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함께 돌자 서울 한바퀴(25) 동대문②
다함께 돌자 서울 한바퀴(25) 동대문②
  • 이인우 기자
  • 승인 2013.04.05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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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도성 밖 오래된 마을 모인 조선왕조의 텃밭 옛 것 향수 담은 풍물시장·고미술상가도 이곳에…
▲ [포털 다음 지도 갈무리]

동대문구는 오래된 동네다. 한양 도성을 쌓은 600여 년 전 성 밖 변두리였으나 조선 팔도에서 드나드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았다. 지금의 중랑천을 끼고 있는 비옥한 농토에서 가꾼 벼는 왕실의 양식이 됐다. 왕이 직접 밭을 가는 친경의식(親耕儀式)이 열린 곳도 지금의 동대문구였다.

도성을 출입하는 팔도 백성이 많기 때문에 얽힌 이야기도 많다. 지금의 용두동에 있던 찬우물은 과거를 보기 위해 한양으로 가던 과객들이 들어 물을 마시던 곳이다. 당시 무과를 보는 과객은 남대문으로, 문과를 보는 과객은 동대문을 통해 한양으로 들어섰다고 한다. 이들에게 찬우물을 마시면 급제한다는 소문이 돌아 모두들 반드시 용두동을 들렀다는 얘기다.

찬우물에는 태조 이성계와 얽인 이야기도 있다. 태조가 선농단에 제를 올리기 위해 지날 때 목이 말라 찬우물에서 목을 추기고 난 뒤 우물에서 갑자기 용 두 마리가 승천했다는 것이다.

용두동은 풍수지리에서 물이 많은 지역이기 때문에 화재가 나지 않는다는 속설도 있다. 이 때문에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6·25에 이르기까지 화재를 입지 않았다고 한다. 동대문구에 유독 구전설화가 많은 이유는 예로부터 드나드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너도 나도 옛 것을 허물고 번쩍이는 빌딩을 짓는 요즘, 동대문구는 낙후된 동네로 보일 수 있다.

▲ 동대문구 이문동은 이문·휘경 뉴타운 개발지역으로 지정됐으나 일부 구역은 이도저도 못하는 상태로 묶여 있다. 이문동의 옛 주택가와 멀리 보이는 아파트촌이 대조를 이룬다.
뉴타운 지구로 선정돼 일부 고층 아파트가 들어선 이문·휘경동에는 아직 옛 주택가가 남아있다. 좁은 골목길이 이어진 이런 주택가에는 동대문구에 깃들어 사는 시민들의 이야기가 끊임없이 만들어지고 있다. 오래된 동네에서 살아가는 서울 민초(民草)들의 이야기다.

○먼 거리 달려온 백성들 허기 달랜 ‘떡전’

▲ 떡전사거리 일대는 과거 공동묘지가 있던 곳이다. 당시 공동묘지에는 1923년 1월 일제의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한 뒤 은신처에서 추적해 온 일경 15명을 사살하고 자결한 김상옥 의사의 무덤이 있었다. 사진은 1923년 3월 15일 동아일보에 실린 김 의사 관련 기사.
지하철1호선 제기동역과 회기역 사이에 떡전사거리가 있다.
동대문구청은 2004년 이곳에 ‘떡전다리 준공기념비’를 세웠다. 간선도로 확장과 중앙선 철도 복선화에 따라 옛날부터 있던 떡전교를 허물고 새 다리를 놓은 일을 기념하기 위해서다.

떡전거리는 조선시대 서울로 들어오던 여행자들이 쉬어가던 곳이었다. 당시 패스트푸드, 또는 길거리 음식이었던 떡을 파는 상인이 몰렸고 여행자들은 잠시 쉬며 떡으로 요기한 뒤 다시 길을 떠났다.

