕이 종로 지하철 3호선 안국역 3번 출구에서 불과 500여m 떨어진 곳에 그대로 남아있다.

북촌마을 비탈길이 시작되는 곳, 흰색 아크릴 간판에 붉은 온천 마크가 또렷한 중앙탕이 불쑥 고개를 내민다. 70년대의 기억이 있는 시민들이라면 누구나 ‘아~’ 감탄사가 나오기 마련이다.

중앙탕은 지금 주인인 화교 부부가 1968년 인수해 44년째 운영하고 있다. 인수 전부터 목욕탕이었지만 누가, 언제 시작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목욕탕은 옛날 그대로 남탕과 여탕 입구가 좌우로 나뉘어 있고, 남탕 탈의실 한 쪽에는 역시 수십 년이 된 이발의자가 거울을 마주하고 있다. 목욕료는 대인 5000원, 소인 3000원. 낡은 나무 문틀에는 ‘물을 아껴 씁시다’라고 쓴 서울시의 홍보물이 붙어있다.

탈의실의 흰 색 타일과 벽걸이형 전열기에서 주렁주렁 흘러내린 전선, 아무렇게나 꽂아놓은 듯한 헤어드라이기 등이 ‘진짜’ 옛날 그대로다. 심지어 한 쪽 구석에는 노란색 공중전화기까지 남아있다.

시간이 한참 비켜간 옛날 목욕탕은 어찌보면 나날이 개량을 거듭하는 언덕 위 한옥마을보다 더 오래된 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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