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함께 돌자 서울 한바퀴 (16) 이태원·삼각지
다함께 돌자 서울 한바퀴 (16) 이태원·삼각지
  • 이인우 기자
  • 승인 2013.02.02 11: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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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지대 용산… 미군기지와 이태원, 삼각지 돌아 부는 재개발 바람
▲ [포털 다음 지도 갈무리]

한강로는 쉽게 지나칠 길이 아니다. 한강대교 북단에서 서울역까지 이어진 왕복 10차선의 대로. 지금은 옛 입체교차로를 철거한 삼각지로터리를 거쳐야 한다.

한강대교는 6·25 전쟁 초기 피난민들이 채 건너기도 전 육군 공병단이 폭파, 수많은 양민이 희생된 곳이다. 이후 1961년 5월 16일 당시 제2군사령부 부사령관이었던 박정희 소장과 육사 3~5기생 일부가 3500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한강대교를 건너 서울로 진주, 군사 쿠테타를 일으켰다.

한강대로 중간쯤 있는 삼각지 동쪽은 임진왜란 이후 줄곧 외세의 땅이었다. 이 곳은 임진왜란 당시 왜군의 병참기지로, 병자호란이 진행 중일 때는 청나라 군사의 주둔지로, 임오군란 후에는 다시 일본군 주둔지로 쓰였다.

또 1953년 6·25 전쟁 휴전협정 이후부터 지금까지 미8군 사령부가 주둔하고 있는 미국 영토다. 미8군 사령부는 오는 2016년까지 평택으로 주둔지를 옮긴다. 서울시는 그 뒤에야 용산을 시유지로 돌려받게 된다. 미군기지 이전에 드는 비용 30~40억 달러 가운데 약 30억 달러(3조5000억 원)는 우리 정부가 부담해야 한다.

○특권층의 비표, 미군기지 출입증

▲ 미 8군 존슨 사령관과 추모사업회 관계자들이 지난 2011년 12월 용산구 용산미군기지내 월튼 해리스 워커장군 추모동상 앞에서 고 월튼 해리스 워커장군 61주기 추모행사를 열고 있다. 워커 장군은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주한 미8군 초대 사령관으로 낙동강 전선을 지켰으나 그해 12월 서울 북방전선에서 불의의 자동차 사고로 사망, 워커힐이라는 지명을 남겼다.
지난 2011년 9월 주한미군사령부가 한국인 용산기지 등 국내 미군기지의 출입증을 불법 거래한 한국 군문원의 혐의를 포착해 수사에 나섰다.

당시 일부 군무원은 외부인에게 미군기지 출입증을 발급해 주고 장당 수십만∼수백만원 의 금품을 받았다고 한다. 미군기지 출입증은 한때 우리 사회의 특권층을 상징하는 ‘비표’ 역할을 했다. 그런 관행이 2011년까지 이어져 온 셈이다.

아직도 고급 승용차 앞 유리에 미군 출입증을 버젓이 붙인 차량을 볼 수 있다. 출입증을 가진 시민은 동반자를 데리고 미군기지 영내로 들어갈 수 있다. 이같은 출입을 특권처럼 여기는 시민들도 적지 않다.

미군기지에 들어갔다고 특별한 혜택을 가진 것도 아니다. 용산 미8군 사령부 안에 있는 ‘Dragon Hill Lodge Hotel’의 스테이크 하우스에서 바다가재 요리를 사 먹든가, 주기적으로 미군이 벌이는 행사에 참석하는 게 전부다.

한때는 지금 용산가족공원 자리에 있던 미8군 골프장 회원권을 얻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이기도 했다. 이른바 서울의 돈 많고 ‘백’ 있는 이른바 ‘주류계층’이 저질러온 일이다.

지난 2008년 미8군 사령부를 하와이로 옮긴다는 얘기가 나오기도 했다. 이런 소문은 이듬해 없었던 일이 되고 말았지만 당시 국내 보수층은 미군철수 절대반대를 내세우며 크게 반발했다. 이들은 미군 주둔과 자신들이 누리는 기득권을 동일시하는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미8군은 태평양전쟁 당시 창설, 1945년 일본 항복으로 무혈입성 한 뒤 6·25 발발과 함께 낙동강 전선에 투입돼 한국에 주둔하게 됐다. 당시 첫 전투에 나선 스미스 중대는 인민군에게 크게 패했으나 워커 사령관의 지휘로 낙동강 전선을 지켰다.

