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대표적인 궁궐, 경희궁(慶熙宮) ①
조선의 대표적인 궁궐, 경희궁(慶熙宮) ①
  • 나각순 서울시사편찬위 연구간사
  • 승인 2010.11.05 07: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나각순의 ‘서울문화유산 둘러보기’ 25]

경희궁은 종로구 신문로 2가에 자리하고 있으며, 복원된 건물과 터는 사적 제271호로 지정되어 있다. 경희궁은 광해군 9년(1617)에 창건공사를 시작하여 3년 후인 광해군 12년(1620)에 완성되었으며, 당시에는 경덕궁(慶德宮)으로 불리었다.

광해군의 피궁으로 경희궁이 창건되다

경희궁의 건립과정을 기록한 ‘광해군일기’ 권116 광해군 9년 6월 갑진일에 보면 “색문동(塞門洞)에 신궁(新宮)을 건립할 것을 의논하였다. 성지(性智)가 인왕산(仁王山) 아래에 신궐(新闕)을 이미 점지하였는데, 술인(術人) 김일룡(金馹龍)이 또 이궁(離宮)을 색문동에 건립할 것을 청하였다. 즉 정원군(定遠君)의 옛집인데 그 곳에 왕기(王氣)가 있음을 듣고 드디어 빼앗아 입궁하였다”라고 하였다.

당시는 임진왜란으로 재난을 입었던 창덕궁•창경궁이 복구되었고, 새로이 위에서 신궐로 칭했던 인경궁(仁慶宮, 누상동 일대)이 인왕산 아래에 창건되던 때였으며, 동시에 경덕궁 창건에 대한 논의가 있었던 것이다.

▲ 경희궁 자정전. ⓒ나각순

색문동은 선조의 다섯째 아들이자 인조의 친아버지가 되는 정원군의 집이 있었던 곳인데, 이곳에 왕기가 서렸다는 말에 그 집을 빼앗아 궁을 짓게 된 것이다. 그런데 광해군은 경덕궁에 들어가 살지 못하고, 그 15년(1623) 3월에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왕위에서 물러났다. 반정에 의해 왕으로 추대된 인조는 정원군의 장남으로, 정원군은 원종(元宗)으로 추존(追尊)되었다. 결국 색문동 왕기설은 적중한 셈이 되었다.

신궁 창건에 대한 의논이 있은 뒤, 궁궐의 명칭을 경녕궁(慶寧宮) 또는 서별궁(西別宮)으로 하고자 하였다가, 광해군 9년 8월에 경덕궁으로 결정되었다. 경녕궁은 궁이 여경방(餘慶坊)에 있었기에 연유한 이름이고, 임시 궁호(宮號)로 서별궁이 채택된 것이다.

경덕궁은 인조가 즉위한 후에 왕궁으로서의 구실을 확실히 하였다. 인조반정으로 창덕궁이 불에 타버리고, 이듬해에는 창경궁마저 이괄(李适)의 난으로 재난을 입게 됨에 따라, 인조는 선조의 비 인목대비(仁穆大妃)를 받들어 경덕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후 역대의 왕들도 수시로 이 궁에서 거처하면서 정사를 보았다. 따라서 창덕궁을 동궐(東闕)이라 이름하고, 경덕궁을 서궐(西闕)로 이름 하여 조선왕조의 대표적인 궁궐로서 자리를 굳혔다. 영조 36년(1760)에는 ‘경덕’이라는 궁명이 원종의 시호(諡號)인 공양경덕인헌정목장효대왕(恭良敬德仁憲靖穆章孝大王)의 ‘경덕’과 음이 같다고 하여, 이를 피하여 경희궁(慶熙宮)으로 궁이름을 고쳤다.

경희궁의 전각은 창건 후 70여 년이 지난 숙종 19년(1693)에 중수되었으며, 순조 29년(1829) 10월에 큰 화재를 당하여 많은 전각이 타버렸다. 그 이듬해 피해를 입은 전각들을 고쳐 짓기 위하여 서궐영건도감(西闕營建都監)을 설치하고, 순조 31년(1831) 4월에 전각의 영건을 마쳤다.   

이때의 개건역사(改建役事)에 대해서는 장서각에 보관된 「서궐영건도감의궤(西闕營建都監儀軌)」가 남아 있어 상세한 공사내용을 알 수 있다.

이후 철종 11년(1860)에도 부분적인 수리공사가 있었으며, 고종 26년에는 숭정문(崇政門)이 화재를 당하였고, 마지막으로 광무 6년(1902)에 전각의 수리가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철저하게 훼손, 최근에야 일부 복원되다

궁궐의 하나로 중요시되던 경희궁은 일제강점기에 건물이 대부분 철거되고, 이곳을 일본인들의 학교로 사용하면서 궁궐의 자취를 완전히 잃고 말았다.

1907년에는 경희궁의 서쪽 대부분을 일제의 통감부중학(統監府中學)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국권이 강탈된 1910년에는 경희궁은 모두 국유로 편입되었는데, 당시에는 숭정당(崇政堂)•회상전(會祥殿)•흥화문(興化門) 및 무덕문지(武德門址)의 각 회랑, 고종 때 창건한 황학정(黃鶴亭) 등의 건물이 궁내에 남아 있었다.

▲ 인왕산 아래 경희궁. ⓒ나각순

1915년에는 학교명을 경성중학교로 바꾸었고, 1925년에는 중학교가 경기도에 이관되어 경성공립중학교로 개칭되면서 부지 내 건물은 경기도에 보관 전환되었다.

이에 따라 1926년에 숭정전이 남산 기슭의 조계사 본전으로 옮겨지고, 1928년에 회상전∙흥정당(興政堂, 光雲寺로 이건)이 매각되고, 1932년에 흥화문이 박문사(博文寺)의 정문으로 옮겨져 세워지게 되었다.

그리고 관사대(觀射臺)인 황학정도 사직공원으로 옮겨졌다. 궁 터 가운데에서도 동쪽의 약 21,500평이 1922년에 전매국(專賣局) 관사(官舍)를 짓기 위해 잘리어 나갔으며, 1927년과 1928년 사이에는 남쪽 도로에 접한 일부가 나뉘어 팔려, 약 41,319평만이 남게 되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이곳은 서울중∙고등학교로 사용되어 오면서 주변의 많은 부지를 매각하여 본래의 궁터가 크게 위축되었으며, 1974년에 학교를 이전하고 전체부지는 민간 기업에 매각되었다.

그러나 1984년에 이곳을 시민을 위한 공원으로 조성한다는 서울특별시의 계획이 수립되어, 궁궐로서의 복원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1985년 8월부터 숭정전 터를 중심으로 한 발굴조사가 진행되었으며, 올림픽을 계기로 복원작업에 들어가 1995년 흥화문과 숭정전이 복원되었으며, 운동장 일대에는 서울역사박물관(당시 서울특별시립박물관) 건립되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