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의 대표적인 궁궐, 경희궁(慶熙宮) ②
조선왕조의 대표적인 궁궐, 경희궁(慶熙宮) ②
  • 나각순 서울시사편찬위 연구간사
  • 승인 2010.11.12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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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각순의 ‘서울문화유산 둘러보기’ 25]

경희궁은 단지 정궁에 환난이 있을 때 왕이 이를 피해 옮겨가 집무하는 곳이었다. 따라서 그 규모를 상대적으로 작게 하고, 정문과 정전도 단층으로 하였다.

독특한 경희궁의 건물 배치 특징과 구조

경희궁의 건물배치도 경복궁이나 창덕궁과는 또 다른 독특한 형태를 취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 즉 궁의 외전(外殿)과 내전(內殿)이 좌우로 나란히 자리하고 있고, 정문은 오른쪽 모서리에 자리 잡고 있어 정문에서부터 진입할 때는 내전의 앞을 먼저 지나서 오른쪽으로 직각으로 꺾여서 외전에 이르도록 되어 있다.

▲ 서궐도. ⓒ나각순
이는 경복궁이 정문에서 북으로 일직선상의 위치에 정전(正殿)과 그 출입문이 배열되고, 내전이 외전의 뒤쪽에 자리 잡고 있는 것과 크게 다르다. 또 창덕궁이 정문에서 진입하여 오른쪽으로 돌아 외전에 이르고, 외전의 오른쪽 뒤편에 내전이 위치하고 있는 것과도 다르다.

각 건물의 구성을 살펴보면, 우선 외전에 있어서 정전인 숭정전은 궁의 서쪽에 동향하였고, 주위는 행각으로 둘러싸고 사방에 문을 두었다. 숭정전 뒤에는 편전인 자정전(資政殿)이 있고, 그 서쪽에 태녕전(泰寧殿)이 위치한다.

숭정전의 오른편, 즉 북쪽으로는 왕이 신료(臣僚)들을 접하고 강연(講筵)을 여는 곳인 흥정당이 있고, 주변에 왕이 독서하는 곳으로 존현각(尊賢閣)•석음각(惜陰閣)이 있었다. 이상 외전을 구성하는 중심 전각들의 오른편에 내전이 있는데, 그 정침이 회상전이며, 그 서쪽에 융복전 동서에 별실이 있고, 주변에 연못과 죽정(竹亭)이 있었다.

융복전의 동편에는 대비를 모시는 장락전(長樂殿)이 있고, 주변에 용비(龍飛)•봉상(鳳翔)이라는 누각과 연못이 있고, 동편에 연회장소인 광명전(光明殿)이 있었다. 궁의 외부 출입문은 흥화•흥원(興元)•개양(開陽)•숭의(崇義)•무덕(武德) 등 모두 다섯인데, 정문은 동북 모서리에 있는 흥화문이다.

한편 현존하는 건물을 보면, 정전인 숭정전, 정문인 흥화문, 후원의 정자였던 황학정 등이 있다. 이밖에 현재 궁터에는 용비천(龍飛泉)이라는 샘터가 남아 있고, 숭정전 등 중요 전각의 기단(基壇)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이곳은 한동안 학교로 이용되어 새로운 건물이 들어서고, 주변의 조경이 변모되고, 지하 방공시설이 구축되는 등 약간의 변화가 있었으나, 옛 건물의 기단이 일부 남아 있고, 전체적으로 궁궐의 지형이 잘 남아 있었다.

따라서 1995년 현재 정전 복원공사가 마무리되고, 이어 자정전∙태녕전∙흥정당∙회상전∙집경당∙융복전 등이 회랑과 더불어 발굴조사 및 복원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 경희궁 태녕전. ⓒ나각순

또한 경희궁은 일명 ‘야주개대궐〔夜照峴大闕〕’로도 불리었다. 이는 이신(李紳)이 쓴 것이라고 전하는 정문 흥화문의 현판 글씨가 명필이고, 글씨의 광채가 밤에도 훤히 비추었다고 해서 이곳을 ‘야주개’라고 부른데서 유래한다고 한다.

경희궁의 현존 건물과 발굴·복원상황

먼저 숭정전은 경희궁의 정전이므로 건물 주변에 4개의 출입문이 조성되어 있었다. 남쪽에 숭정문(崇政門), 동남쪽에 건명문(建明門), 동쪽에 여춘문(麗春門), 서쪽에 의추문(宜秋門)이 있었으며, 북쪽으로는 후전(後殿)인 자정전(資政殿)의 정문인 자정문(資政門)이 있었다.