워커 사령관은 서울 수복 후 현재 쉐라톤 워커힐 호텔 인근에서 자동차 사고로 순직했다. 워커힐이라는 지명도 그에게서 딴 것이다. 용산 미군기지 영내에는 고 워커힐 장군의 동상을 새워 매년 추도식을 올린다.

미8은 한 때 3개 군단을 예하에 두기도 했했으나 1960년대 제1군단의 2보병사단과 7보병사단만 남았고 현재는 2사단과 지원부대만 소속돼 있다.

2사단은 이름만 사단일 뿐 군단급 병력과 장비를 운용 중이며 일부 병력은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지역에 순환 배치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미8군 사령관은 전시 일본에 기지를 둔 제7함대와 경기도 오산기지에 주둔 중인 제7공군의 지휘권을 행사한다.

○외세 침탈의 상흔 얼룩진 아른 기억

▲ 용산 공업지대.(1900년대)
이른바 불금(불타는 금요일)이나 주말 이태원 거리를 찾는 젊은이들은 이 지역의 역사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또 설사 알더라도 그리 아름다운 역사는 아니기에 즐거움을 위한 나들이에 방해만 될 뿐이다. 이태원(梨泰院)은 조선 효종 때 배밭이 많은 동네라는 뜻으로 붙인 이름이다.

▲ 용산철도공장.(1900년대) 용산역이 개통되면서 개발이 시작됐다. 일본군 군사사령부가 주둔하면서 영등포와 함께 서울의 대표적인 공업지대였다.
하지만 또 다른 뜻도 있다. 임진왜란 당시 용산 미8군 자리를 왜군 병참기지로 쓴 뒤 조선에 귀화한 왜인들이 몰려 살랐다는 설도 있고 왜군에게 몸을 뺏긴 부녀자와 아이들이 살도록 했다는 설도 있다.

이들 왜군의 자식들이 사는 곳이란 뜻의 이태원(異胎園)과 의도하지 않은 자식이란 의미로 쓴 잉태원(孕胎院)의 음이 바뀌었다는 설도 있다. 모두 외세로부터 침탈 당한 민족의 아픈 역사를 담고 있다.

본래 이태원은 공무수행을 위해 여행 중인 관헌의 편의를 위해 설치한 숙소인 한양 4원(보제원·절관원·홍제원·이태원) 중 하나였다.

▲ 한남대교로 이어지는 한남동 일대. (1973년)
이태원은 과천에서 동작진과 서빙고를 거쳐 남대문으로 향하는 영남대로를 따라 한양에 올라온 관헌이 도성에 들어가기 전 하룻밤 쉬어가곤 했다.

당시 위치는 현재 용산중고등학교 자리(미8군 뒤 용산동2가)였으나 서울시의 도시계획에 따라 이태원로를 개통하면서 해밀턴호텔 인근을 이태원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이태원 상권이 발달한 것은 용산에 미군이 주둔하면서부터였다. 1950년대 미군을 상대로 한 구멍가게와 주점, ‘양공주’를 둔 윤락가 등이 ‘기지촌’을 형성, 이태원이 알려지게 됐다.

이후 1960~70년대 외국 공관과 외국인 거주촌이 자리잡으면서 생활용품과 잡화류를 취급하는 상점이 늘게 됐다. 당시 이태원은 누구에게나 동경의 대상이었던 미제 상품을 쉽게 구할 수 있는 곳으로 떠올랐다.

당시는 거지들도 미제 깡통을 구하려고 애쓰던 때였다. 불과 40여 년 전 일이다.

○일탈 꿈꾸는 젊은이의 해방구 이태원

▲ 지하철 6호선 이태원역 앞의 남성복 매장에서는 일반 옷가게에서 구하기 어려운 특대 사이즈 상품으로 외국인은 물론, 일부 시민들에게도 인기를 끌고 있다.
지난 1990년대 초까지만 해도 이태원의 풍경은 지금과 사뭇 달랐다. 당시 이태원에는 농도 짙은 라이브쇼를 진행하는 나이트클럽이 적지 않았고, 일부 외국인 클럽에는 한국인 출입을 막기도 했다.

