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함께 돌자 서울 한바퀴 (21) 성동구
다함께 돌자 서울 한바퀴 (21) 성동구
  • 이인우 기자
  • 승인 2013.03.08 16:5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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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에 밀려 사라진 남루(襤樓)의 추억… ‘서울숲’ 굽어보는 부(富)의 꿈은 멈칫하고
▲ [포털 다음 지도 갈무리]

앞으로 보름 정도만 지나면 개나리가 노란 꽃망울을 터트린다. 서울에서 가장 돋보이는 개나리는 성동구에 있다. 중랑천이 휘돌아 한강으로 흐르는 옥수동 응봉산(171m) 비탈에 피는 개나리다.

▲ 한양대학교와 중량천 건너 성동구 일대 모습.(1976.7)
급한 경사에 너덜바위가 가득한 응봉산의 사면은 다른 나무가 뿌리 내리지 못한다. 질긴 생명력을 가진 개나리만 해마다 봄이면 갖 부화한 병아리 빛깔로 물든다. 개나리가 지면 다시 진달래가 그 뒤를 잇는다. 멀리 올림픽대로에서 보아도 좋지만 강변북로에서 보면 봄의 아찔함이 더하다.

하지만 대부분의 시민들은 매년 화사한 개나리와 진달래를 보면서도 정작 산 이름은 모른다. 매봉산이라고도 부르는 응봉산은 산 모양이 매 같아 이름 붙였다는 설과 조선시대 왕들의 매 사냥터였다는 설도 있다. 당시 매봉이라 부르다 한자 매 응(鷹)을 붙였다는 설이다.

응봉산은 서울 말고도 멀리 강원도 울진과 삼척에 걸쳐진 큰 산도 있다. 강원도 응봉산(999m)은 울진 쪽으로 덕구온천, 삼척쪽으로는 용소골을 끼고 있다. 서울의 응봉산은 그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간결하면서도 오뚝한 산세와 정상인 달맞이봉에서의 조망은 전국 어떤 산에도 뒤처지지 않는다.

응봉산 아래는 용산에서 출발, 서빙고와 동빙고를 거쳐온 국철 중앙선 열차가 한강변 유엔빌리지 앞을 지나 중랑천 쪽으로 휘돌아 들어간다. 산과 강, 그리고 철도… 응봉산은 서울의 또 다른 정취를 가득 품고 있다.

○국방색 제복 행렬 가득하던 마장동터미널

▲ 경기도 북동부와 강원도 철원 지역에서 복무했던 예비역들의 애환이 서려있는 마장동터미널의 1980년대 모습. 마장동터미널은 1989년 지금의 동서울터미널과 중랑구 상봉터미널로 분산, 이전했다.
응봉산은 강변북로를 달리는 시민들에게 가깝지만 먼 산이다. 성동구에는 물리적 거리가 아닌, 지나간 시간 따라 멀어진 곳이 유난히 많다. 마장동과 왕십리는 이제 옛 모습은 찾을 수 없다.

마장동은 1970~1980년대 경기도 포천과 강원도 철원, 홍천 등에서 군대생활을 했던 국민들에게 잊을 수 없는 곳이다. 1989년 문을 닫은 마장동시외버스 터미널은 휴가 나온 군인들이 처음 서울에 발 딛는 곳인 동시에 복귀를 위해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옮기던 곳이었다.

▲ 1970년대 모습.
당시 최신식이었던 시외버스는 지금 보면 촌스럽기 그지없다. 70년대만 해도 경부고속도로 개통 직후 미국에서 증고 장거리노선 버스를 수입해 고속버스로 썼다. 미국 버스회사인 ‘그레이하운드’ 로고도 선명하게 남은 중고차들이었다.

하물며 대부분 비포장도로였던 전방으로 가는 시외버스의 남루(襤褸)야 더 말할 나위가 없었다. 그런 버스를 타고 서울로 나오거나 고개를 꺾은 채 다시 부대로 돌아가던 사병들의 모습은 이제 볼 수 없다. 지금은 최근 바뀐 위장복과 베레모를 쓴 사병들이 동서울터미널에서 패스트푸드와 콜라를 사들고 휴가와 복귀 절차를 대신한다.