지금 종로구 낙원동에 밀집한 떡집들의 유래는 궁궐에서 시작한다. 경술국치로 궁을 떠난 궁녀들이 창덕궁 근처에서 떡을 빗어 팔면서 떡집이 몰렸다는 얘기다. 반면 동대문구 떡전거리는 백성들의 옛 이야기가 담긴 곳이다.

떡전은 이미 오래 전 사라지고 거리에는 외국계 패스트푸드점만 넘쳐난다. 일제강점기까지 떡전거리 인근에는 공동묘지가 있었다고 한다. 이 공동묘지에는 1923년 1월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한 김상옥 열사의 묘가 있었다. 김상옥 열사는 1919년부터 항일 암살단을 조직해 활동했다.
 종로서 폭탄 투척 후 쫓기던 그는 혼자 일경 15명을 사살하고 마지막 탄환으로 자결했다.
떡전거리 인근 김상옥 열사 묘지의 나무로 만든 비에는 상해법조계애이리(上海法租界愛仁里)라는 주소를 적었다고 한다. 그가 죽어서도 상해 임시정부에 가서 독립운동을 하겠다며 남긴 유언에 따라서다.
일제강점기 친일파들은 종로에 저택을 짓고 살았으나 독립투사는 도성 밖 동대문구에 초라한 유택(幽宅)을 남겼다. 도성 안과 성 밖 동대문구에 얽힌 이야기다.

 

▲ 현재 청량리역과 회기역 사이에 있는 사거리는 옛날 서울로 들어오던 사람들이 동대문을 앞두고 쉬던 곳이다. 이들에게 떡을 파는 상인들이 많아 인근 다리를 떡전교라고 불렀다.

○없는 것 빼고 다 있는 한약재 집산지

▲ 경동시장은 강원도와 경북 북부, 충북 북부 지역의 약재상들이 청량리를 통해 서울로 들어오면서 자연스럽게 한약재와 약초 전문시장으로 자리잡았다. 현재 경동시장은 전국 최고의 서울약령시로 꼽힌다.
하수오는 한방에서 강장과 강정·양혈(養血)·보간·거풍·소종의 효능이 있다고 한다. 허약한 체질을 바꾸거나 요통·동맥경화··고혈압·만성간염·결핵성임파선염·장염·변비 등의 치료제로도 쓴다.

남성에게는 정력제로, 여성에게는 여성질환 예방과 치료제로 권장하기도 한다. 이런 말만 듣다보면 만병통치약이 따로 없다. 한방에는 하수오 뿐만 아니라 효험 좋다는 약초와 약재가 많다. 이들 한약재는 모두 가공품이 아닌 자연 그대로의 초목이나 열매, 뿌리라는 장점도 있다. 약업계 관계자에 따르면 양약 또한 화학적 제조방법을 따를 뿐 대부분 자연 약재와 성분이 같다고 한다.

하지만 이들 한방 약재를 쓸 때는 한의사 등 전문가의 처방을 따라야 한다. 하수오가 좋다고 해서 함부로 사서 달여 먹지 말라고 하는 이유도 모든 자연산 약재가 갖고 있는 부작용을 우려해서다.
하지만 이런 약재가 필요하다면 언제든 구할 수 있다. 바로 제기동에 있는 경동시장에 가면 전국에서 나는 온갖 약초와 약재들이 지천이다.  

▲ 경동시장 일부는 아직 옛 시장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70년대의 정취를 일깨운다.
경동시장은 우리나라 최대의 약령시(藥令市)다. 약령시는 효종 때부터 열린 약재 시장이다. 본래 청주와 대구 ·전주 ·원주 등에서 약재의 채취(採取), 출하 시기에 맞춰 봄 ·가을 두 차례 열렸다. 이중 경북 봉화 등에서 채취한 약재를 거래하는 대구와 지리산을 기반으로 하는 전주, 강원도 각지의 약재가 모이는 원주 약령시가 3대 시장으로 꼽혔다. 근대 이후 가장 활발했던 약령시는 대구로 중구 남성로(南城路)의 ‘약전골목’에는 지금도 한약방과 한약상이 즐비하다.

