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함께 돌자 서울 한바퀴(17) 용산 ②
다함께 돌자 서울 한바퀴(17) 용산 ②
  • 이인우 기자
  • 승인 2013.02.08 12: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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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개발에 초연한 40년 된 아파트단지… 동부이촌동과 국립중앙박물관, 노들섬
     
 
▲ [포털 네이버 지도 갈무리]

용산구의 남측, 한강을 끼고 있는 동부이촌동은 서울의 부촌으로 꼽힌다. 1970년대 본격화한 개발의 첫 삽을 뜬 곳이기도 하다.

이곳은 60년대까지 한강에서 가장 넓은 백사장이 깔렸던 여름철 서울시민들의 휴식처였다. 백사장의 모래는 동부이촌동 한강맨션아파트단지 조성에 쏟아 부었다. 지금 동부이촌동 주민들은 옛날 한강의 금모래 위에서 사는 셈이다.

동부이촌동은 용산의 북쪽 이태원과 다른 색깔의 이방인촌이다. 이태원이 미군을 중심으로 한 GI문화로 시작해 아랍과 아프리카 등 제3세계 문화를 받아들이고 있는 반면 동부이촌동은 ‘리틀 도쿄’로 알려진 일본문화의 거리다.

하지만 일본에 생긴 막걸리나 삼겹살집보다 몇 배나 많은 일본식 주점과 초밥집, 우동집에 들어서는 요즘 동부이촌동의 일본풍은 그리 두드러지지 않는다.

단지 생긴지 벌써 10년이 넘은 일본식품 전문점이나 일본인이 운영하는 우동집 등에서 동부이촌동의 색다른 정체성을 엿볼 수 있다.

용산의 남쪽 끝, 동부이촌동을 중심으로 한 강변 마을은 조용한 부촌이자 그만큼 보수적인 곳이다.

○일본인 1200명 몰려 사는 ‘리틀 도쿄’

▲ 1970년 우리나라 최초의 전면 입식 아파트로 세워진 한강맨션은 당시 서울의 최상류층이 입주한 부촌이있다. 지금도 한강맨션에는 전직 장차관급 관료 출신이 주류를 이뤄 서울에서 가장 '입김이 센' 아파트 단지로 꼽힌다.
오는 22일 용산구 동부이촌동 한강맨션아파트 옆 한강쇼핑센터에 있는 ‘이촌글로벌빌리지센터’에서 외국인 벼룩시장이 열린다.

동부이촌동에 모여 사는 일본인 1200여 명을 위한 벼룩시장이다. 평범한 아파트촌으로 보이는 동부이촌동은 오래 전부터 일본인들이 하나 둘 모여 일본 마을로 자리 잡았다.

▲ 지난 2001년 동부이촌동에 직영점을 개설한 모노마트는 1200여종의 일본 식품을 온·오프라인 매장에서 판매하는 전문점이다.
일부 시민은 과장을 보태 동부이촌동을 ‘서울 속의 도쿄’, ‘리틀 도쿄’, 또는 ‘여권 없이 갈 수 있는 일본’이라고 한다.

이 마을의 일본인들은 대부분 서울주재 일본 상사원이거나 대사관 직원들이다. 생활수준과 교육 수준이 높은 엘리트층이다. 동부이촌동에 70년대 서울 최초의 고급아파트촌이 세워진 때와 한일경제협력을 앞세운 일본 기업의 진출이 맞아떨어졌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 일본인들이 모여 사는 동부이촌동은 70년대부터 일식 음식점이 많았다. 사진은 동부이촌동의 일본 가정식 요리 전문점 미타니아의 가키아게동 메뉴.
과거 일제 강점기 이전부터 용산은 일본인 집단주거지역으로 자리 잡았지만 동부이촌동과는 거리가 멀다.
동부이촌동 한강맨션에서 성장했던 노정연(40·여) 씨는 “어렸을 때부터 일본인 주재원들이 많아 어디서나 일본어를 들었다며”“대학에서 일본어를 공부한 것도 당시의 영향이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일본인이 많은 만큼 거리 곳곳에 일본풍 음식점과 찻집, 술집이 들어서 있다. 이런 음식점과 술집에서 각자 먹은 음식 값 등을 모아 계산하는 풍경도 낯설지 않다.

