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피카소, 낙서화가 장 미셸 바스키야
검은 피카소, 낙서화가 장 미셸 바스키야
  • 정민희
  • 승인 2013.03.22 1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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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rocession 1986 ⓒ The Estate of Jean-Michel Basquiat ADAGP, Paris ARS, New York 이미지제공 국제갤러리.
27세의 일기로 요절. 뜨거운 열정을 불살랐던 흑인화가, 장 미셸 바스키야 (Jean-Michel Basquiat. American, 1960-1988).

그는 푸에르토리코계 어머니와 아이티에서 내무부장관을 지낸 아버지 사이에서 1960년 뉴욕 브룩클린에서 태어났다. 다양한 언어, 문화를 접하며 8년간의 집중적인 작가활동으로 미국 현대미술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1970년대 말 엄격한 표현방식의 미니멀리즘과 개념미술의 쇠퇴와 함께 과거의 전통성을 거부하고 혁신적인 표현방식을 모색하는 미국 신표현주의 대표작가로 미국과 유럽화단에서 큰 주목을 받았다.

1차 세계대전 이후 생겨난 거리의 낙서화는 로마, 파리를 비롯해 뉴욕을 중심으로 새로운 미술경향으로 자리 잡았다.

1977년부터 1980년까지 바스키야는 ‘세이모’ SAMOⓒ (속어-Same Old Shit)라는 가상의 인물로 뉴욕 소호거리에, 건물의 벽면에 낙서화를 그리며 어린이 만화 속에 반영된 정치적 상황의 이면을 그려냈다. 해부학에 대한 관심과 유머러스하고 철학적인 문구들은 그가 그려낸 낙서화의 밑바탕이 됐다. 그는 기호, 문자, 인물 등을 상징적 기호와 문구, 추상적인 이미지로 환치했다.

1980년 <타임스 스퀘어쇼>로 본격적인 작가의 길로 들어섰고 1982년에 첫 개인전이 성공하면서 요셉보이스, 게르하르트 리히터 등과 함께 세계적인 카셀 도큐멘타에 최연소로 참가했다.

이후 팝아트의 거장 앤디 워홀과의 만남으로 뉴욕 휘트니비엔날레(1983)를 비롯해 유럽의 무대에 지속적으로 소개됨으로써 1985년에는 ‘뉴욕 타임스 매거진’ 커버에 미술계의 가장 영향력 있는 아티스트로 소개되기도 했다.

▲ DESMOND 1984 ⓒ The Estate of Jean-Michel Basquiat ADAGP, Paris ARS, New York 이미지제공 국제갤러리.
바스키야는 성공한 흑인 화가로서 자아정체성, 자본주의, 동시대 사건, 인종문제를 인권의 차원에서 다루었다. 규율과 제재의 형식주의에서 탈피하며 해체주의, 절충주의, 다원주의에 입각한 뉴페인팅의 파격적인 변화로 새로운 미술을 선보였다. 그의 그림에는 과거 사회에 대한 비판과 분노의 공격성이 드러난다.

늘 죽음에 대한 고찰을 해오던 작가는 1988년 사망 전에 절친한 앤디 워홀의 죽음으로 큰 충격을 받았고 우울함과 상처는 어두운 이미지의 인물로 자주 나타나게 된다.

마약 남용과 유명세에 따르는 인간관계에서 오는 고민들, 불완전한 정신상태, 심리적인 불안함이 작품에 낱낱이 투영됐다. 소멸되어 가고 있는 자신 존재의 삶을 작품 속에 암시했다.
3월 31일까지. 국제갤러리 2관(K2), 02)735-8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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