하지만 교통이 발달하면서 약령시도 인구 1000만 명의 서울로 이동하게 됐다. 경동시장이 한약재의 메카로 자리 잡게 된 것은 인근에 청량리역이 있기 때문이다. 경북 북부와 강원도, 충북 북부 지역인 제천, 단양에서 나는 약재가 철도를 통해 청량리역으로 들어온다.

○50년만에 지방 약령시 잠재운 서울약령시

경동시장이 약령시로 자리잡게 된 것은 1960년대 말부터다.
다른 지방 약령시보다 역사는 짧지만 규모는 엄청나다. 현재 제기동과 용두동 일대 23만5000㎡에 한의원 324곳, 약국 312곳, 한약도매업체 57곳, 한약수출업체 99곳 등 한약관련업체 899곳이 밀집해 있다.

▲ 한의학박물관에서 전통의약기구를 체험하고 있는 어린이.[사진=한의학박물관]
이 지역은 서울약령시 한방산업 특구로 지정돼 매년 10월께 한의약 문화 축제가 열린다. 또 용두동 동의보감타워 지하 2층에 지난 2006년 한의약박물관을 개설, 한의약을 홍보한다. 한의약박물관은 전시실·한방체험실·세미나실·수장고를 갖추고 유물 409점·한약재 500여종 등을 전시 중이다. 경동시장을 중심으로 한 서울약령시의 기원을 조선시대 관헌들의 숙소와 병자 치료 기관이었던 보제원으로 보기도 한다. 보제원은 서대문 밖 홍제원, 남대문 밖 이태원, 광희문 밖 전관원 등과 함께 조선의 대표적인 원(阮) 중 하나였다.

보제원은 도성 안의 평민 치료를 주로 담당했지만, 때로는 무의탁자를 수용하고 행려병자를 구호하는 역할도 했다. 또 행려병자가 사망히면 매장까지 해주는 구휼기관이었다. 이런 보제원 인근에는 자연스럽게 지방에서 채취해 온 약재를 파는 상인들이 늘어났고 약재 거리가 만들어졌다. 하지만 이를 약령시의 전신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당시에도 조선 최고의 약령시는 대구와 전주에 있었다.

○천호대로 따라 이어진 고미술․중고차 시장

신설동역에서 천호대교로 가는 천호대로를 따라가다 보면 난데없이 석물을 전시한 상가 앞을 지나게 된다.동대문구 답십리의 고미술상가 밀집 지역이다. 답십리고미술상가는 동서로 나뉜다. 서부 지부는 지하철 5호선 답십리역 4번 출구에서 도보로 5분, 동부 지부는 1번 출구에서 도보로 2분 거리다. ‘진짜 옛것’에 관심이 있다면 인사동보다 답십리를 찾아야 한다는 말이 있다.

▲ 국내 최대의 중고자동차 매매가 이루어지는 장안평중고차시장은 성동구 용답동을 근거로 하고 있지만 대부분의 시민들이 길 건너 동대문구 장안동에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답십리고미술상가는 1986년과 1988년 아시안게임, 올림픽 등을 치루면서 청계천, 아현동, 충무로, 황학동 일대의 고미술 상점을 집단 이주시키면서 만들어졌다. 이곳에는 커다란 석탑과 무덤 앞에 세웠던 무인석, 문인석, 돌확 등 온갖 석재부터 선비들의 갓, 곰방대, 아녀자들의 쓰개옷부터 족두리, 장롱 등 없는 게 없다.

▲ 장안평은 과거 종로에 있던 골동시장을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외곽으로 이주시키면서 형성된 서울의 대표적인 골동품 시장이 됐다.
답십리고미술상가는 국내 최대 규모다, 현재 140여 곳이 넘는 고미술상들이 밀집해 있다. 관광객들도 많이 찾는 명물이 되고 있다. 하지만 정작 시민들의 발길은 뜸한 편이다. 2008년 국제금융위기 이후부터 살아나지 않는 서민경제 여파 때문이다.

