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함께 돌자 서울 한바퀴 ⑫ 마포구
다함께 돌자 서울 한바퀴 ⑫ 마포구
  • 이인우 기자
  • 승인 2012.12.28 10:4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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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우젓장수 번창하던 마포나루에서 젊음의 저항정신 사라진 소비의 거리까지

서울 한강을 끼고 있는 마포와 충남 안면도는 멀리 떨어져있으면서도 하나의 연결고리로 이어진다.
안면도는 당초 태안군 끄트머리의 작은 곶이었지만 한양으로 가는 세곡선(稅穀船)의 원활한 통행을 위해 바닷길을 내는 바람에 섬이 됐다. 안면도를 거쳐 북으로 올라온 배는 한강 하구를 거쳐 한양에 당도, 마포에 짐을 내렸다. 곡창지대 전라도의 미곡이 이렇게 해서 한양에 닿았고 짐을 내리는 마포나루는 더 없이 번성했다.

○삼개나루 자리에 마포대교 들어서고

▲ 마포대교.
마포는 삼개나루라고도 부른다. 용산강과 양화진, 마포에 있던 포구를 삼포라고도 했다. 나중에 우리말인 삼을 한자 마(麻)로 바꿔 마포가 됐다고 한다.

▲ 1900년의 마포나루.
지금의 지명인 마포 또한 옛 포구 이름이 그대로 이어진 것이다. 수운이 사라진 요즘 마포는 포구가 사라졌으나 여전히 서울의 교통 요지로 꼽힌다. 동쪽으로는 마포대교를 통해 여의도로 길을 잇고 서쪽에서는 성산대교가 서울의 남북과 동서를 잇는다.

마포구는 또 70~80년대 서울의 모든 쓰레기를 야적하던 난지도와 상습 수해지역으로 꼽히던 망원동으로 전국적인 지명도를 갖기도 했다. 난지도는 이제 서울시민의 대표적인 휴식처인 하늘공원으로 탈바꿈했고 망원동은 서울에서 가장 수해에 안전한 지역으로 꼽히고 있다.
과거 수운의 중심지에서 서울의 개발사(開發史)를 한눈에 보여주는 지역으로 옷을 갈아입게 된 것이다.

○오젓, 육젓부터 추젓까지 팔던 마포나루

▲ 창신동은 일제 강점기 채석장으로 유명했다. 지금도 채석장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는 곳을 이곳에서는 돌산마을이라고 부른다.
마포에는 세곡선만 올라온 것이 아니었다, 서해를 통해 한양으로 들어온 온갖 지방 산물이 모였다.
마포는 삼남지방의 곡식과 새우젓 등 젓갈류의 집산으로 유명했다.

또한 이곳은 지금의 대흥동과 용강동에 있던 동막과 이어져 더욱 번성했다. 동막은 옹기장이들이 많이 모인 마을을 부르던 ‘독마을’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 밤이섬이 보이는 마포나루의 옛 모습.
독마을에서 만든 옹기는 마포에 들어온 소금배에서 내린 소금과 젓갈을 보관하는 용기로 적합했다. 또 소금을 거래하는 상인들도 몰려들어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 소금상인들이 살던 마을은 나중에 염리동이 돼 지금의 지명으로 남아있다.

마포나루가 있던 자리는 마포대교 아래였다. 다리를 건설하면서 나루터도 사라졌지만 마포구청은 옛날의 영화를 축제로 남기기 위해 매년 강상대고 축제와 마포새우젓축제를 개최한다.

마포새우젓축제는 서해 각지에서 담갔다가 한양으로 싣고 온 젓갈이 모였다는 유래를 바탕으로 마련했다. 마포나루에는 여름이면 음력 5월에 잡아 담근 오젓, 유월에 난 육젓에서 가을철 남근 추젓까지 차곡차곡 쌓였다.

해마다 김장철이면 마포나루는 젓갈을 구하기 위해 몰려온 한양 백성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이런 젓갈시장을 기념하기 위한 축제가 내년 10월 월드컵공원에서 열리는 ‘한강마포나루새우젓축제’다. 새우젓축제는 옹기그릇 등 민속품을 살 수 있는 옛날 장터, 마포나루새우젓박물관, 황포돛배 선상공연, 진도 북놀이, 강강술래, 줄타기공연 등 전통문화 공연 및 체험프로그램으로 구성된다.

또 강화, 소래, 강경, 광천, 신안 등 5대 유명 새우젓산지의 관할군청이 추천한 14개 새우젓판매업소가 지역의 명예를 걸고 참여한다. 올해 5회째를 맞은 새우젓축제는 10월 19일부터 21일까지 월드컵공원 평화의 광장에서 열렸다.

○생태공원으로 다시 살아난 쓰레기 산

▲ 90년대 초까지 서울의 쓰레기 처리장으로 높은 산을 이루던 난지도가 생태공원으로 탈바꿈했다. 기온이 30도가 넘는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한여름에는 난지도공원에서 캠핑하는 시민들이 늘어난다.
마포구는 70~80년대 신촌과 홍대앞 등 대학문화를 빼면 별 볼 것 없는 낙후 지역으로 꼽혔다.
지금의 성산대교 아래로는 서울의 온갖 쓰레기를 쌓아놓는 난지도가 사철 악취를 뿜어냈다. 난지도에는 갈 곳 없는 도시 빈민들이 모여 쓰레기를 뒤져 먹고 사느 이방지대이기도 했다.

