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역사적 유산, 창경궁(昌慶宮) ①
민족의 역사적 유산, 창경궁(昌慶宮) ①
  • 나각순 서울시사편찬위 연구간사
  • 승인 2010.10.26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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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각순의 ‘서울문화유산 둘러보기’ 24]

창경궁은 종로구 와룡동에 자리 잡고 있으며, 사적 제123호로 지정되어 있다. 창경궁은 창덕궁의 동쪽에 연접하고 있고 남쪽으로는 종묘와 통하는 별궁이다.

정전인 명정전(明政殿)은 다른 궁궐과 다르게 동향(東向)하고 있는데 이는 주산 줄기가 서쪽으로 뻗어있는 지형상의 조건에 따른 것으로 보이며, 창덕궁과 더불어 동궐(東闕)이라 부른다.

상왕 궁에서 대비 궁으로, 다시 왕궁으로

▲ 창경궁 전경. ⓒ나각순

창경궁은 조선 태조 때는 단순히 ‘별궁(別宮)’이라고 칭하다가 세종 때에 ‘수강궁(壽康宮)’, 성종 때 ‘창경궁’이 되었다.

창경궁은 임진왜란 때 전소되었다가, 광해군 때 재건되었는데 외전의 주요 전각은 이때 복원된 것이며 내전은 여러 차례의 화재로 인하여 대개 순조 이후에 재건된 건물들이 남아있다.

창경궁이 자리한 곳은 고려 말기 공민왕 때 남경 천도계획에 따라 재건된 남경궁궐(南京宮闕)의 수강궁터로 전해지며, 태조 이성계는 태종 8년(1408) 창경궁 터에 지은 광연루(廣延樓) 아래층 별궁에서 승하하였다.

그런데 태조는 세상을 뜨기 전에 별궁의 동산(東山)을 거닐었고, 그가 꾸린 파(蔥) 씨가 성종 때 한 줄기에서 아홉 대가 나서 상서로운 징조를 보여주는 것이라 하여 ‘서총(瑞蔥)’이라 하고 연산군 11년에 대를 쌓아 서총대(瑞蔥臺)의 지명 일화가 전하고 있다.

이어 태종 18년(1418) 태종이 세종에게 양위하고 상왕이 되니, 세종은 태종이 거처할 궁전을 수강궁이라 이름 짓고 새 궁궐을 마련하였다. 태종은 양위 뒤에도 병권(兵權)에 해당하는 정무 등을 직접 관장하였으며, 수강궁 정전에서 집무를 하고 대비는 별전에 거처하였다.

세종 2년(1420) 태종비인 원경대비가 이곳에서 승하하였고 세종 4년에 태종이 세상을 떠나 뒤 수강궁은 크게 사용되지 않았다.

그 후 단종 3년(1455) 단종은 상왕이 되어 수강궁에 옮겨 살았으며, 세조도 1468년 9월 7일 수강궁 정침에서 세상을 떠나니 다음 날로 세자인 예종이 수강궁에서 즉위하였다.

이와 같이 태조 때 창건된 별궁이나 세종 때 지은 수강궁은 모두 임금 자리에서 물러난 상왕이 살던 곳이며, 이곳이 본격적인 궁궐의 격식을 갖춘 것은 성종 때로 당시의 세 대비 즉 세조 비인 정희왕후 윤씨, 덕종 비 소혜왕후 한씨, 예종의 계비 안순왕후 한씨를 수강궁에 모시고자 한데서 비롯되었다.

여러 해 동안 중신들의 반대로 공사가 지연되다가 성종 14년(1484) 공사가 착수되어 이듬해 새 궁전이 조성되었다. 이때 정전인 명정전과 편전인 문정전을 비롯하여, 내전으로 수녕전‧환경전‧경춘전‧인양전‧통명전‧양화당‧여휘당‧사성각‧환취정 등의 전각을 짓고 궁궐 이름을 ‘창경궁’이라 하였다.

이때 ‘창경궁기(昌慶宮記)’와 ‘환취정기(環翠亭記)’는 우부승지 김종직이 지었으며, 전각의 건물 이름은 모두 서거정이 지었다.