새벽녘이면 나이트클럽과 골목골목의 술집에서 나온 시민들이 택시를 잡느라 뛰어다녀야 했다. 또 한 쪽에서는 대부분 미군 병사인 외국인과 몸싸움을 벌이는 일도 종종 벌어졌다.

이태원은 지난 20여 년 동안 크게 변했다. 90년대까지 남았던 GI문화의 잔재는 어느 정도 퇴색했고, 대신 유럽, 이슬람권과 라틴아메리카, 동남아시아 문화가 뒤섞인다.

▲ 지난해 10월 13일 서울 용산구 이태원일대에서 '2012 지구촌 축제' 퍼레이드가 펼쳐지고 있다.
여러 문화가 들어오면서 이태원은 관용의 거리로 바뀐다. 서울의 다른 거리에서는 많은 시민들이 배척하는 성적 소수자 전용 클럽이 있고 이들 클럽에는 이성애자들도 거리낌 없이 들어갈 수 있다.

이태원의 밤거리는 일탈을 꿈꾸는 젊은이들의 해방구가 되기도 한다. 이태원의 중심 축은 해밀턴호텔에서 동쪽 끝자락인 삼성리움미술관까지 이어지는 왕복4차선 도로다.

이 거리를 중심으로 해밀턴호텔 뒤쪽 골목과 골목들, 그리고 반대편 이태원1동 주민센터를 끼고 캐피털호텔 쪽으로 이어진 골목, 반대편 한남동 주민센터로 가는 골목 등이 이어진다.

2000년대로 들어서면서 이태원은 세계 각국의 전문음식점이 앞다퉈 문을 여는 음식의 거리로 탈바꿈했다. 해밀턴 호텔을 중심으로 들어선 프랑스 가정식 전문 레스토랑 ‘르 셍떽스’와 ‘라 씨갈 몽마르트’, 피자와 파스타로 인기를 얻었던 ‘라타볼라’ 등이 유명했다.

○돌아가는 삼각지 정취 지키는 서민들

▲ 1967년 4억512만 원의 공사비를 투입한 폭 7.5-15m, 총 연장 1085m의 삼각지 4방향 입체교차도로 모습. 고가차도가 완공될 무렵 발표한 배호의 '돌아가는 삼각지'는 지금도 널리 부르는 국민 애창곡이다.
삼각지는 1904년 일제가 놓은 경부선 철도와 한강로 사이에 삼각형의 지형이 만들어지면서 붙은 이름이다.   과거 자동차로 한강로를 따라갈 때는 삼각지 입체교차로와 만났다. 당시는 대부분의 자동차가 흔히 ‘스틱’이라 부르는 수동변속장치였다.

삼각지 입체교차로 오르막에서 정체를 빚으면 몇 번이고 정지했다 다시 출발해야 했기에 운전자들이 짜증을 내곤 했다. 삼각지 입체교차로는 1967년 완공돼 27년 동안 자리를 지키다 1994년 철거됐다. 삼각지 입체교차로는 사라졌지만 배호의 ‘돌아가는 삼각지’는 아직 전통가요의 명곡으로 남아있다.

미8군 사령부가 축소되면서 과거 육군본부 자리에도 전쟁기념관이 들어섰고 용산 재개발로 이근에 고층 주상복합이 들어서고 있지만 삼각지로터리는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삼각지는 오래된 동네인 만큼 오래된 식당도 많다. 삼각지로터리 서울역 방향 오른쪽의 ‘명화원’도 오래된 화상(華商) 중국음식점이다.

