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혜영 시인의 Poem Essay
정혜영 시인의 Poem Essay
  • 정헤영 시인
  • 승인 2013.02.22 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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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숭동 퇴근길에서-박몽구

해질 무렵 낙산 하늘에 잿빛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
피곤한 어깨들을 매만지며 매만지며 옷깃을 추스리며
값싼 휴식을 찾아 술집으로 눈꽃을 털며 들어서기도 하고
날개도 없이 집으로 뿔뿔이 흩어져 가는 사람들
저 하늘이 먹빛으로 바뀌면
지친 사람들의 눈빛을 게슴츠레 빛나게 만드는
울긋불긋 벌거벗은 연극 포스터들도 빈 방들을 찾아 잦아들고
  “총은 더 이상 거짓말을 하지 말라”
서울대 의과대학에 나붙은 대자보도 슬쩍 입이 틀어막혀 버리는가
얼얼한 한파 앞에 사람들은 모두 입을 막고 귀를 덮고
눈마저 침묵의 땅에 묶은 채 사라지는데
문득 우리들의 하루가 이렇게 값싸게 막 내릴 수는 없다고
낙산 돌무더기를 헤치며 울어대는 참새 소리 쟁쟁하네
그 울음소리를 따라
찬 바람에 휘날리던 석간신문 한 장 눈물 흘리고 있네
구로구청에서 거짓 민의가 담긴 투표함을 끝까지 지키다가
옥상에서 떠밀려 반신불수가 된 한 젊은이
치료비를 낼 형편도 못 되고
친구들은 모두 학교로 돌아갈 채비를 서두를 시간에
병상에서 휠체어를 타지 못할 몸으로 쫓겨날지도 모른다는
안타까운 소식 하나 떠돌아 다니고 있다
사람들은 모두 손을 접는 시간에
참새들은 더욱 메마른 돌무더기를 헤쳐 새 목숨을 찾고
이대로 오늘 막을 내릴 수는 없다는 듯
낙산 쪽에서 잿빛 하늘을 뚫고
뭉클 붉은 노을이 타오른다

■ 박몽구(1956 ~ ) 시집 『철쭉꽃 연붉은 사랑』 실천문학사, 1990

■ 때로는 사람이 짐승보다 못할 때가 있다. 뉴스와 인터넷 매체의 인면수심의 이야기들, 새로운 소식이 더 이상 기쁘거나 새롭지 않다. 그래서일까. 퇴근 무렵 술집으로 몰려가는 사람들.  동숭동 낙산 하늘 밑에 서울대학교 캠퍼스와 마로니에 공원이 있었다. 그 하늘에 잿빛 그늘이 드리워 있다. 시의 배경은 삼십여 년 이전이지만 “총”만 뺀다면 그때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이 없는 것 같다. 여전히 삶은 시름겹고 사람들은 이웃의 안타까운 소식에도 무관심하다. 입을 막고 귀를 덮고 눈마저 침묵한다. 하지만 시인의 눈과 귀는 참새 소리 쟁쟁 듣고 석간신문의 눈물을 주시하고 있다.  잿빛 하늘을 뚫고 타오르는 붉은 노을 속에서 들려오는 참새소리가 투쟁투쟁으로  들리는 것은 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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