동부이촌동 삼익쇼핑센터 지하에는 ‘미타니아’라는 오래된 일본식 우동 전문점이 있다. 일본인이 운영하는 이곳은 90년대까지 일본 본토의 맛과 가장 가까운 메뉴를 맛볼 수 있는 곳으로 유명했다.

최근 일본에서 제면기를 직접 수입하거나 현지에서 일식 수련을 마치고 도쿄 츠키지 어시장 등에서 직접 재료를 수입하는 전문점이 많아졌어도 미타니아는 서울의 대표적인 일식 노포라는데 이견이 없다.

2001년 문을 연 국내 최초의 일본 식재료 소매점인 ‘모노마트’도 일본인 마을 동부이촌동을 대표한다. ‘모노마트’는 시민들의 입맛이 ‘글로벌화’하면서 서래마을과 목동, 잠실, 도곡동, 분당, 일산지점까지 영역을 넓히고 있다.

○1가구 자동차 3대 굴려도 주차장 넉넉… 동부이촌동은 서울의 ‘부촌’

▲ 석양에 물든 동부 이촌동 아파트 단지. 한강 가운데 있는 섬이 노들섬이다.
동부이촌동은 서울의 ‘부촌’ 중 한 곳으로 꼽힌다. 하지만 강남의 대치동이나 도곡동, 청담동과는 분위기가 전혀 다르다. 또 재벌 총수들이 또아리 튼 한남동과 성북동 등과도 차별화 된다.

동부이촌동은 매우 조용하다. 일본인들이 많이 살아서일까?. 그들의 ‘혼네(本音·속마음)’나 다테마에(立前·속 마음을 숨긴 상대방에 대한 배려)를 닮았다. 그렇다고 동부이촌동에 사는 한국인들까지 일본인과 닮았다는 얘기는 아니다.

▲ 동부이촌동은 조금 과장해서 여권 없이 갈 수 있는 서울의 동경이라고 한다. 그만큼 일본 색이 강한 동네다.
그보다는 이 지역을 대표하는 한강맨션아파트 주민들의 성향 때문으로 보인다.
한강맨션아파트는 대한주택공사가 해외 아파트 사례를 모아 착공, 1971년 입주를 시작한 우리나라 최초의 고급 아파트단지다.

▲ 1966년 동부이촌동 백사장에서 물놀이를 즐기는 시민들의 모습. 뒤쪽 한강대교 위에도 시민들의 행렬이 가득하다.
당시로서는 천문학적인 29억7200만 원을 투입해 공급면적 89㎡(27평), 105㎡(32평), 122㎡(37평), 168㎡(51평), 188㎡(57평) 등 24개동(관리동 포함), 총 660가구의 단지를 조성했다. 한강맨션은 워낙 단지가 큰데다 와우아파트 붕괴 사고 등으로 아파트의 이미지가 좋지 않아 초기 분양은 어려웠으나 이후 전현직 관료층을 중심으로 속속 입주하게 된다.

▲ 서울의 역사 사진 중 1959년 한강 동부이촌동 수해 현장.
지금도 한강맨션에는 이름만 대면 다 아는 중량급 관료 출신과 대학교수 등이 적지 않다. 워낙 부지가 넓은데다 70년대식 저층 아파트로 1가구에서 3대의 차량을 가지더라도 주차공간이 남아도는 서울의 주차해방구이기도 하다. 

아파트 입주민 구성분포 등의 영향 때문인지 한강맨션은 주위의 재개발 논란에도 크게 휩쓸리지 않는다. 또 홍수기 단골 침수지에 세운 한강맨션은 지금은 구하기 힘든 양질의의 골재로 광활한 택지를 조성, 재개발시 터파기 공사만 해도 골재 판매에 따른 이윤이 상당할 거란 얘기도 있다.

따라서 시공사가 일반적인 재개발 건축비를 제시할 경우 입주민들이 절대 수용하지 않을 것이란 전망까지 나온다.

한강맨션 건너편에 들어선 새 아파트단지에는 유명 연예인 입주민이 적지 않다. 이들은 평상복 차림으로 인근 상가로 나와 쇼핑을 하는 등 주민들과 비교적 잘 섞여 생활한다.

서울의 다른 지역에서처럼 짙은 선글라스나 마스크를 쓰지 않아도 귀찮게 하지 않는다. 대중문화에 휘둘리지 않는 동부이촌동 특유의 ‘쿨’한 정서가 이곳에 사는 연예인들에게는 큰 이점이 되는 셈이다.