고미술상가의 제품 가격은 생각만큼 비싸지 않다. 5000원짜리 등잔부터 2만원짜리 떡살, 3만원짜리 항아리, 5만원짜리 문짝 등도 흔하다. 전통물품으로 인테리어를 꾸미는 요식업소 운영자들도 가끔 답십리를 찾는다. 답십리 인근에서 천호대교 쪽으로 더 가면 역시 국내에서 가장 큰 시장인 장안평중고차시장이다. 정작 중고차시장이 있는 곳은 천호대로 남쪽인 성동구 용답동이지만 시민들은 대부분 동대문구 장안동으로 알고 있다. 장안동 쪽은 자동차 정비공장이며 부품상가가 밀집해 있다.

천호대로를 사이에 두고 양쪽 모두 대단위 중고차 시장이 밀집한 중고자동차의 메카로 꼽힌다. 장안평중고차시장은 국내 중고차 시세를 결정하는 바로미터 역할도 하고 있다. 지난 2011년 서울의 수해 직후에는 수만 대의 침수 차량이 장안평으로 쏟아져 나와 전국적인 관심을 끌기도 했다.

○황학동 떠난 풍물시장 상인들의 보금자리

▲ 신설동 풍물시장은 청계천 위 복개도로를 뜯어내기 전까지 중구 황학동에 있던 골동잡화상들을 이주시켜 조성했다. 하지만 시장이 활성화되지 않고 있어 많은 상인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
신설동에 있는 서울풍물시장에서는 오는 10월까지 매월 마지막 토요일 시민 벼룩시장이 열린다. 서울풍물시장 5주년을 기념하는 행사라고 한다.

하지만 속내는 활성화되지 않고 있는 서울풍물시장을 더 많은 시민에게 알리려는 고육지책이다. 신설동의 서울풍물시장은 중구 황학동 풍물시장의 후신이다. 지난 2003년부터 2005년까지 이명박 당시 서울시장이 청계천 위 복개도로를 뜯어내고 삼일고가차도를 없애면서 황학동 풍물시장 상인들을 동대문운동장 자리로 집단 이주시켰다.

이후 동대문운동장 일대가 동대문역사문화공원과 동대문디자인플라자로 개발되면서 상인들은 또다시 밀려나야 했다. 이들 풍물시장 상인이 마지막으로 옮겨온 곳이 신설동 서울풍물시장이다.

하지만 서울풍물시장은 황학동 시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찾는 이들이 많지 않다. 과거 황학동 풍물시장은 평일에도 전국에서 몰려온 시민, 상인과 외국인 관광객이 물결을 이뤘다. 특히 외국인 관광객 1000만 시대로 들어선 지금까지 황학동 풍물시장이 남아있었다면 국제적인 벼룩시장으로 자리 잡았을 수 있다.

현재 신설동 풍물시장에는 동대문 풍물벼룩시장에서 이전해 온 노점  894곳이 영업 중이다. 서울풍물시장은 크게 무지개색을 딴 7개의 동으로 나뉜다. 빨강동은 식당가로 1층과 2층에 나뉘어져 있고 초록동(1층)은 골동품과 공예품 등을 판매한다. 다른 동에서는 의류와 패션소품, 스포츠 용품 및 다양한 생활용품을 취급한다. 이 가운데 가장 눈길을 끄는 곳은 골동품과 공예품 매장이 입주한 초록동이다.

▲ 신설동 풍물시장안의 중고카메라.
풍물시장을 찾는 시민들은 수많은 중고품을 통해 자신의 추억을 찾는다. 어떤 물건은 디자인과 품질이 조악하기 그지 없지만 이런 제품이 안고 있는 추억은 소중하다. 때로는 한 때 포토그래퍼들이 선망했던 하셀 중형 카메라도 선반을 차지하고, 먼지 낀 LP도 새 주인을 기다린다.