숭정전은 정면 5칸, 측면 4칸의 단층 팔작 기와지붕의 건물이다. 초석과 기둥은 원형이며, 공포는 기둥 위에만 짜여진 주심포식(柱心包式)을 취하고 있다. 이 건물은 1618년에 창건된 이래 건물 자체가 재난을 입은 바는 없었으므로, 조선 중기 건축양식을 간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1926년 일본인들의 절인 조계사(曹溪寺)에 매각 이전되어 현재는 동국대학교 구내에 위치하며, 법당인 정각원(正覺院)으로 쓰이고 있다. 일본인들이 강제로 철거한 탓에 원형이 크게 파손되었고, 교실•체육관 등으로 사용되면서 많이 변형되었으며, 현재는 불교식 의례를 행하기에 알맞도록 내부가 변경되어 있다.

종로구 신문로1가에 있는 원래의 터에는 현재 기단부와 전계석(殿階石)이 남아 있는데, 위아래 2단으로 되어 있던 월대 가운데 상월대(上月臺)가 파손되었고, 기단 석축도 헐고 나서 다시 쌓은 것이다. 앞뜰에는 돌을 깔고 품계석(品階石)을 세웠다.

따라서 숭정전의 본래 건물인 정각원 건물을 옮겨 복원하고자 하였으나, 건물이 너무 낡아 동국대 경내에 그대로 둔 채, 새로이 숭정전 정전을 원 위치에 복원하였다.

흥화문은 경희궁의 정문으로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9호로 지정되어 있다. 흥화문은 1618년에 경희궁을 창건할 때 대궐문으로 세운 건물로 궁성의 동쪽에 동향으로 배치하였으며,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2칸에 건평 약 88㎡로 우진각 지붕을 씌운 단층 기와집이다. 초석과 기둥은 원형이며, 평면구성은 전면과 후면에 각각 기둥이 4열로 배열되고, 중앙에 약간 가는 기둥 4열이 배열되어 여기에 중앙문과 협문의 문짝이 설치되어 있다.

흥화문은 창건 때의 건물이 그대로 보존되어 왔으나, 일본이 경희궁을 말살하는 과정에서 1915년 남쪽 담장으로 옮겨졌다가, 1932년에 이토 히루부미(伊藤博文)를 모시는 사찰인 박문사(博文寺)의 정문으로 이전되어 쓰였다. 이후 신라호텔의 정문으로 사용되었으며, 경희궁 복원사업의 추진에 따라 1988년 이전의 위치에 신라호텔 정문과 똑같은 모습의 문이 새로 세워졌다.

▲ 경희궁 흥화문. ⓒ나각순

그리고 1890년에 회상전의 북쪽에 새로 지었던 사정(射亭)인 황학정은 1923년에 민간인에 매각되었다가, 현재는 사직동의 사직단(社稷壇) 뒤편에 옮겨져 있다.

그동안 서울특별시에서는 단국대학교 박물관에 경희궁 터에 대한 발굴조사를 의뢰하여, 두 차례의 발굴조사를 행하였다. 제1차 발굴조사는 1985년 8월 7일부터 11월 20일까지, 제2차 발굴조사는 1987년 3월 2일부터 5월 15일까지 실시되었다. 이어 1989년∙1990년∙1991년∙1993년에 건물복원을 위한 발굴 작업이 명지대학교 한국건축문화연구소에 의해 진행되었으며, 이에 따른 건물 복원공사가 진행되고 현재 자정전․태녕전 등이 복원되어 있다.

특히 제1차 조사에서는 정전인 숭정전의 기단 주위에서 동서행각(東西行閣) 터 및 숭정문 터의 유구를 확인하였고, 원래 이중으로 되어 있던 숭정전의 아래 월대(月臺)도 찾아냈다. 이때 발굴된 유물은 기와조각과 자기조각이 대부분이며, 주로 조선시대 것으로 17세기 작품이 제일 많았다. 그리고 철기·석기·토기 등도 약간씩 출토되어 모두 1천여 점에 달한다.

제2차 발굴조사에서는 제1차 발굴지역을 제외한 경희궁지 전역에 걸쳐 작업이 진행되었다. 이때는 대운동장을 중심으로 하여 소운동장, 당시 서울특별시 축구단 숙소의 서쪽 언덕, 테니스장의 동북쪽 마당, 본관 앞 배수로 주변 및 본관과 후관 사이 동쪽 마당 등을 조사하였다.

출토유물은 기와·전·도자기와 기타 유물 등 500여 점으로 대부분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다. 이 가운데 특히 기와와 전은 조선 후기 궁궐 건축에 사용된 건축 재료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이며, 도자기류는 궁중생활의 일면을 파악하는데 귀한 자료가 된다.

그 후 1995년 3월 16일, 서울특별시립박물관 건립공사 현장에서 경희궁 내의 조선시대 후기 사옹원 터인 지하 7m의 700여평 규모에서 백제시대의 회색 격자문토기, 통일신라의 격자문토기와 고려시대의 토기 등이 출토되어, 이곳이 백제 초기부터 중요 거주 지역이었음을 알게 되는 성과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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