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미소(美所), 향원정
서울의 미소(美所), 향원정
  • 김민자 기자
  • 승인 2010.10.29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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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지 못할 나의 서울이야기> 수상작 ②] 우수상 김미정씨

서울타임스는 서울시가 주최한 ‘잊지 못할 나의 서울이야기’ 1차 공모전에서 수상한 8편의 작품을 서울시의 협조를 얻어 차례로 게재합니다. 서울시는 지난 7월 15일부터 9월 15일까지 ‘서울’이라는 주제로 서울의 숨은 명소와 감동적인 이야기, 서울 사람들의 진솔한 삶의 모습을 그린 작품을 공모했는데, 총 303편의 응모작품 중 대상 1명, 우수상 2명, 장려상 5명을 선정한 바 있습니다. <편집자 주>

서울이 품고 있는 나의 작고 따스한 추억은 경복궁 안 사각의 못(향원지) 가운데 우뚝 솟은 향원정에 담겨져 있다.

▲ 경복궁 향원정. ⓒ서울시 제공

육각의 지붕을 이고 있는 2층의 정자 향원정이 간직하고 있는 나의 추억은 언제나 11월의 붉은 가을빛으로 기억된다.

청명하고 드높은 가을날의 하늘빛과 어우러진 그야말로 새빨갛고 선명한 단풍을 비롯해 노란빛 혹은 주황빛으로 물들어 수줍은 얼굴을 한 새색시처럼 향원정을 둘러싼 가을은 아름다운 색채들로 수놓아진 열 두 폭 병풍과 같았다.

향원지의 드높고 푸르른 하늘은 새색시의 모습을 더욱더 빛나게 하고 그 밑으로 잔잔하기만 한 심연은 하늘빛을 머금어 오묘한 물빛을 다시금 토해낸다. 열상진원으로부터 시작되는 작은 물줄기는 동그란 홈을 한 바퀴 휘~ 돌아들어 차가운 기운을 떨쳐내고 그렇게 푸른 물빛을 담아내는가 보다.

봄과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의 각기 다른 색채의 풍경을 가졌음에도 내게는 항상 가을빛으로 대표되는 건 무슨 까닭인지 모를 일이다.

학창시절 처음 그 아름다움에 심취했던 기억이 내 뇌리에 깊숙이 자리하고 있다. 경복궁으로 떠났던 나의 첫 백일장, 그 설레임의 중심에 바로 향원정이 있었다.

근정전을 지나 옛 임금과 왕비의 숨결을 가슴으로 새기며 강녕전과 교태전을 가로질러 자경전을 뒤로하면 그 신비로움에 흠뻑 빠져들 수밖에 없는 푸르른 못(향원지)과 그 중심에 우뚝 솟은 원형의 작은 섬 그리고 고풍스런 정자, 향원정이 그 자태를 드러낸다.

고종이 명성황후를 위해 지었다는 향원정(香遠亭)은 멀리까지 향기가 퍼지는 정자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한다. 그 옛날 고종과 명성황후가 거닐었을 향원지를 유유히 돌아 나오는 나의 발걸음에는 그들의 애잔한 사랑이 절로 묻어난다.

향원정으로 이르는 단 하나의 길, 취향교는 누구도 그 신비로운 공간으로의 진입을 허락하지 않는다. 취향교의 오른쪽으로 돌아 몇 발자국을 옮기면 못 속으로 길게 드리워진 그야말로 한 폭의 그림 속 미송(美松)이 나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내 눈길을 잡고 한동안 놓아주지 않던 세월이 묻어나는 그 소나무 그늘에 살며시 앉아 향원정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내가 꼭 명성왕후가 된 듯한 착각에 마음이 숙연해진다. 심연에서 솟아오른 듯한 향원정이라는 연꽃이 아마도 그때부터 내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하게 되었던 것 같다.

10여년이 흘러 내가 그녀(향원정)를 다시 만난 건 붉고 풍요로운 빛이 감도는 몹시도 아름다웠던 2000년의 가을이었다. 나는 하얀 웨딩 드레스를 입고 세상에 하나 뿐인 나의 첫사랑과 함께 그녀를 사진에 담아냈다.

▲ 경복궁. ⓒ서울시 제공

연못에 빙~둘러쳐진 병풍처럼 그루 그루의 나무들이 제 각각의 아름다움을 뽐내던 그 가을, 우리는 그곳에서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며 그녀의 축복 안에서 웨딩 촬영을 했다. 주위에는 적잖은 커플들이 하얀빛의 풍만한 드레스와 검거나 혹은 흰빛의 턱시도로 흑백의 물결을 만들어내며 행복한 그림을 그려 내고 있었다.

그렇게 그녀와의 인연의 끈은 다시금 내 안에서 새로운 매듭을 지어내고 있었고 나는 그 가을 따뜻하고 포근한 가정을 이루게 되었다.

몇 년이 지나고 그녀가 뇌리에서 잔잔한 호수처럼 숨죽이고 있을 때, 내겐 누구보다 사랑스럽고 어여쁜 딸과 귀엽고 멋진 아들이 곁에 있었다. 또 다른 가을빛을 아이들에게 선사하고 싶던 어느 날 남편과 나는 문득 그녀를 기억해냈다.

아이들에게도 그녀는 푸근한 엄마이고 편안한 뜰이고 아름답고 신비로운 경험이 되어주리라. 내가 느끼는 것들을 아이들도 함께 느끼기를 바라며 나는 다시금 그녀를 찾았다. 여전히 변함없는 그녀의 품은 역시나 따뜻하게 감싸주는 어머니의 모습이었다.

단아하지만 다채로운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을 아이들도 어느 새 마음으로 느끼고 있었다. 아이들의 얼굴에는 조용하고 환한 미소가 살며시 번져 갔다. 아마도 그 편안함이란 그녀가 담고 있는 ‘조선의 얼‘에 바라보는 이들까지 동화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이렇듯 내가 아이들에게 놀이동산보다 더 보여주고 싶고 오감으로 느끼게 해주고 싶은 내 고장, 서울 속 명소는 다름 아닌 향원정과 그녀를 품고 있는 향원지이다.

누군가에게 향원정은 휴식의 공간이고, 사랑의 공간이고, 사색의 공간이기도 하다. 번잡하고 어지러운 도심 속 그녀만의 독특하고 신비한 매력을 숨기고 있는 곳……. 

그곳을 찾는 누구나에게 그녀는 서울의 최고의 명소가 아닐까 나는 생각한다. 나는 우리 고장, 서울 속에 세계 어느 명소보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빛을 담고 있는 향원정이 있다는 것을 내 아이들에게 가장 먼저 알려주려고 한다. 그래서 우리 가족은 가을이면 떠나는 단풍여행을 경복궁 안 여러 가지 풍요로운 색채를 뿜어내는 향원정으로 간다.

그녀가 뿜어내는 형언할 수 없는 그윽하고 푸르른 향기를 마음 속 깊이 들이마시며 도심 속 일상에서는 찾을 수 없었던 마음의 평정을 되찾는다. 몹시도 길고 힘들었던 무덥고 습한 여름에 대한 보상으로 내게 주어지는 시원하고 달콤한 아이스크림과도 같은 최고의 선물이 바로 그녀인 것이다.

2010년 새로운 가을의 문턱에서 나는 또 한 번 변함 없이 아름다울 그녀와의 재회를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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