신설동의 서울풍물시장은 하지만 시민들이 부담 없이 찾기에 동떨어진 자리에 있어 크게 활성화되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동대문에서 신설동으로 가는 길목인 종로구 동묘 앞이 주말 시민 벼룩시장으로 인기를 모은다. 서울시가 매월 마지막 토요일 서울풍물시장에서 시민 벼룩시장을 열기로 한 것도 동묘 앞 시민들을 끌어들이기 위해서로 보인다.
하지만 벼룩시장도 상인이나 시민 모두에게 낯익은 자리를 찾기 마련이어서 얼마나 효과를 얻을지는 미지수다.

○알음알음 유명해진 유별난 식당들

▲ 동대문구 용두동에 있는 대성집은 도가니탕으로 유명한 종로구 교북동의 대성집과 구별하기 위해 '어머니 대성집'이라 부른다. 그만큼 단골 손님이 많은 한우 해장국, 수육 전문 식당이다.
동대문구에는 작지만 소문난 식당이 많다.
이 중 회기역 뒤편 한가한 이면도로변에 있는 경발원이란 중국집은 깐풍기 하나로 서울의 입맛 까다로운 시민들을 사로잡는다. 무뚝뚝한 화교 부부의 친절은 기대하기 어렵다. 깐풍기 하나 시켜놓고 한 시간 가까이 양파와 단무지만 집어먹으며 기다리는 일도 허다하다. 그래도 손님들은 점심, 저녁 긴 줄을 선다.

▲ 지하철1호선 회기역 인근에 있는 화상 중국집인 경발원은 독특한 깐풍기와 짬뽕을 찾는 시민들이 한 시간 이상 줄을 서는 지역 명물이다.
이 집 깐풍기를 먹기 힘든 까닭은 특유의 조리방식 때문이다. 다른 중국집처럼 식재료 손질을 해두지 않고 주문이 들어오면 그때서야 생닭을 토막내기 시작한다. 또 일반적인 깐풍기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조리한다. 튀김옷을 입히지도 않고 끈적한 두반장 소스를 쓰지도 않는다. 생닭 토막을 볶아낸 듯한 모양새에 굵은 호부추와 매운 건고추로 향을 낸다.

화끈한 매운 맛과 닭 본연의 풍미를 그대로 살린 특이한 깐풍기에 멀리서 찾아오는 손님도 기꺼이 줄을 선다. 식사 메뉴로 내놓는 흰 짬뽕도 다른 곳의 천편일률적인 굴짬뽕과 전혀 다르다. 일본 후쿠오카에서 유래한 짬뽕과 가장 비슷하면서도 매콤한 맛을 살려냈다.

▲ 용두동에는 30여년 전부터 쭈꾸미를 주력 메뉴로 하는 식당이 들어서면서 '쭈꾸미 골목'을 형성했다. 이 가운데 '나정순 할매 쭈꾸미'가 원조로 통한다.
옛날 찬우물이 있었던 용두동에는 쭈꾸미 골목이 있다.
30여 년 전 한 식당에서 내놓은 쭈꾸미 불고기가 인기를 모으면서 한 집 두 집 늘어나 식당가가 만들어졌다.

쭈꾸미 골목이 유명해지면서 용두동을 내세운 프랜차이즈나 홈쇼핑 상품도 우후죽순 생겨났다. 전국민이 용두동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면서 용두동 쭈꾸미는 한 번쯤 들어보게 됐다.

용두동 쭈구미의 원조는 나정순 할머니라고 한다. 나씨는 지난 10년 동안 매년 겨울 동대문구청에 200여만 원씩 기부, 얼굴 없는 천사로 궁금증을 불러일으켰다. 나씨의 정체는 올해 1월에야 밝혀졌다.