○국보급 문화재 공짜 구경에 공짜 해설까지

▲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로비에 원각사지10층 석탑 복원품을 세워 놓았다.
이촌역 2번 출구를 나오면 중앙국립박물관으로 들어가는 길과 이어진다. 서울시민 중 국립중앙박물관을 가본 이는 얼마나 될까.

많은 시민들이 박물관은 학창시절 수업 빼먹고 견학 가는 곳으로만 생각한다. 날씨 좋은 날 가벼운 마음으로 찾아가면 되는 일이 멀게만 느껴진다.

그렇기에 하루쯤 마음 고쳐먹고 박물관 나들이를 해보는 것도 좋다. 한 번 찾았던 박물관이 너무 좋아 열 번, 스무 번 씩 박물관을 들락거리는 시민도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은 무료다. 그냥 들어가면 된다. 거기다 오전 10시 30분과 11시 30분, 오후 2시 30분과 3시 30분에 맞춰 상설전시관 앞에 서 있으면 전문 해설가가 나온다.

전문 해설사는 박물관의 주요 전시 유물을 콕 짚어 상세히 설명해준다. 전관 해설이다.
해설에 나온 유물이 있는 전시관에 가면 또 해설을 들을 수 있다. 혼자 전시물을 훑어보면 절대 알 수 없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끊임없이 나온다. 이 모든 게 공짜다.

국립중앙박물관은 동관과 서관으로 나뉜다. 각 전시관은 또 지하 1층, 지상 6층에 크게 3개 구역으로 나누어져 있다. 길이 404m, 최고 높이 43.08m의 규모다. 물론 하루에 다 돌아볼 수 없다. 전체를 다 꼼꼼히 보려면 일주일, 보름, 한 달까지 걸린다.

박물관 안에는 어린이박물관과 기획전시관이 별도로 있고 극장, 교육관, 전통염료식물원, 거울못, 석조물 정원 등 부대시설도 많다. 관람하다 지치면 쉴 수 있는 휴게공간도 많고 레스토랑과 푸드코트, 한식당, 만남의 집 등 편의 시설도 갖춰놓았다. 커피전문점만 해도 청자와 백자 등 두 곳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의 역사만 돌아보아도 단순하지 않다. 1909년 대한제국이 창경궁에 왕조 제실박물관을 개관했으나 1910년 한일합방에 따라 조선총독부 박물관으로 바뀐다.

이후 1945년 광복과 함께 국립박물관으로 개칭했고 남산분관 시절을 거쳐 1955년부터 1972년까지 덕수궁 석조전을 박물관으로 이용했다. 1972년 박정희 정부가 경복궁에 현 국립민속박물관을 짓고 국립중앙박물관으로 명칭을 바꾸면서 이전했다.

당시 지은 국립민속박물관은 조선 궁궐 양식과 맞지 않는데다 경복궁 전체의 조경을 망가트린 개발독재시대의 유물이란 지적을 받고 있다.

1986년 정부청사로 쓰이던 광화문 앞 옛 조선총독부 건물(옛 중앙청)을 고쳐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이용했으나 1996년 중앙청 해체와 함께 현 국립고궁박물관으로 임시 이전했다가 2004년 지금의 자리로 영구 이전하게 됐다.

○트럭 소리 내던 디젤동차 사라졌어도

▲ 동부이촌동 이촌역은 용산역까지 가는 국철과 지하철 4호선이 지나면서 각각 다른 풍경을 드러낸다.
이촌역은 국철 지상역과 지하철4호선을 함께 이용할 수 있다. 관악구 쪽에서 청량리역으로 간다면 사당역에서 이촌역까지 지하철4호선을 타고 온 뒤 청량리까지 다니는 국철 지상선을 타는 게 빠르다.

이촌역을 지나는 국철은 청량리까지 가서 안동까지 가는 중앙선과 강원도 태백시를 지나 강릉까지 가는 태백선으로 환승할 수 있다.

지금은 깔끔하고 진동 적은 전철이 달리고 있지만 90년대까지만 해도 이촌역을 지나는 열차는 대형 트럭엔진 소리가 나는 디젤동차였다. 여름에는 냉방장치가 없어 창문을 모두 열고 달려야 했지만 제법 열차여행의 기분을 만끽할 수 있었다.