마장동버스터미널 자리는 서울의 재개발 지역이 그렇듯 아파트단지로 바뀐 지 오래다. 지금보다 훨씬 길고 힘들었던 군 생활을 거친 장년층의 추억도 고스란히 아파트단지 아래 파묻혔다. 군대 보낸 아들 면회를 위해 바리바리 먹을 걸 싸 머리에 이고 버스를 기다리던 어머니들의 추억도 함께 묻혔다.

○축산물 정형사 칼질 여전한 옛 도축장

▲ 마장동은 과거 서울시에 고기를 공급하던 우시장과 도축장이 있던 곳이다.
마장동에는 사라진 기억이 또 하나 있다. 1998년 물을 닫은 마장동 도축장이다. 마장동 도축장은 1963년 처음 문을 열었다. 이후 1970년대 새마을운동을 거치면서 국내 최대의 축산물 거래가 이루어지던 명소로 자리잡았다. 1990년대까지 5900평(약 1800㎡)의 부지에서 하루 소 250마리, 돼지 2000~2500마리를 도축했다.

이들 축산물은 서울과 수도권 공급량의 15%를 차지했다. 당시 가난한 시민들은 마장동에 나와 거저 얻다시피 수구레(소의 가죽과 근육 사이의 얇은 피막)를 얻어 끓여 먹기도 했다. 지금은 수구레국밥 등을 별미 음식으로 파는 식당도 늘고 있지만 못살던 시절의 기억이 생생한 세대에겐 반갑지 않은 메뉴다.

▲ 도축장이 사라진지 오래됐지만 한우 고기를 주력으로 하는 식당과 축산 시장이 몰려있어 수많은 시민이 찾고 있다.
마장동도축장은 서울 도심권이 확대되면서 더 이상 소와 돼지 반입 어려워진데다 인근에 세운 1000세대 규모의 아파트 입주가 1998년 4월 16일 시작되면서 도축장 문을 닫고 말았다. 당시 일부 언론에는 ‘아파트에 밀려 문 닫는 도축장’이란 기사가 실리기도 했다.

도축장은 이미 15년 전 문을 닫았지만 마장동축산물시장은 아직 성업 중이다. 산지에서 도축한 국내산 쇠고기와 돼지고기, 수입고기 등을 모두 사고파는 대표적인 축산물 전문 도·소매 시장으로 자리 잡았다. 시장은 면적 11만6150㎡에 달하고 3000여 개의 크고 작은 점포가 밀집해 있다.

종사자만 약 1만2000여 명에 국내 내로라하는 축산물 정형사들이 마장동을 생활터전으로 한다. 현재 연간 이 시장을 찾는 소비자는 약 200만 명, 수도권 축산물 유통의 60~70%를 담당하고 있다.

마장동축산물시장에서는 대부분의 축산물을 대형마트 거래가보다 20~30% 싸게 구입할 수 있다. 또 시장 안에는 20여 곳의 쇠고기 전문식당이 들어선 일명 먹자골목도 있어 사철 시민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마장동도축장과 함께 사라진 명물 중에는 곱창골목도 있다.

1990년대부터 황학동사거리에서 왕십리 쪽으로 뻗은 마장로에 곱창가게가 들어서기 시작하면서 만들어진 곱창골목은 언제나 문전성시를 이뤘다.

하지만 2008년 뉴타운 바람이 불면서 곱창골목이 통째로 사라졌다. 지금은 당초 위치에서 2㎞ 남짓 떨어진 지하철 왕십리역과 성동구청 앞 쪽에 다시 곱창가게들이 하나 둘 문을 열면서 ‘신(新) 왕십리곱창골목’을 만들고 있다. 성동구청 측에서도 과거 유명했던 곱창골목의 부활에 반색하고 있다. 마장동축산물시장과 하나로 묶어 지역의 명소로 육성하겠다는 복안이다.