한편 창경궁은 당초에 주로 대왕대비인 정희왕후가 머무르는 곳으로 지어졌으나 공사 중에 대왕대비가 승하하니 두 대비가 사는 집이 되었으며, 그 뒤 서연청과 빈청을 비롯하여 승정원과 홍문관‧사옹원‧사복시‧도총부 등 여러 관아건물도 구비되어 궁궐의 격식을 갖추고 때로는 정사를 보기도 하였다.

그리고 성종은 대비들의 뜻을 받들어 나라 다스리는 일에 부지런히 힘쓰는 한편 때때로 이곳에서 연회를 베풀어 대비들을 위로하기도 하고, 종친을 불러 잔치를 베풀기도 하였으며 이러한 잔치에는 세자인 연산군이 참여하였다.

연산군은 피서를 위하여 후원에 큰 대를 쌓은 서총대에서 유흥∙행락을 일삼았으며, 이후 명종은 이곳에서 문무 관원들과 함께 연회를 베풀고 이때 무신들은 활을 쏘아 우열을 가리고, 문신들은 왕과 함께 율시를 지어 화답하기도 하였다.

정조 때도 금원에서 곡연을 하고 서총대에서 활쏘기를 하는 등 서총대는 후에 춘당대로 불리면서 군신 사이의 시사열무(試士閱武)와 연회를 베푸는 장소로 사용되었다.

창경궁의 중건과 변화

창경궁은 창건된 지 100여년 뒤인 1592년 임진왜란으로 종묘‧경복궁‧창덕궁과 더불어 모든 건물이 불에 타 없어졌다. 광해군 원년(1609) 창덕궁이 복원된 뒤 창경궁의 중건이 논의되었으나 대간의 반대와 정치적 불안정으로 공사에 착수하지 못하였다.

광해군 7년(1615) 경운궁에서 창덕궁으로 이어하면서 선수도감(繕修都監)을 설치하여 중건공사에 착수하여 이듬해 11월경까지 약 1년 반의 역사 끝에 완공되었다.

▲ 창경궁 문정전. ⓒ나각순

이때 재건된 건물은 명정전‧문정전‧환경전‧인양전 등이며 홍화문과 그 주변의 관아가 건설되고 이를 잇는 행랑도 조성되었다.

광해군 15년 인조반정으로 창덕궁의 내전이 소실된 것에 이어, 인조 2년 이괄의 반란으로 반란군에 의해 창덕궁이 점령당하고 인조는 한강을 건너 공주지방으로 피난갔다.

이때 창경궁 또한 반란군의 수중에 들어가 불에 타니 내전의 통명전‧양화당‧환경전‧경춘전 등이 소실되고 외전인 명정전과 문정전‧홍화문은 남아있었다.

그 후 정묘호란과 인목대비의 승하 등 국사로 말미암아 중건이 늦어지다가 인조 11년(1633)에 인경궁(仁慶宮)의 일부 전각을 철거하여 창경궁 내전의 중건공사를 실시하였다.

그 내용은 ‘창경궁수리소의궤(昌慶宮修理所儀軌)’에 기록되어 있다. 즉 통명전‧사성각‧양화당‧연희당‧연경당‧환경전‧경춘전‧함인정 등이 인경궁의 청와전 등 전각을 옮겨 재건되었으며, 통명전 남월랑과 동궁전‧중전 등이 신축 복원되었다.

그 후 효종 연간에 명정전 등 30여 전각의 수리가 있었고, 특히 숙안(淑安)∙숙명(淑明)∙숙휘(淑徽)∙숙정(淑靜) 네 공주의 거처로 요화당‧취요헌‧난향각‧계월각 등을 신축하였다. 현종 11년(1670)에는 건극당이 건립되었으며, 숙종 12년(1686)에는 함인정 서쪽에 취운정을 건립하였다.

한편 영조 26년(1750) 왕은 정사를 세자에게 위임하여 대개 환경전에서 중요한 정무만을 보고 세자는 시민당에서 정무를 보았다.