이제 이촌역을 지나는 디젤동차는 사라진지 오래지만 출퇴근 시간 이 역을 이용하는 시민은 적지 않다. 겨울이면 지하철과 달리 냉방이 되지 않는 플랫폼에 나가기 싫어 지하계단 중간쯤에서 기다리다 때맞춰 달려나가는 시민들의 종종걸음이 정겨워 보인다.

이촌역에서 내려 동부이촌동 쪽으로 나가는 길은 좁은 상가를 낀 골목이다. 동부이촌동 큰 길에 역 표지판이 없다면 어디쯤 이촌역이 있는지 찾기 힘들 정도다.이촌역의 북쪽은 최근 크게 변했다. 역 앞에 있던 미8군 골프장 자리에 국립중앙박물관이 들어서면서 바뀐 풍경이다. 또 이촌역 앞에서 한강로까지 가는 길 가에 들어선 초고층 주상복합빌딩 등이 용산의 스카이라인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

○한국 가톨릭 박해와 순교의 현장

▲ 조선시대는 연무장(鍊武場)으로 쓰면서 국사범 등 중죄인의 처형장으로도 사용했던 새남터에서 세운 천주교인 박해 기념성당.
용산전자상가에 원효대교 쪽으로 가다 용산철도차량기지를 끼고 왼쪽 이촌로를 따라 가면 새남터기념성당이 나온다.

▲ 1846년 병오박해 때 새남터 형장에서 순교한 김대건 신부상. 새남터 가톨릭성지 기념성당에 있다.
새남터는 조선시대 군사들의 연무장이었다. 때로는 국사범을 참수하는 형장으로 쓰기도 했다. 1456년(세조 2)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였던 성삼문 등 사육신이 처형된 곳이 새남터다.

또 1801년(순조 1)의 신유박해(辛酉迫害) 이후 서울의 많은 천주교도를 처형한 곳이다. 바로 이곳에서 조선 최초로 사제 서품을 받았던 김대건 신부가 처형됐고 중국인 주문모 신부, 최초로 한국에 들어왔던 앵베르 주교, ‘기해일기’를 쓴 현석문 등 사제 8명과 지도자급 평신자 8명 등 3명 등 11명이 순교했다.

이들 순교자들은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성인품을 받았다.새남터 성지는 1950년에 순교기념지로 지정됐고, 1956년에 ‘가톨릭 순교성지’ 라는 기념탑이 세워졌다.

현재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에서 관리, 운영하고 있으며, ‘복자학교’라는 교육 시설을 운영하다가 1981년에 한강본당으로부터 분가해 새남터기념성당이 됐다.

현재 새남터에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성 앵베르 주교, 성 모방 신부, 성 샤스탕 신부, 성 베르뇌 주교, 성 브르트니에르 신부, 성 볼리외 신부, 성 도리 신부, 성 우세영 알렉시오 등 아홉 사제의 유해가 모셔져 있다.

○온라인 상거래에 울고 웃는 용산전자상가

▲ 온라인 쇼핑 환경에 뒤쳐졌던 용산전자상가는 뒤늦게 웹 기반을 구축하는 등 1990년대의 영광을 되찾으려는 활발한 시도를 하고 있다.
용산전자상가는 용산역 북서쪽에 있다. 원래 서울의 대표적인 청과시장이 있던 자리다.
용산 청과시장 모습은 1960~70년대 흑백사진으로 볼 수 있다. 해마다 김장철이면 이 일대는 상인과 시민, 배추와 무를 나르는 트럭이며 달구지, 손수레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그런 시장이 정부 시책에 따라 1987년 전자상가로 조성됐다. 종로 세운상가에 밀집한 전자상가들이 대거 용산으로 건너왔다.

용산전자상가는 1990년대까지 컴퓨터부터 오디오 등 전자 관련 상품을 가장 싸게 구입할 수 있는 곳으로 알려졌다. 한 때 지방에서도 전자제품을 구하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몰렸으나 인터넷 상거래 등 유통환경이 바뀌면서 급속히 몰락하게 됐다.