○십리만 더 가라던 자리에 아파트 빼곡

▲ 왕십리는 지난 2009년 뉴타운 계획이 발표되면서 옛 주택과 건물을 모두 철거하고 대단위 아파트단지로 탈바꿈하기 시작했다.
왕십리는 태조 이성계를 도와 조선을 건국한 무학대사가 한양 도읍을 정할 때 “이곳에서 10리를 더 가라”고 했다는 유래가 있다. 조선 건국 후에는 드넓은 벌판인 이곳에 목마장을 두고 말을 길렀다. 조선은 임진왜란 전까지 기병을 군사력의 근간으로 했다. 조선의 기병은 탄금대에서 돌격전을 택한 신립 장군이 왜군의 조총 전술에 크게 패하면서 기반을 잃게 됐다.

왕십리는 당초 조선의 국방과 교통 인프라를 맡았던 곳에서 임진왜란에 이은 병자호란을 당하면서 채소밭과 소를 잡는 도축장으로 바뀌게 됐다. 일제강점기에는 동대문까지 전차길이 놓이면서 왕십리는 전차와 기동차의 차량기지 역할을 하게 된다. 교통배후 지역으로서 기계·방직 등의 공장지대로 변모했고 광복 후에는 상경한 지방 이주민들이 몰리면서 금형(金型)·자개·봉제공장 등이 들어섰다.

지금도 왕십리 로터리에서 을지로(乙支路)로 연결되는 도로를 따라 나전칠기 공예품을 만드는데 필요한 여러 재료의 도산매 상점이 밀집해 있다. 또 왕십리역은 지하철 2호선과 전철화된 경원선의 교차점으로 서울 동부 교통의 중심지 역할을 한다.

가장 큰 변화는 왕십리 뉴타운 개발에 따른 대단위 아파트촌이 들어선다는 점이다. 오는 2014년 입주를 목표로 개발 중인 왕십리 뉴타운은 5000세대의 아파트에 1만4000여 명의 입주자가 새 주민으로 전입할 예정이다.

○유럽 명품 브랜드 ‘뚝딱’ 성수동 수제화

▲ 지난 2월 13일 오전 서울 성동구 중소기업종합지원센터에서 양영수 수제화 장인이 수강생들에게 구두피혁 및 장비 소개와 수제화 기능교육을 하고 있다. 성동구는 오는 6월말까지 중소기업종합지원센터에서 20명을 대상으로 하는 무료 제화기능교육 프로그램은 이론수업과 함께 제화의 기초과정부터 갑피, 저부의 전문 과정으로 진행된다.
성수동 아차산로는 지하철2호선의 지상구간이 도로를 따라 이어져 한낮에도 어두운 분위기다. 도로의 중심 축을 차지한 철도 교각 때문에 폭도 넓지 않다.

이 길에서로 좌우로 이어어지는 좁은 길 안쪽은 수제화와 인쇄, 자동차정비공장이 밀집해 있었다. 1990년대까지 성수동 인쇄단지는 오프세트 인쇄뿐만 아니라 그라비아 인쇄, 종이박스 등을 찍어내는 지공사 등이 밀집했다.

지금도 일부 지공사는 성수동에서 변함없이 박스와 복잡한 디자인의 포장재, 특수인쇄물 등을 찍어낸다. 인쇄업계에서 일명 ‘도무송’이라 부르는 ‘톰슨’ 장비도 과거보다 훨씬 안전하게 개량돼 성수동 일대에 보급돼 있다. 일일이 직접 커다란 골판지를 넣어 박스 형태로 찍어내던 ‘톰슨’ 장비는 근로자가 방심하면 손까지 잃게 되는 산업재해의 주범이었다. 

성수동의 많은 인쇄업체가 지금은 성남 등 수도권으로 이전한 상태다. 자동차정비공장들도 성수동 일대에 몇몇 남아있지만 과거 전성기의 모습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나마 남아있는 성수동의 옛 산업은 성수역 1, 4번 출구 인근 골목 안쪽의 수제화단지다. 실제로는 워낙 소규모 공장이 밀집해 있어 단지라고 이름붙이기 민망할 정도지만 낮은 건물마다 장인들이 직접 구두를 디자인하고 만드는 공장 350여 개가 빼곡하다.

또 길거리 쪽으로는 수제화의 소재인 천연가죽과 인조가죽 전문 상가가 들어서 있다. 성수동 수제화는 서울의 또다른 수제화 거리인 서울역 인근 염창동보다 훨씬 고급으로 꼽힌다. 작은 공장에서 직접 구입하면 싸겠다는 생각에 가격을 물어보면 최하 10만 원 이상이다.

