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역사적 유산, 창경궁(昌慶宮) ②
민족의 역사적 유산, 창경궁(昌慶宮) ②
  • 나각순 서울시사편찬위 연구간사
  • 승인 2010.10.29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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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각순의 ‘서울문화유산 둘러보기’ 24]
창경궁에서 창경원으로, 다시 창경궁으로

융희 2년(1908) 선인문 안 보루각 터에 동물원을 짓고 각종 짐승과 새들을 사육하여 대신들이 관람하기도 하였으며, 춘당대 지역에 식물원을 설치하였다.

▲ 창경궁 옥천교와 금천(명당수). ⓒ나각순

융희 3년에 동‧식물원의 개원식이 있었으며 일반인에게 관람이 허용되고, 권농장(勸農場) 터에는 연못을 파서 고기를 기르고 연꽃을 심어 춘당대 앞의 연못이라 하여 춘당지(春塘池)라고 이름 하였다. 그 북쪽에는 일본식 정자를 세웠다.

1911년에 박물관을 낙성하고 도자기‧금속류‧조각‧서화‧불상‧무기류 등 1만 수천 점을 진열하였다. 이때 ‘백성들에게 실물을 교육시키고 그들의 위안장소로 쓰도록 하라’는 순종의 뜻을 빙자하여 창경궁은 ‘창경원(昌慶苑)’으로 격하되었다.

이어 1911년에 옛 자정전 터에 황실박물관을 짓고, 1915년에 장서각(藏書閣)을 지어 황실도서관으로 삼았다. 1922년경에는 궁궐 곳곳에 수천 그루의 벚꽃을 심어 공원화 하였고, 1924년부터 야간 공개되었다. 그 뒤로 맹수사‧낙타사‧타조사‧사자사‧원숭이사 등이 건립되었다.

1938년 박물관 유물을 덕수궁으로 이전하고 박물관을 장서각으로 사용하게 되어 도서를 이곳으로 이전하고, 생물표본관과 궁중유물전시관으로도 사용하였다. 그리고 1944년에는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폭격 우려와 사료 및 인력부족으로 맹수류와 큰 동물을 독살하기도 하였다.

광복 후 창경원은 한때 문 닫을 위기에 처하기도 하였으나, 관리관청이 구황실재산관리위원회에서 문교부 문화재관리국으로 개편되고 창경원사무소로 개칭되어 새로운 모습으로 동물원이 꾸며지고 식물원에서는 난과 국화전시회가 열리는 등 시민의 휴식공간을 제공해 주었다.

그 후 1977년 남서울대공원의 건립계획에 따라 1983년에 이르러 창경원의 동‧식물원의 관람 폐지에 이어 이듬해 그 이름도 창경궁으로 환원하여 창경궁 중창공사에 들어갔다. 이에 따라 궁의 기본이 되는 정전‧편전‧침전의 건물을 중심으로 복원건물의 주변에 대해 1984년부터 2차에 걸친 발굴 작업을 실시하고, 문헌의 기록과 ‘동궐도’ 등 옛 궁의 배치도를 참고하여 문정전과 명정전 주변 행각, 명정문 밖의 좌우 행각 등 기본 건물을 복원하여 1986년 8월에 준공을 보았다. 그 내용은 1989년에 발간한 ‘창경궁중건보고서’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창경궁 전각배치

창경궁의 전각배치는 정전과 편전이 있는 외전과 그 뒤 북서방향으로 위치한 내전이 중심이 되며 계속해서 창덕궁 후원과 이어지고 있다. 외전의 중심 건물인 정문‧중문‧정전은 동향으로 일직선상에 놓여있고 주변 행각이 방형으로 구성되어 있다.

즉 정문인 홍화문의 좌우에 날개 전각이 있고, 홍화문을 들어서면 북에서 남으로 가로질러 흐르는 명당수(금천) 위에 돌다리인 옥천교(玉川橋)가 있다. 다리를 지나면 중문인 명정문이 있는데 이 부분에서 행각이 이어져 정면에 있는 명정전을 둘러싸고 있다. 명정전 앞에는 자연석을 깐 넓은 마당에 좌우 품계석이 놓여 있다.

▲ 창경궁 전경. ⓒ나각순

명정전의 남쪽으로는 왕의 집무처인 문정전이 남향하고 있고, 그 뒤에 태학생을 접견하여 주연을 베풀었던 숭문당이 있으며, 그 밖으로 내전의 전각들이 펼쳐진다. 외전에서 내전으로 통하는 빈양문(賓陽門)을 지나 함인정이 있고 이어 침전인 환경전과 경춘전이 펼쳐진다.

그 북쪽으로 내전의 정전인 통명전(通明殿)이 있으며, 통명전에는 경복궁의 교태전과 창덕궁의 대조전 그리고 경희궁의 회상전과 같이 용마루가 없다. 통명전의 서쪽에는 장방형의 화강안으로 둘려있는 연못이 조성되고 연못을 가로지르는 돌다리와 괴석이 설치되는 등 궁중생활의 멋을 자아내는 조경을 하였다.

통명전 동쪽에는 양화당과 영춘헌이 있다. 그리고 궁궐 내에는 관천대와 풍기대 등 천문관측기구가 보물로 지정되어 있으며, 성종의 태실과 태실비도 광주(廣州)에서 옮겨와 있다.

창경궁에서의 일어난 주요 사건

창경궁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건으로는 숙종 27년(1701) 신사고변(辛巳蠱變)과 신임사화(辛壬士禍) 및 영조 때 사도세자를 죽인 임오참변(壬午慘變;1762)을 들 수 있다. 숙종은 장희빈을 총애하였는데 장희빈이 경종이 태어난 창경궁 안 취선당 서쪽에 신당(神堂)을 설치하고 서너명의 궁녀와 함께 인현왕후를 모함하는 기도를 하다가 발각되어 죽임을 당하였다.

신축‧임인년(1721‧1722)에는 왕세자(경종)의 즉위와 왕세제〔延礽君;영조〕의 책봉을 둘러싸고 노론과 소론이 대립하다가 연잉군을 지지한 노론의 대신들이 역모로 몰려 죽임을 당한 사건이 동궁의 처소를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그러나 영조 즉위(1724) 후에는 탕평책을 실시하였지만 점차 영조를 지지한 노론이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다. 그리고 영조 38년(1762) 창경궁 선인문 안 영조의 정비인 정성왕후의 사당인 휘녕전 앞 뜰에서 왕세자인 사도세자가 커다란 뒤주에 갇히어 8일만에 세상을 떠나는 사건이 있었으니, 이는 노론과 소론의 당쟁과 문숙의와 화완옹주의 질투가 빚어낸 궁중 비극이었다.

그리고 정조 때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위해 지은 자경전은 ‘한중록(閑中錄)’의 산실이다. 정조 19년(1795) 자신의 환갑이 되던 해 사도세자의 임오참변 등 그 동안 겪은 육십 평생의 삶을 섬세하고 아담한 문장으로 엮어 ‘인현왕후전’과 더불어 궁중문학의 쌍벽을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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