▲ 1990년 난지도 모습.
90년대 초 쓰레기 야적장으로서의 수명이 다한 뒤에도 난지도는 2개의 어마어마한 쓰레기 산으로 남아있었다. 고양시 일산구로 가는 강변도로를 정비하기 전까지 난지도 아래는 한강을 따라 행주로 가는 지름길이기도 했다.

하지만 비오는 날 이 길로 잘못 들어서면 승용차에 악취 심한 물을 뒤집어써 다음날 세차하는데 애를 먹기도 했다.

1977년 한강 제방 건설과 함께 쓰레기 섬이 되기 전 난지도는 난초가 자라는 아름다운 섬이었다.

옛날에는 망원정 부근에서 한강과 갈라진 난지 샛강이 행주산성 쪽에서 다시 본류와 합쳐졌다.

난지도는 한강본류와 샛강 사이에 있는 섬이었다는 얘기다. 이 섬은 매년 여름이면 꽃을 피운 난향이 가득했고 남쪽 백사장 따라 흐르는 푸른 한강이 아름다웠다고 한다. 쓰레기 야적이 시작되면서 옛 모습을 잃은 난지도는 1993년 폐쇄된 뒤 다시 노을공원과 하늘공원 등 인공적인 생태공원으로 만들어지고 있다.

본격적인 재개발은 2002년 한일월드컵 경기를 전후해 이루어졌다. 쓰레기 야적장에 다시 흙을 입히는 복토공사에 이어 나무와 잔디를 심고 캠핑장을 조성했다. 또 한 쪽에는 억새풀밭을 만들어 매년 가을 억새축제를 열기도 한다.

난지하늘공원은 이같은 재개발에 따라 이제 여름철 시민 캠핑장이자 바비큐 파티장으로 인기를 얻고 있다. 이곳을 즐겨 찾는 젊은 시민들은 그러나 자신들이 발을 딛고 선 자리가 불과 20여 년 전 쌓인 쓰레기 더미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2002년 함성 기억한 월드컵경기장

▲ 지난 7월 서울 상암월드컵경기장에서 런던올림픽 개막을 앞두고 홍명보호가 마지막 국내전인 뉴질랜드와 친선경기를 가졌다. 평가전이 끝나고 대표팀 출정식이 진행되고 있다.
2002년 한일월드컵 경기는 변방에 머물렀던 대한민국 축구 대표팀의 위상을 끌어올린 변곡점이자 4000만 국민이 하나가 된 이벤트였다.

당시 월드컵 경기 유치를 위해 정부는 서울과 인천, 수원, 대전, 대구, 부산, 전주, 광주, 울산, 제주 등 10개 도시에 축구전용 경기장을 새로 지었다.

▲ 구자철이 뉴질랜드의 수비를 피해 슛을 날리고 있다.
상암월드컵 경기장은 그 중 가장 큰 규모로 부지면적 21만6712㎡, 건축면적 5만8539.63㎡, 연면적 16만6503.34㎡에 지하 1층, 지상 6층에 달한다. 당시 사업비 2060억 원이 들었고 아시아 최대라는 수식어도 붙었다.

한일 월드컵이 끝난 뒤에는 축구 전용 경기장의 기능뿐 아니라 일반·전문 상가, 체육·문화시설, 월드컵 기념관 등을 세워 시민들의 복합문화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하지만 이 경기장은 규모가 너무 큰데다 축구경기만으로는 유지가 안 돼 서울시의 골칫거리가 되고 있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지난 11월 유럽 순방길에 들른 스페인 FC바르셀로나를 벤치마킹, FC서울의 협동조합 창립과 상암구장 운영권 이관 등을 검토한 것으로 알려졌다.

상암구장을 중심으로 한 월드컵공원은 평화의 공원과 하늘공원, 노을공원, 난지천공원, 난지한강공원 등으로 구성돼 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 자리잡고 있다.

특히 난지천공원 등은 서울 도심에서 멀지 않은 곳의 산책 명소로 손꼽힌다. 최근 월드컵공원에는 겨울철 눈썰매장을 조성, 주말 눈밭을 달리는 가족들의 웃음소리가 그치지 않는다.

○창조와 퇴폐의 경계에 선 홍대앞

▲ 홍대 인근에는 주말마다 독립음악가들의 길거리 공연이 펼쳐져 행인들의 발길을 멈추게 한다.
홍익대 앞 계단집은 80년대 막걸리 한 잔이 아쉬운 대학생들이 드나들던 주점이었다. 지금 홍대 앞은 계단집과 같은 주점을 찾기 어려워졌다.

대신 멀리 상수역 인근까지 세를 키워나간 ‘홍대앞’에는 저마다 개성을 자랑하는 음식점과 주점, 찻집으로 가득하다. 홍대 정문에서 걸어서는 가지 못할 거리까지 ‘홍대앞’으로 통하면서 서울에서 가장 트렌디한 점포라는 옷을 입게 되는 셈이다.