성수동 수제화단지는 1980년대 이후 명동·충무로, 금호 등에 퍼져 있던 구두공장과 업체들이 낮은 땅값을 찾아 몰려오면서 만들어졌다. 지금은 서울의 제화업체 86%가 성수동에 밀집해 있다. 대부분의 업체는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 방식으로 브랜드에 납품하는 방식으로 일하고 있다.

일부 업체는 해외 명품 브랜드의 OEM 생산도 맡는다. 하지만 성수동도 최근 베트남·중국 공장에 밀려 주문 물량이 줄어드는 등 위기를 맞고 있다. 더욱이 수제화를 만드는 장인도 점차 줄어드는 추세다. 젊은이들이 수공업인 수제화 만드는 일을 더 이상 하지 않기 때문이다.

현재 이 거리에 남아있는 수제화 장인들은 대부분 60대 이상이다. 경력 30~40년 이상의 말 그대로 ‘수제화’의 장인이지만 뒤를 이을 ‘수제자’가 없어 명맥을 이어가기 어려운 실정이다.

서울시와 성동구는 최근 서울 제조업 업그레이드 프로젝트를 마련, 성수동 수제화 산업을 집중 육성, 43억 원의 예산으로 2015년까지 디자인·제작·판매·마케팅 등 23개 핵심 사업을 펼칠 계획이다. 그러나 끊길 위기에 처한 기능인력 확보 문제를 어떻게 풀어나갈지는 아직 미지수다.

○강남으로 날아간 왕십리의 서민 노포(老鋪)

▲ 지난 2011년까지 왕십리의 청계천 옆에 고집스럽게 남아있던 서민 식당 대중옥의 당시 모습. 재개발 바람에 밀려 지금은 강남구 역삼동의 자리를 옮겼다.
마장동은 축산물시장과 곱창골목이 되살아났지만 왕십리는 예전의 모습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뉴타운 개발이 시작되면서부터다. 현재 왕십리 뉴타운은 서울의 다른 지역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개발되고 있다. 재개발 바람에 날려 자취를 감춘 왕십리의 추억 가운데 초라하고 작은 식당 ‘대중옥’이 있다.

청계천7가 비우당교 남쪽에 있던 ‘대중옥’은 미닫이 나무 문짝의 유리에 빨간색 페인트 붓으로 큼지막하게 상호를 썼다. 1970년대 이발소나 목욕탕 등에서 쓰던 페인트붓 공용서체였다. 테이블 서너 개에 불과한 홀 외에도 뒷마당으로 돌아 들어가는 쪽문 안쪽에는 제법 넓은 방이 있었다. 금방이라도 천정 아니면 장판 깔린 방바닥이 무너져 내릴 것 같은 방이었다.

그럼에도 까다로운 입맛 내세우는 손님이 끊이지 않았던 이유는 이 집만의 꼬릿한 고기국물 냄새와 싼 값에 푸짐한 음식의 유혹이 컸기 때문이다. 또 서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복고적 정서를 가득 품은 분위기도 한 몫 했다. 유난히 깔끔 떨지 않는 성격이라면 ‘대중옥’ 방바닥에 철퍼덕 앉아 술잔 기울이는 멋을 피해가지 않았다.

여기다 우랑(숫소의 정낭)과 송치(암소 배 속에 든 새끼) 등 다른 곳에서 팔지 않는 메뉴도 있었고 통미꾸라지를 걸쭉하게 끓여내는 서울식 추탕도 있었다.

‘대중옥’은 하왕십리 가게가 재개발로 철거된 뒤 1년이 지나 예상과 달리 강남구 역삼동 국기원길로 이전했다. 3명이 넉넉히 먹을만한 갈비찜은 과거 3만 원에서 4만 원으로 올랐고 우랑과 송치, 추탕은 아예 사라졌다. 막걸리로 발효시킨 찰선지를 듬뿍 넣은 해장국 국물도 왕십리 시절보다는 가벼워졌다. ‘강남 스타일’에 맞추려다보니 옛 청계천스타일을 고집하기 여려웠던 것으로 보인다.    