그는 지난 1월  쌀 20㎏ 100포대를 어려운 이웃에게 나눠달라며 동대문구청 앞에 놓고 가다 구청직원에게 발견됐다. 서민들이 주로 찾는 쭈꾸미 식당에서 번 돈은 다시 동대문구의 이웃을 위해 기부한 훈훈한 미담이다.

용두동에는 입맛 까다로운 시민들에게 유명한 해장국집도 있다.
식당 이름인 대성집은 종로구 주교동의 유명한 도가니탕 전문점과 같다. 시민들은 용두동 대성집을 ‘어머니 대성집’이라 부른다. 주교동 대성집과 구별하기 위해서다.

‘어머니 대성집’에서는 한우와 국내산 육우로만 해장국을 끓이고 수육을 삶는다. 한우 꼬치산적도 다른 식당에서는 보기 힘든 메뉴다. 이 식당에는 인근 아차산 산행을 마친 시민들로부터 인근 주민, 멀리서 소문을 듣고 찾아온 손님들이 끊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좋은 재료로 정성을 다해 끓여낸 음식이 한결같기 때문에 46년의 전통이 이어지고 있다.

○눈 먼 아비 대신한 효녀 얘기 얽힌 중랑천

▲ 동대문구 휘경동에서 중랑천을 건너면 중랑구다. 휘경동 중랑천을 찾아온 왜가리가 먹이 사냥을 마친 뒤 날아오르고 있다.
동대문구는 오는 13일 중랑천과 배봉산 사이 둑길에서 봄꽃축제를 연다. 중랑천 둑길에는 500여 그루의 벚나무는 물론, 산수유와 개나리꽃, 꽃창포, 원추리꽃이 화사하다.

중랑천은 동대문구와 중랑구 사이를 가르는 하천이다. 도봉구에서는 이를 한천(漢川)이라고 부른다. 동부간선도로가 생기기 전 한천로는 서울 북부에서 동대문 방면을 잇는 주요 도로였다. 한천로가 생기기 훨씬 이전부터 사람들은 중랑천을 건너거나 물길을 따라 동대문으로 향했다.

서울 도성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백성들이었다. 한 때 중랑천에도 뱃길을 만들어 유람선을 띄우자는 개발 우선 정책을 내놓은 일도 있었지만 곧 가라앉았다. 중랑천은 물이 그리 깊지 않다. 하지만 서울의 역사만큼의 세월을 담고 흘러온 국가하천으로 수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다.

“夏龍同徵麥穗場(하룡동징맥수장) 秋郊雨足稻花香(추교우족도화향)
여름 밭두둑에 바람 잔잔하니 밀 이삭이 잘 자라고 가을 들판에 비가 흡족하니 배꽃이 향기롭다.
一遊正合三豊望(일유정합삼풍망)  準擬豊登十月場(준의풍등십월장)
오늘의 한번 노는 일 농꾼들도 기뻐하는 것이 시월의 타작마당은 풍년이 틀림없다.”

세종과 상왕인 태종이 매사냥하는 것을 구경하고 중랑포에서 마련한 술자리에서 병조참의 윤회(尹淮)가 지은 칠언절구다.

이에 앞서 현재 월릉교 밑에 묻혀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송계교를 지을 때 부역자로 동원된 시각장애인 중이(仲伊)의 딸 이야기가 중랑천의 지명유래가 됐다고 한다. 앞을 못보는 아비를 대신해 남장을 하고 부역에 나선 중이의 딸 이야기가 알려지면서 양주 관아는 부역을 면제했고 남자인 줄만 알고 지내던 동료들이 그녀를 중랑(仲狼)이라 불렀다고 한다. 중랑천은 바로 그녀의 별명에서 이름 붙였다는 얘기다.

중랑천에는 팔뚝만한 잉어와 붕어, 누치 등이 살고 있다. 이를 먹이로 하는 백로, 왜가리도 수시로 중랑천에 내려 앉는다. 한 쪽에는 하루 수십만 대의 자동차가 꼬리를 물지만 중랑천은 이를 외면하고 천년 물길을 이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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