▲ 홍익대학교 인근은 걷고싶은 길이라는 이름을 붙일 만큼 볼거리와 즐길거리가 가득한 서울의 이색지대로 통한다.
‘홍대앞’은 과거 홍익대 미대생들이 그들만의 독특한 거리 풍경을 만들면서 시작됐다. 60년대 명동이 서울의 문화를 주도했다면 70년대부터 80년대까지는 홍대앞이 그 전통을 이어갔다. 나름 서울의 문화적 해방구와 같은 정체성을 갖게 된 것이다.

2000년대로 접어들면서 홍대앞은 독특한 클럽문화를 중심으로 인디음악인들이 몰려들었고 홍대 특유의 미술적 감성이 거리를 장식하면서 더 강한 정체성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여기다 서울의 중고생과 외국인까지 하룻밤 여흥을 위해 몰려들면서 키치적인 색깔까지 더하게 됐다.

홍대앞은 거의 매일 저녁 거리 퍼포먼스가 벌어지고 인디밴드의 때로는 강력한 일렉트로닉 사운드가, 때로는 어쿠스틱한 멜로디가 거리를 점령한다.

여기다 골목 곳곳에 숨어있는 문화 공동체 등이 틈틈이 판을 벌이고 각지에서 몰려온 시민들이 그 판에 참여하면서 특유의 문화를 만들어간다. 홍대 앞은 그렇게 창조와 퇴폐적 소비의 경계에서 아슬아슬한 줄을 타고 있다. 이러한 팽팽한 경계가 홍대앞 문화의 독창적인 모습일 수도 있다.

○최루가스 사라진 유흥의 거리

▲ 신촌로터리 야경 모습.
신촌로터리의 80년대는 최루가스와 투석의 흔적으로 물들었다.
연세대와 서강대, 그리고 이화여대와 가까운 신촌은 시대에 따른 대학문화의 변화를 보여주기도 한다. 80년대 반정부 투쟁으로 치열했던 신촌은 이제 소비와 향락의 물결이 휩쓸고 있다.

▲ 신촌로터리 1970년대의 모습.
20년 전 로터리에서 가장 컸던 그랜드백화점은 건너편에 들어선 현대백화점에 밀려 자리를 내줬고 가난한 대학생들이 찾던 작은 술집 대신 프랜차이즈 업소가 거리를 점령하고 있다.

신촌로터리와 전철로 두 정거장 떨어진 이대 앞까지 주말 거리를 점령하는 이들은 대학생보다 직장인이나 중고생이 더 많아졌다. 이들은 신촌이라는 이름의 술집에 앉아 신촌이라는 분위기를 잡으며 신촌에서 돈을 쓴다. 신촌이 상징했던 대학문화와 청년들의 정의에 대한 열망이 빠져나간 자리는 이제 욕망의 배출구가 된지 오래다.

○벼슬아치 말타고 녹봉 받으러 오던 광흥창

▲ 고려 충렬왕 34년 관리들의 녹봉을 관장하던 관아인 좌창(左倉)을 광흥창(廣興倉)으로 고치면서 직제를 새로 정한다는 내용을 정리한 고려사의 한 대목. 광흥창은 조선 말까지 마포구에서 녹봉을 나눠주는 곳이었다.
지하철6호선 광흥창역은 다른 지하철역에 비해 유동인구가 그리 많지 않은 곳이다. 광흥창역 인근에 사는 주민들도 이곳의 지명이 왜 광흥창인지 잘 알지 못한다.

광흥창은 고려 말 설치한 관용 창고이자 이조 산하 기관의 이름이다. 중앙에서 벼슬한 관료들은 모두 광흥창에 직접 나와 녹봉을 타가야 했다. 화폐경제가 자리잡지 못했던 당시 녹봉은 대부분 미곡으로 지급됐다.

기록에 따르면 녹봉은 초기에 매년 1월·4월·7월·10월의 네 차례 지급하다가, 1701년(숙종 28)부터는 매월 지급했다. 매월 자급한 녹봉은 정1품의 경우 쌀 2섬8말과 콩 1섬5말, 종9품은 쌀 10말과 콩 5말이었다. 관료들은 남은 쌀과 콩을 옷이나 가구 등을 구입하는 생활비로 썼다.

광흥창이 마포에 있었던 까닭은 지방에서 오는 세곡선에서 짐을 내려 보관하기 좋았기 때문이다. 물류가 발달하지 않았던 시절, 세곡선에서 내린 쌀이며 콩을 곧바로 창고에 보관했다가 필요한 사람이 직접 타가도록 했다.

녹봉을 받기 위해서는 문관은 이조에서, 무관은 병조에서 발급한 지급의뢰서를 갖고 직접 광흥창에 나와야 했다. 옛날 관료들의 봉급날이면 광흥창 일대가 저마다 끌고 온 마필이나 우마차로 북새통을 이뤘다고 한다. 광흥창의 흔적은 지금 찾아볼 수 없다. 그저 지하철 역 이름으로만 남아 옛 이야기를 전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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