또한 숭문당에서 성균관 학생을 불러 친시(親試)를 행하고 어주를 하사하였으며, 함인정에서는 문과와 무과의 장원 급제자를 접견하고 명정전에서 조하를 받았다. 영조 32년(1756)에는 명정전 남쪽의 저승전과 낙선당에서 불이나 취선당‧숭경당 등이 소실되었다.

정조 원년(1777)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모시기 위하여 통명전 북쪽의 높고 넓은 터전에 자경전(慈慶殿)을 건립하였다.

그후 정조는 창경궁에 이어하고 그 3년에는 창경궁 동쪽 원유인 함춘원에 마련된 경모궁(景慕宮; 사도세자 사당)에 참배다니기 쉽게 홍화문 북쪽에 월근문을 건립하여 경모궁의 일첨문으로 통하도록 하였다.

이어 9년에는 수강재(壽康齋)를 건립하였으나, 14년에는 통명전과 여휘당이 소실되었다. 그리고 정조는 창경궁에 태어나 재위 24년만인 1800년에 영춘헌에서 승하하였으며, 순조는 정조 14년에 영춘헌의 서행각인 집복헌에서 태어났고 헌종은 순조 27년 경춘전에서 태어났으며 장조 또한 창경궁에서 태어났다.

또 창경궁은 순조 30년(1830)에 내전 대부분이 소실되는 큰 화재를 당하였다. 세자인 익종이 세상을 떠나자 환경전을 빈궁으로 삼았는데 그 첨보각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내전의 대부분이 소실되었다.

창경궁 내전의 중건공사는 이듬해 창경궁영건도감(昌慶宮營建都監)이 설치되어 4년 후인 순조 34년(1834)에 완공되었다. 그 내용은 ‘창경궁영건도감의궤’에 전하고 있다.

그런데 창경궁 영건공사가 있던 순조 31년에서 34년까지는 창덕궁의 중건공사와 경희궁의 중건공사가 겹쳐있던 때였다. 즉 순조 30년과 31년에는 경희궁의 회상전‧융복전‧흥정당‧잡경당‧사현각이 조성되었으며, 순조 33년과 34년에는 창덕궁의 대조전‧희정당‧징광루‧경훈각‧흥복헌‧양심각‧정묵당 등이 조성되었다.

이와 같이 화재로 인한 창경궁 영건공사가 있었던 순조 31년과 34년 사이는 당시 존재했던 조선왕조 3대 궁궐의 내전 대부분이 거의 연속적으로 중건된 때이다.

이 많은 전각의 조성이 3~4년의 짧은 기간 동안에 이루어졌다는 것은 조선 후기 건축기술이 크게 축적되었고 기술인력 또한 성숙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으며, 이는 고종 때 경복궁의 중건공사에 그 실제를 또 한 번 보여주었다.

순조 이후 창경궁의 변화는 철종 8년에 선인문‧주자소 등 62칸이 소실되었고, 고종 10년(1873)에는 자경전이 소실되었다.

따라서 고종 13년에 창덕궁과 함께 창경궁의 보수공사가 시작되어 이듬해 마무리되었으며, 경복궁 중건되고 그 후 왕이 경운궁으로 이어하면서 창경궁은 왕의 거소로 이용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순종이 즉위한 후 경운궁에서 창덕궁으로 이어하게 되자 창경궁은 순종의 산책과 소요장소 및 빈객을 접견하는 곳으로 이용되었다.

이 무렵은 일제의 침략세력이 궁중 내외를 장악하고 국정을 좌우하던 때로 실권을 잃은 왕의 관람과 위안을 위하여 진기한 동물을 사육시키고 기화요초(琪花瑤草)를 기르는 시설을 창경궁에 두게 되니, 이것이 곧 창경궁의 동물원과 식물원을 개설하게 되는 발단이 되었다.

이러한 정책은 황제의 관람과 위안이라는 목적 이전에 황궁의 존엄을 파괴하고 민족문화 유산을 말살하려는 책동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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