‘대중옥’의 안주인은 그러나 왕십리 시절을 누구보다 그리워하고 애틋해 한다. 어쩔 수 없이 강남으로 옮겼지만 옛날부터 찾았던 손님이 아는 체 하면 이런 저런 아쉬운 얘기를 끊지 못한다.

그는 왕십리 시절 대중옥의 옛 모습에 대해 “주머니가 가벼운 사람도 별 부담 없이 문 열고 들어올 수 있도록 일부러 고치지 않았다”고 털어놓았다. 처음 식당 문을 연 것은 1950년대 초 6·25전쟁 직후였다고 한다. 그때부터 60년 이상 왕십리를 통해 서울을 들락거리던 서민들의 만만한 식당 역할을 해온 노포(老鋪)였다.
대중옥 주인은 서울시역사박물관 청계천문화관에서 지난 2월 24일까지 연 ‘왕십리’에 대한 특별전 <가도 가도 왕십리>전에 옛 대중옥의 문짝을 빌려줬다. 역삼동 이전 후에도 식당 한쪽에 소중히 전시하던 문짝이었다.

○이성계 쏜 화살 꽂힌 자리에 남은 석교(石橋)

▲ 중랑천과 청계천의 합수지점에 있는 살곶이 다리는 과거 한양과 강릉·충주 지방을 연결하는 주요 통로였다. 조선시대 세워진 가장 긴 다리로 1420년 세종 2년에 다리를 짓기 시작해 61년만인 1483년 성종 14년에 완공했다.
중랑천과 청계천의 합수지점은 조선시대 한양 동쪽에서 도성으로 들어서는 관문이었다. 이 때문에 세종2년(1420) 다리를 짓기 시작해 61년만인 성종 14년(1483) 완공했다.

현존하는 서울 최고(最古)의 다리인 살곶이다리다. 조선시대 세운 가장 긴 다리인 이 다리의 정식 이름은 제반교(濟盤橋)였으나 민간에서는 줄곧 살곶이다리라고 불렀다. 또 살곶이를 한자로 쓴 전곶교(箭串橋)라는 이름도 전해진다.

▲ 조선의 마지막 임금인 순종이 승하한 뒤 살곶이다리 위를 지나는 국장 행렬.
살곶이라는 이름은 태종 이방원이 2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왕권을 차지하자 함흥으로 갔던 태조의 일회에서 유래했다. 당시 태종이 태조를 다시 도성으로 모시기 위해 보낸 신하들의 소식이 끊겼다는 ‘함흥차사’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결국 한양으로 돌아오던 태조는 마중 나온 태종에게 활을 쏘았으나 맞히지 못하고 화살이 땅에 꽂힌 자리를 백성들이 살곶이라 불렀다.

세종의 명으로 영의정 유정현과 공조판서 박자청의 감독 아래 살곶이 자리에 다리를 짓기 시작했으나 강이 넓고 홍수 때마다 물살이 세 교각만 세우고 방치하다 성종에 이르러서야 마무리할 수 있었다. 당시 살곶이다리는 길이 78m(258척)에 너비 6m(20척)이었다.

▲ 1960년대까지 남아있던 중랑천 살곶이다리 인근의 판자촌. 멀리 짓기 시작한 한양대학교의 모습이 보인다.
이들 판석은 1.2m 높이의 교각을 네줄로 세운 뒤 그 위에 받침돌을 올리고 대청마루를 깔듯 세 줄로 빈틈없이 깔았다. 특히 가운데 두 줄의 교각을 낮게 해 다리의 중량을 안으로 모았고 돌 기둥에 흠집을 새겨놓아 물살의 흐름을 자연스럽게 한 지혜가 돋보인다.

동대문으로 나와 살곶이다리를 건넌 뒤에는 송파진에서 배를 타고 한강을 건너 충주 방면으로 갈 수 있었다. 이 다리를 가장 크게 훼손한 이는 흥선 대원군이었다. 대원군은 살곶이다리의 절반을 뜯어 얻은 석재로 경복궁을 다시 지었다.