▲ 삼각지 로터리에 있는 명화원은 예나 지금이나 달라진 점 하나 없는 70년대식 중국음식점이다. 2대째 내려오는 노포로 탕수육과 군만두 맛이 일품이지만 오래 전부터 드나들던 손님들은 1대 사장의 맛을 따라가지 못한다고 불평한다. 냉장고에 주문을 받아 적는 등 위생에 대한 지적도 10여 년이 넘도록 계속되지만 손님은 줄지 않는 기현상을 보인다.
‘명화원’을 찾는 사람들은 아직 그 자리에 남아있다는 사실에 놀라고 10년 전이나 20년 전 모습 그대로인 점에 또 한 번 놀란다. 1대 사장 당시 ‘명화원’은 서울에서 가장 맛있는 탕수육을 내는 집으로 유명했다.

지금 2대 사장의 솜씨도 웬만한 집보다 훨씬 좋지만 옛날부터 찾았던 나이 많은 손님들은 불평을 늘어놓는다. ‘명화원’은 70년대와 똑같은 지저분한 테이블과 의자, 홀에 내놓은 냉장고에 수성 매직으로 주문을 받아 적는 무신경한 서비스에도 불구하고 저녁마다 30~40분 줄을 서야 입장할 수 있다.

삼각지 안쪽 골목에는 ‘옛집’이라는 국수집이 있다. 몇 년 전 행색이 남루한 중년 남자가 국수를 먹은 뒤 돈을 내지 않고 급히 달아났다. 그 뒤를 쫓아 나온 옛집 주인 할머니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뛰어가지 마! 뛰다가 넘어지면 다쳐요!”
달아났던 남자는 몇 년 후 다시 국수집을 찾았다. 그는 당시 할머니의 다급한 외침을 듣고 절망에서 벗어나 파라과이로 건너가 큰돈을 벌었다며 감사했다.

몇 년 전 라디오와 신문에  소개된 사연이다. ‘옛집’에서는 지금도 잔치국수와 비빔국수, 김밥 등으로 가난한 시민들의 허기를 달랜다.

○GI문화 빈자리 채우는 제3세계 물결

▲ 이태원역 3번 출구 이태원119안전센터 뒤편에 있는 한국이스람중앙회는 국내 최초이자 최대의 이슬람사원이다. 이국적인 풍경에 끌린 아마추어 사진동호회의 단골 출사지로 꼽힌다.
이태원의 음식점은 불과 몇 년 사이에 크게 늘어 이제 한적한 뒷골목까지 영역을 넓히고 있다. 특히 해밀턴호텔 맞은편에 있는 한국이슬람중앙회 사원의 영향으로 서울 어느 지역보다 많은 이슬람문화권의 레스토랑이 들어섰다.

이태원에 이슬람 식당이 몰려 있는 곳은 해밀턴호텔에서 제일기획이 있는 곳까지다.
특히 이태원 소방서 뒷길, 즉 이슬람사원으로 가는 언덕길에 들어서면 분위기는 완전히 이슬람풍으로 바뀐다. 평택 이전을 앞둔 미8군이 주도하던 미국 스타일 대신 이슬람 스타일이 자리잡고 있다.

이러한 이슬람풍은 이미 국제화된 도시인 서울 젊은이들의 ‘이그조틱(exotic)’ 취향을 자극한다. 또 2000년대로 접어들면서 급속히 성장한 외식(外食) 풍조와 문화의 다양성을 수용하는 태도의 확산도 이태원의 식당가를 풍요롭게 하고 있다.

이태원의 식당가는 이제 육군중앙경리단에서 남산순화로까지 올라가는 경리단길로 범위를 넓혔다. 경리단길은 당초 까사JJ 등 몇 개의 레스토랑만 있었지만 지금은 20여개 이상으로 늘어나 신사동 가로수길 못지 않은 데이트 명소로 찾는 이들이 늘고 있다.

최근 이태원의 명물은 서울의 다른 곳에서 찾을 수 없는 엔틱가구 거리다. 이태원1동 주민센터를 끼고 용산구청 쪽으로 가는 길은 이태원 가구거리다. 유럽 등에서 직수입한 중고가구를 취급하는 가게만 100여 개에 달한다.

이들 중고가구 거리에는 가정 인테리어를 위해 찾는 시민뿐만 아니라 레스토랑이나 술집 등을 개설하는 사업자들의 왕래가 잦다.

만약 새로 문을 연 레스토랑에서 유럽으로부터 중고 가구를 직수입했다고 얘기한다면 십중팔구 이태원 엔틱가구 거리를 거쳤다고 보면 된다.

