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참여와 정치 바로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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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 혁 동국대 외래교수․정치학 박사
  • 승인 2013.02.01 11:5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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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서로를 위로하자 - 공감사회를 바라며

연일 근래 없던 한파가 이어지고 있다. 없이 사는 사람들에게는 더위보다 추위나기가 힘든 법이다.
어떤 이는 사람 싫어지는 여름보다는 그래도 타인의 온기를 고맙게 느낄 수 있어서  겨울이 낫다고도 한다.

그러나 이 겨울, 우리는 다른 이의 차가운 살갗이 닿을라, 나의 온기가 샐라 바삐 외투를 꼭꼭 여민다. 그렇게 우리는 우리의 감각을 닫거나 마비시키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얼마 전에 아는 분에게 전화 한통을 받았다. 오랫동안 환경미화원을 하시다 정년퇴직한 분인데 자식들 출가시키고 살림 밑천에 보태느라 퇴직금 다 쓰고, 먹고 살길이 막막하던 차에 다행히 아파트 경비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단다. 그런데 어렵게 얻은 일자리를 며칠 만에 그만두었다는 것이다.

아파트 주민들의 민원이 문제였다.  그 분은 늘 허리를 굽혀서 거리청소며 쓰레기 치우는 일을 오래 해서 허리가 구부정하다. 주민들은 아파트 이미지 떨어지게 왜 꼽추 같은 사람을 경비로 채용했냐며 관리실에 항의를 했단다. 그 후로 그는 더 이상 일을 나가지 않았다. 

추워 문만 빼꼼 열고 집어든 신문에서 한 장의 사진을 보았다. 벌써 석 달 넘게 세찬 겨울바람 맞으며 지상 25m 철탑위에서 비닐천막을 치고 농성하는 최병승 씨와 천의봉 씨의 모습이다.

평택에서도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 한상균, 문기주, 복기성 씨가 철탑농성을 하고 있단다. 그리고 또 한분의 해고노동자가 자살을 했다고 한다.

대선이 끝나고 벌써 다섯 분의 노동자가 자살을 한 것이다. 이번에 자살한 윤주형씨는 3년간 자신의 복직을 위해 애쓰면서도,  철탑 농성까지 하고 있는 한진중공업·쌍용자동차 해고자들의 복직을 위해 씩씩하게 연대활동을 해 왔단다.

어쩌면 그들의 외침은 감각이 마비된 나르시스에게는 들리지 않던, 에코의 공허한 메아리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에코처럼 그들이 자살을 하고 있다. 

어쩌면 우리는 가슴 먹먹해지는 현실들 앞에서 모질게라도 살아야겠기에 보고도 못 본 척, 듣고도 못 들은 척하는 감각의 마비상태로 사는지도 모르겠다.

그 감각의 마비 덕에 우리는 도마뱀과 게가 자신의 꼬리와 다리를 떼어 내고 도망치듯,  곱사등이와 해고된 노동자를 아픈 줄 모르게 자기절단하며 살아갈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 꼬리자리기의 방법으로 우리는 현실을 망각하거나 외면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사자에게 쫓기는 타조가 모래 속에 고개를 쳐 박듯, 현실은 안보면 없는 것이라 믿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공감과 측은지심은 인지상정이다. 동전 하나 넣어주지 않으면서도 구걸하는 사람의 곁을 지나칠 적엔 마음이 불편하다. 버스에서 아기 업은 엄마에게 자리하나 양보하고도 마음이 뿌듯하다. 성폭행범에게 치유될 수 없는 상처를 받은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분노한다.

현실을 보고, 듣고, 느끼는 살아 있는 감각은 그렇게 우리를 불편하게도, 뿌듯하게도, 분노하게도 한다. 공감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나 아렌트는 공감을 인간성의 핵심으로 보았다.

그러나 지금 우리에게 공감과 측은지심은 거추장스러운 것이 되어 버린듯하다. 대신 자신의 이익을 저울질 하는 합리성이라는 우상을 만든다.

산다는 것, 무척이나 힘든 일이다. 우리 서로를 위로해야 하는 까닭이다. 자신의 삶의 터전에서, 일터에서 희미한 온기일지언정 서로 나누고 위로하려는 사람들이 있어 봄은 올 것이다. 그때면 우상도 녹아내릴 것이다.

따뜻한 햇살 아래 얼어붙은 감각이 다시 돌아왔을 때, 떼어져 나간 것들의 부재를 그제야 느끼고 우리는, 얼마나 안타까워하며 얼마나 괴로워하며 또 얼마나 미안해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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