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의 터닝 포인트, 서울
내 삶의 터닝 포인트, 서울
  • 서울타임스
  • 승인 2010.12.07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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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지 못할 나의 서울이야기> 수상작 ⑧] 장려상 장미숙씨

서울타임스는 서울시가 주최한 ‘잊지 못할 나의 서울이야기’ 1차 공모전에서 수상한 8편의 작품을 서울시의 협조를 얻어 차례로 게재합니다. 서울시는 지난 7월 15일부터 9월 15일까지 ‘서울’이라는 주제로 서울의 숨은 명소와 감동적인 이야기, 서울 사람들의 진솔한 삶의 모습을 그린 작품을 공모했는데, 총 303편의 응모작품 중 대상 1명, 우수상 2명, 장려상 5명을 선정한 바 있습니다. <편집자 주>

친지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부모님께서 우리 집에 올라오신 다음 날, 부모님을 모시고 결혼식장에 가던 중이었다. 

▲ 창덕궁 [서울시 제공]
“쩌그쯤 될랑가. 서울이 하도 변해부러서 인자는 어디가 어딘지 도통 모르겄어. 내 생각으론 쩌그가 맞는 거 같기도 한디….” 사근동 근처에서 엄마는 회상에 잠겼다. 어떤 흔적이라도 찾고 싶으셨던지 이곳저곳을 둘러보는 엄마를 보며 나는 옛 생각에 젖어들었다.

“느그 둘이 손을 꼭 붙들고 학교 가라 잉. 놔 불면 큰일난께. 니는 언니를 으짜든지 따라댕길라고 애를 써야 되야. 서울에서는 길 이자불면 오도가도 못 허고 고아가 되분께 명심해야 쓴다.” 아침이면 엄마는 언니와 내 손을 붙들고 열 번도 넘게 당부를 하곤 했다.

초등학교 일학년이던 나와 초등학교 사학년이던 언니는 그렇게 매일 손을 잡고 학교에 다녔다.

행여 길을 잃어버릴세라 종종걸음을 쳤을 어린 시절 우리들의 모습이 떠오를 때면 나는 살포시 웃음이 나온다.

순진하기만 했던 시골아이들은 용케 길을 한 번도 잃어버리지 않고 학교에 다녔다. 땟국을 벗지 못해 얼굴은 꾀죄죄했고, 시골에서 제법 잘했던 공부도 서울아이들 사이에서는 맥을 못 추었지만 우리는 서울에서 영원히 살 거라 믿고 열심히 서울 생활을 익혀가던 중이었다.

엄마는 그때 돼지국밥집을 했다. 요리솜씨가 좋은데다 음식을 싸게 팔았기 때문에 손님이 많아 엄마는 무척 바쁘셨다.

사람들의 발길을 잡던 가게 진열장의 삶은 돼지 머리고기는 아이들에게 자랑거리이기도 했다.

우리 국밥집 앞에는 작은 공터가 있었는데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앉아 공기놀이와 고무줄을 하며 놀았다. 그곳에는 매일 뽑기 장수 아저씨가 왔다.

견딜 수 없이 달콤한 냄새가 우릴 유혹하면 우리는 아저씨 앞에 모여앉아 침을 질질 흘렸다. 지금도 뽑기 장수를 보면 그 시절이 떠올라 발길이 멈춰지곤 한다.

그러나 채 일 년도 못 되어 우리는 서울생활을 접어야 했다. 어느 날부터 아버지가 이상해진 것이다.

우리가 서울생활을 하기 전 아버지는 원양어선을 타셨다. 그러나 채 삼년이 못 되어 바다에 빠져 머리를 다치셨고 그 일로 인해 정신적인 장애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아무도 몰랐다. 그 사고가 우리 가족에게 어떠한 파장을 몰고 올 줄은…. 아버지가 평생 정신적인 병을 안고 살아가야 한다는 걸 상상도 못한 채 엄마는 모든 재산을 처분한 뒤 서울로 올라와 국밥집을 차렸던 것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아버지에게는 별 징후가 없었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아버지는 정신이 혼미해져 갔고 비정상적인 일들을 벌이기 시작했다.

견디다 못한 우리는 서울생활을 정리했고 다시 시골로 내려가 초가집에서 살아야 했다. “서울만 가지 않았더라면 느그 아부지가 저리 되지는 않았을 것인디 무담씨 서울을 갔는갑다.” 엄마의 넋두리를 들으며 어렸던 우리는 정말 서울이 아버지를 병들게 한곳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그건 엄마의 넋두리였을 뿐 아버지는 시골에서도 점점 상황이 악화되어갔고 결국은 요양원에 들어가시게 되었다.