이후 1972년 서울시가 다리를 복원했으나 원형을 살리지는 못했다. 현재 남아있는 살곶이다리는 당시 서울시가 복원한 모양 그대로다. 가장 오래된 살곶이다리의 사진은 1926년 순종황제 국상 당시 상여행렬 모습이다. 당시의 살곶이다리도 대원군이 절반을 뜯어낸 뒤이기 때문에 원형대로 남아있지는 않았다.

○55억 짜리 집 한 칸에서 내려다보는 강남

▲ 지난 2005년 뚝섬 일대의 골프장과 승마장을 시민공원으로 조성한 성동구 서울숲은 문화예술공원(22만㎡)과 자연생태숲(16만5000㎡), 자연체험학습원(8만5000㎡), 습지생태원(7만㎡), 한강수변공원(6만6000㎡) 등의 테마파크와 야외무대(4000㎡), 서울숲광장(6900㎡), 환경놀이터(3000㎡), 자전거도로, 산책로, 이벤트마당, 곤충식물원 등의 시설을 갖추고 있다.
성수동은 오세훈 전 시장이 추진했던 전략정비구역 중 하나였다.  오 전 시장의 전력정비구역 사업은 초고층빌딩 건설을 골자로 한다. 미국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을 비롯해 세계 각국에 초고층 빌딩 건축붐이 일고 난 뒤에는 대부분 극심한 경제공황이 빚어졌다는 경고도 있었지만 많은 시민들이 각 전략정비구역의 화려한 조감도에 넋을 잃었다.

성수동 전략정비구역의 초고층빌딩은 현재 한화건설의 지상 45층 주상복합 갤러리아포레가 유일하다. 갤러리아포레는 분양 당시 전용 271㎡의 가격이 55억 원을 기록, 강남권을 제쳤다고 화제를 모았다. 갤러리아포레는 총 230가구 중 217가구가 입주를 마친 상태다.

하지만 두산중공업의 50층짜리 초고층아파트와 현대차그룹의 지상 110층짜리 ‘글로벌비즈니스센터’ 건설 계획은 아직 답보상태다. 대림산업이 추진했던 ‘한숲e편한세상’아파트도 사업이 중단된 상태다. 대림산업은 서울숲 상업용지 1·3구역 부지를 각각 2998억 원, 3824억 원에 사들여 초고층 주상복합 아파트 건설을 계획했으나 장기간 지속되는 부동산 시장 침체의 벽을 넘지 못하고 있다.

▲ 지난해 8월 성동구 서울숲공원의 사과나무가 시민들의 눈길을 끌고 있다. 서울숲은 시민들이 자연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대표적인 서울의 공원으로 자리잡고 있다.
이 지역은 한강 조망권이 뛰어난데다 서울숲을 지척에 두고 있어 건설업체들이 너도 나도 뛰어든 곳이다. 여기다 영동대교와 성수대교를 건너면 강남이기 때문에 입주 수요도 많을 것이란 판단도 작용했다. 실제로 오 전 시장은 압구정동 재개발을 추진하면서 한강을 가로질러 서울숲과 연결하는 보행전용 다리 ‘드림 브리지(Dream Bridge)’ 청사진을 제시하기도 했다.

▲ 오세훈 전 시장 당시 한강변 전략정비지구였던 성수동 개발의 대표적인 산물인 한화갤러리아포레의 쌍둥이 빌딩은 분양 당시 서울에서 가장 비싼 펜트하우스 가격으로 화제를 모았다.
또 일부 부동산 개발업자들은 성수동 구역의 강변북로를 지하화하고 초고층 빌딩 단지와 한강을 직접 연결하는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으로서는 이같은 꿈은 언제 실현될지 예측하기 어렵다. 이미 사업에 들어갔던 대기업들도 서울시가 서울숲 일대의 전면적인 개발을 추진해야 초고층 건축을 시작한다는 입장이다.

박원순 시장의 서울시는 오 전 시장이 집착해온 전략정비구역의 초고층 개발에 부정적인 입장이기 때문에 성수지구의 재개발 추진에 제동이 걸리고 있다. 또 성수지구와 유사한 용산역세권개발사업도 부도 위기에 몰리면서 성수지구에 투자한 기업의 운신이 더 어려워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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