손님들이 뜸해지면서 용산전자상가는 이른바 ‘바가지 상혼’의 중심지라는 오명을 쓰게 된다. IT 제품을 잘 모르던 시민을 현혹해 폭리를 취하는 상인들이 적지 않았고 지나친 호객도 상가 이미지에 먹칠을 했다. 이에 따라 10대 후반부터 20대 후반에 이르는 주요 고객층이 하나 둘 용산을 찾지 않게 됐다.

현재 용산전자상가는 웹을 활용한 마케팅 환경 구축에 뒤떨어졌다는 점을 자각하고 적극적인 상가 활성화 대책을 내놓고 있다. 한 때 상가의 신뢰도를 떨어트렸던 바가지 상혼을 근절하는 투명 거래 운동도 활발히 펼치고 있다.

많은 가게들이 인터넷 판매 비중을 높이면서 구입자는 인터넷으로 각 가게의 판매가를 직접 비교 해 본 뒤 구입할 수 있게 됨에 따라 호객 행위는 이제 찾아보기 어렵다. 용산구청은 지난해 9월 ‘전자상가를 살리자’는 이벤트를 대대적으로 벌이기도 했다.

용산전자상가는 원효상가, 전자랜드, 나진상가, 선인상가, 터미널 전자상가 등으로 나뉘어 있다. 이곳에서는 주말마다 재고품이나 중고품을 싼 값에 파는 벼룩시장이 열린다.

운이 좋으면 품질 좋은 제품을 반의 반값으로 ‘득템’할 수 있다. 하지만 품질보증이나 A/S 등이 되지 않고 가품도 많아 주의가 필요하다.

○봄바람 멀지 않은 노들강변 섬 하나

▲ 지난해 6월 서울 이촌동 노들섬 텃밭에서 시민들이 텃밭을 가꾸고 있다. (사진=서울시 제공)
▲ 지난 2010년 오세훈 전 시장이 발표한 한강예술섬을 조성 계획은 사실상 전면 취소됐다. 사진은 2014년까지 완공 목표로 제시한 한강예술섬 조감도.
노들강변 봄버들 휘휘 늘어진 가지에다가 / 무정세월 한허리 칭칭 동여 메여나볼가 / 에헤요 봄버들도 못믿으리로다 / 흐르는 저기 저물만 흘러 흘러서 가노라

1930년 만든 신 경기민요 ‘노들강변’의 가사다. 누구나 앞 두 마디 ‘노들강변 봄버들’까지는 흥얼거릴 수 있을 만큼 친숙하다.

민요에 나오는 노들강변은 동작구 노량진으로 추정된다. ‘노들’이라는 지명은 백로가 노니는 곳이란 뜻으로 백로 로(鷺)자를 붙인 것이다.

노들섬은 원래부터 있던 섬이 아니다. 1917년 한강대교를 만들 때 다리의 중간쯤에 있던 모래언덕에 둑을 쌓으면서 중지도(中之島)라고 불렀다고 한다.

하지만 이 섬도 이후 지금의 동부이촌동 앞에 있던 넓은 모래밭에 포함돼 사라진다. 그러다 1968년 한강종합개발과 한강맨션 건립에 따라 모래밭을 퍼 골재로 사용하게 됐고 한강 물길이 바뀌면서 한강다리 아래 다시 모래가 쌓여 섬이 생겼다.

오세훈 전 시장은 2010년 한강르네상스 사업의 하나로 노들섬에 호주 시드니 오페라극장과 같은 한강예술섬을 만든다며 조감도까지 제시했다.

당초 2014년까지 조성을 마치겠다는 계획이었으나 민지유치에 난항을 겪는 등 우여곡절 끝에 2011년 오 전 시장의 사퇴로 계획이 전면 취소됐다. ‘

박원순 시장은 오 전 시장과 반대로 노들섬에 생태텃밭을 조성, 서울시민들의 도시농업을 장려하고 있다. 박 시장은 당초 이촌지구에 생태텃밭을 조성할 계획이었으나 국토해양부가 국가공유지를 자치단체에서 임의로 사용할 수 없다며 반대, 노들섬으로 옮겼다.

노들섬은 한강대교 북단에서 갈 경우 우측인도를 따라 중간쯤에서 계단으로 내려가야 한다. 노량진 쪽에서는 지하철 9호선 노들역에서 한강대교 좌측 인도를 이용해야 한다. 자칫 반대편 인도를 따라갈 경우 중간 부분에서 되돌아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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