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최초의 임산물 수출품, '잣'
한반도 최초의 임산물 수출품, '잣'
  • 송홍선 민속식물연구소장
  • 승인 2010.11.18 1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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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홍선의 ‘풀꽃나무 타령’ 50]

잣은 한반도의 임산물 중 최초의 수출품이었다. 옛 기록에는 신라시대 사신들이 중국으로 공부하러 갈 때 잣을 가지고 가서 팔고 수학경비로 썼다는 내용이 있기 때문이다.

▲ 잣나무. ⓒ송홍선

당시에 중국에서는 신라에서 생산되는 잣을 제일로 쳤는데, ‘본초강목’에는 품질이 가장 좋은 신라의 잣은 ‘신라송자(新羅松子)’라 하여 중국의 잣과 다르다고 하였다.

송나라 태종 때의 ‘개보본초(開寶本草)’에는 ‘신라의 잣은 신선도를 닦는 사람들이 즐겨먹는 선식이며, 자주 진상하여 온다’고 설명되어 있다.

잣은 우리의 기록에서도 여러 갈래로 나타난다. 과실류로서의 잣은 서유구의 임원십육지(1827년)와 서호수의 해동농서(1799년)에 실려 있고, 먹을거리로서의 잣은 조선시대의 궁중요리서인 진연의궤(1719년), 진찬의궤(1744년), 진작의궤(1765년)와 이수광의 지봉유설(1613년) 등에 나타나 있다.

먹을거리로서의 잣은 생식이나 잣죽, 착유 및 그 밖의 약용 등에 이용된다. 그 가운데 최고의 먹을거리는 잣죽이다.

잣죽은 잣(실백)을 갈아서 쌀 앙금이나 쌀가루와 함께 끓인 것이다. 보양성(補陽性)이 좋고 향과 맛이 좋은 음식이다. 잣죽에 관한 기록은 증보산림경제(1766년), 시의전서91800년대) 등의 조선시대 문헌에 나타난다.

1900년대의 문헌으로는 방신영의 요리제법(1913년)’, 이석만의 간편조선요리제법(1934년), 조자호의 조선요리법(1938년), 이원규의 조선요리(1940년) 이외에 한희순 등이 편찬한 이조궁정요리통고(1957년) 등이 있다.

잣죽의 기록은 여러 문헌에 많이 나타나지만, 언제부터 음식으로 만들어 먹었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잣죽은 필수지방산이 많고 소화가 잘 되어, 병후의 회복음식으로 이용되었다.

▲ 잣나무꽃. ⓒ송홍선

조선시대에는 노인에게 이른 아침의 조반으로 잣죽을 드렸으며, 궁중에서는 식전의 보약(탕약)을 올리지 못하는 날에 각종 죽을 올렸는데 그 중에서 잣죽을 가장 좋은 대용보약으로 여겼다.

뿐만 아니라 옛날에는 첫날밤을 지낸 신랑신부에게 일찍 잣죽이나 깨죽을 먹이는 풍습이 있었다. 신랑신부가 부모님께 인사를 하고 나서 아침을 먹어야 하므로, 시장기를 덜기 위한 한 방편이었다.

잣은 술을 담는데도 쓰였다. 옛날 궁중에서는 왕이 허약해지면 잣죽과 함께 잣술인 백주(柏酒)를 담가 먹었으며, 민간에서는 정월 초하룻날 잣나무 잎으로 담근 백주를 마시면 액을 물리칠 수 있다고 믿었다.

잣은 식용과 더불어 약효 또한 크다. 유효통 등이 펴낸 향약집성방(1433년)에는 비록 하품(下品)에 속하지만 중요한 약재로 소개되어 있으며, 이능화가 쓴 조선의약발달사(1931년)에는 삼국시대의 치유의학편에 잣이 나와 있는 것으로 보아 잣은 오래 전부터 약재로 이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잣은 자양 강장의 효능이 있으며 폐와 장을 다스려준다. 허준이 쓴 동의보감에는 '자양 강장제로 잣죽을 상복하면 더없이 좋다. 또한 신경통, 중풍으로 오는 손발마비와 빈혈에 좋고 피부를 매끄럽게 하며 오장에 골고루 영양을 보충하여 허약체질의 원기를 회복시켜 준다'고 기록되어 있다. 잎을 태운 재는 임질. 매독 등의 성병에 효험을 나타낸다.

한편 오늘날 수정과에 띄우는 잣의 풍미는 우리 음식만이 갖고 있는 멋과 맛이다. 그런데 수정과에 띄우는 잣이 한반도에서 생산된 것보다 중국에서 수입한 것이 더 많다는 이야기가 전하고 있다.

품질이 가장 뛰어난 한반도의 잣(신라송자)만이 우리 식탁에 오르는 날을 기다려 보는 것이 무리인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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