그 후 언니들과 나는 중학교만 졸업한 후 부산에서 객지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큰언니가 결혼을 하면서 서울에 새살림을 차렸고, 연이어 둘째언니도 서울로 가버렸다.

나만 외톨이처럼 부산에 남겨지자 외로움이 밀려들었다. 부모님이 계시던 시골보다 서울에 갈 일이 더 많았고 차츰 나는 서울에 대한 동경을 하기 시작했다.

남동생마저 서울에 살게 되면서부터 외로움은 더 짙어갔다. 그러나 서울은 내게 먼 곳이었다. 나는 지방에 사는 남자를 만나 결혼을 했고 서울은 내가 갈수 없는 먼 이상향 같은 곳이 되어버렸던 것이다. 그러나 인생은 참으로 알 수 없는 것이다.

일 년 만에 나는 남편과 사별을 했다. 큰언니는 힘들어하던 내게 잠자리를 마련해 주었고 내 마음을 다독거려주었다. 나는 다시 기운을 차리고 미용기술을 익히며 서울사람이 되어갔다. 사별에 대한 아픔을 잊어보려 일에 빠져들었고 미용실 원장이 될 거라는 꿈에 부풀기 시작했을 때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 

▲ 창덕궁 [서울시 제공]

그때부터 십칠 년 동안 살기 시작한 곳이 송파이다. 낯설기만 했던 곳, 전국의 농산물이 집결되는 가락동시장이 있다는 것도 알지 못했을 만큼 서울에 대해 몰랐던 내가 한 시간 이내에 있는 거리는 자전거로 누빌 만큼 서울은 이제 내 삶터가 되었다.

무엇보다도 내 자신의 변화된 모습을 보면 서울이 내게 큰 선물을 준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든다. 모든 것에 소극적이고 비관적이었던 내가 서울에 사는 동안 자신감과 확고한 인생관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주민자치센터에서 실시하는 각종 프로그램은 주민들을 위해 항상 열려있고, 여가와 체육활동을 위해 만들어진 공원도 마음만 먹으면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곳이 서울이다.

진취적인 사고와 의지만 있다면 꿈을 성취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어있는 도시가 바로 대한민국의 심장부 서울인 것이다.

사십여 년을 살아오면서 내 가슴에 가장 한으로 남아있던 건 공부를 다 하지 못한 것에 대한 목마름이었다. 가슴속에서 꺼지지 않던 배움의 열망은 내게 새로운 눈을 갖게 해주었다.

드디어 나는 사년 전 마흔둘의 나이로 대입검정고시를 보기 위해 주부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내가 많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공부를 할 수 있었던 건 내 자신의 의지와 가족들의 도움도 있었지만 가까운 거리와 서울의 풍부한 정보망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송파구는 자전거특구로 지정된 곳이다. 자전거도로가 잘 조성되어있어 어디든 자전거로 편리하고 신속하게 이동할 수 있다. 나는 이십 여분 정도 걸리는 학교에 자전거를 타고 다녔다. 공부도 하고, 건강도 지키고, 차비도 절약하며 진한 땀방울을 흘린 덕분에 늦깎이 대학생이 되었고 내년에 졸업을 앞두고 있다.

가끔 마음이 답답할 때면 나는 자전거를 타고 탄천 자전거도로를 달려 한강까지 달린다. 한강의 고요한 물줄기를 바라보며 지나온 시간을 생각하고 앞으로의 일들을 그려보며 차분한 명상에 잠기는 순간이 무엇보다도 좋아서다.

한강! 맨 처음 서울에 와서 한강을 보던 감회가 아직도 진한 감동으로 남아 있다. 그때는 그저 놀라움과 경이로움 때문에 눈을 뗄 수 없는 곳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좀 더 넓고 다양한 시각으로 한강을 바라볼 수 있는 마음의 눈을 가진 것 같다.

서울의 모습은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고 있다. 곳곳에 친환경 테마공원이 조성되어 우리 삶을 풍부하게 채워주고 있다. 하천이 새로운 물길로 거듭나 동심을 자극하고, 여름이면 아이들은 공원의 분수와 인공냇물에서 더위를 식히며 추억을 만들어가고 있다.

머지않아 서울은 생태도시, 친환경도시로 거듭나 녹색물결이 출렁이는 아름다운 곳으로 변모할 것이다. 그만큼 사람들의 마음에도 넉넉함과 여유가 자리 잡아 정이 넘치는 도시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져본다.

“엄마, 나는 서울이 고향이잖아. 그래서 서울이 좋아.” 테마공원에서 실컷 놀다온 중학생 아들 녀석의 목소리가 집안 가득 경쾌하게 울려 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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