○하늘 높은 줄 모르던 재개발 바람 어디로

▲ LS용산타워는 1986년 전두환 정권에 밉보여 사실상 해체된 옛 국제그룹이 세운 용산의 랜트마크였다. 지금은 국제상사의 프로스펙스 등 많은 브랜드를 흡수한 LS네트웍스 소유로 적지 않은 임대수익을 올리고 있다.
삼각지로터리에서 한강대교 쪽으로 가다보면 지하철4호선 신용산역이다. 여기서 오른쪽으로 꺾으면 호남·전라선 시발역인 용산역, 왼쪽은 거대한 LS용산타워가 시야를 가로막는다. LS용산타워는 5공 정권의 비리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상징이기도 하다.

LS용산타워는 부산에 뿌리를 둔 국제상사(회장 양정모)가 세워 국제빌딩으로 알려졌으나 1986년 전두환 정권에 밉보여 그룹이 해체되고 말았다.

당시 국제상사는 전두환 정권에 다른 대기업보다 훨씬 적은 약속어음 10억 원과 현금 3억 원을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국제빌딩은 한일그룹이 인수했으나 1998년 그룹 부도에 따라 2002년 이랜드 손으로, 다시 2006년 LS네트웍스의 전신인 E1에 매각됐다.

LS용산타워 바로 옆은 지난 2009년 1월 20일 새벽 용산참사가 벌어졌던 남일당 건물터다. 당시 재개발 보상을 요구하며 남일당 옥상에서 농성하던 상인, 전국철거대책연합회 관계자, 경찰특공대 등 6명을 희생시킨 자리는 3년이 지난 지금까지 공터로 남아있다.

청와대는 29일 용산참사 관계자 5명을 포함한 특사를 강행했으나 최시중, 천신일 등 측근 사면을 위한 구색 맞추기라는 비난이 일고 있다. 또 용산참사 관계자 특사는 환영할만한 일이지만 용산재개발에 따라 쫓겨난 시민들에 대한 대책은 나오지 않고 있다.

용산참사는 용산구청장 등 재개발 관할 당국이 농성 중인 시민을 어떤 방법으로 몰아내도 좋다고 허락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용산은 이같은 재개발 강행을 바탕으로 최근 서울에서 가장 빠른 변화를 이루고 있다. 불과 몇 년 사이에 고층 주상복합이 용산구의 스카이라인을 바꿨고 강남3구 못지 않은 보수적 정치성향을 가진 지역으로 꼽히게 됐다.

▲ ‘용산역세권국제업무지구개발사업 조감도.
용산재개발은 하지만 제대로 진행되지 않고 있다. 단군 이래 최대 사업이라는 용산국제업무지구 개발사업의 개발이익을 둘러싸고 자산관리위탁회사(AMC)인 용산역세권개발(주)와 토지주 코레일, 시행사 롯데관광개발의 충돌 때문이다.

이같은 거대 자본끼리의 충돌 와중에 개발계획으로 재산권 행사가 묶인 서부이촌동 주민들은 몇 년째 어려움을 겪고 있다. 서부이촌동 주민들은 이주 보상비 문제도 매듭짓지 못한 상태에서 부동산 매매까지 중지돼 마음대로 이사조차 할 수 없는 상태다.

최근 용산국제업무지구 개발사업은 3000여억 원의 자산담보부기업어음(ABCP) 발행을 추진하는 등 부도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 쓰고 있다.

하지만 ABCP 발행도 단기처방에 불과하다. 사업 시행자인 드림허브프로젝트금융투자㈜의 최대 주주인 코레일 측은 “민간출자사들이 우선 2500억 원어치의 CB를 발행해 투자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하는 등 롯데관광개발을 압박하고 있다. 

용산국제업무지구 개발사업이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아니라 개발이익을 노린 탐욕의 파국으로 전락할 위기를 맞고 있다.

용산참사 희생자들의 운구행렬

▲ 2010년 1월 '용산참사' 철거민 희생자들의 범국민장 영결식을 마치고 서울역 광장에서 노제가 열리는 서울 용산 남일당 건물로 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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