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효의 근간, 종묘 정전
충효의 근간, 종묘 정전
  • 나각순 서울시사편찬위 연구간사
  • 승인 2010.05.11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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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각순의 ‘서울 문화유산 둘러보기’ 5]

종묘는 조선왕조 정통성을 상징하는 건축물 가운데 하나이다. 우리 문화에서 조상들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는 후손은 그 존재의 정통성을 가질 수 없게 되어 정치를 비롯한 모든 사회활동에 지장을 받았다. 국가를 상징하는 봉건왕조의 왕실은 더욱 그렇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조선왕조 왕들의 위패를 모신 종묘는 사직과 더불어 국가를 상징함과 더불어 왕들의 정통성을 계승한다는 의미에서 중요시 되었다. 아울러 그 신성성은 만인의 숭배대상이 되었다.

▲ 종묘 정전 전경. ⓒ나각순

▲ 종묘 정전 내부. ⓒ나각순

조선 왕과 비 49 신위 모셔

종묘는 불천위(不遷位)를 모신 정전과 조천위(祧遷位, 세월이 흘러 옮겨진 위패)를 모신 영녕전 및 부속건물로 구성되어 있다. 그중 정전은 종묘의 중심에 있으며, 배향공신을 모신 공신당과 칠사당(七祀堂)이 같이 있어 그 의미가 더욱 돋보인다.

공신당은 말할 것도 없이 해당 왕의 정치를 보좌한 핵심 신하의 위패를 모신 사당으로, 죽어서도 같이 제향을 받는 것이니 전근대사회의 충(忠)으로 맺어진 군신 간의 관계를 느낄 수 있게 하는 공간이다. 태조의 배향공신 조준(趙浚)으로부터 고종의 배향공신 민영환(閔泳煥)에 이르기까지 91명의 공신들이 봉안되어 있다.

아울러 칠사당은 인간 누구나가 일상의 공간에서 만날 수 있는 운명과 관련된 일곱 신을 모신 것으로 사람이 사계절에 문을 나서는 순간부터 거처ㆍ음식ㆍ길ㆍ후손ㆍ선악의 행위에 이르는 신주를 모셔 왕이 신하와 백성을 위해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즉 모든 사람의 안녕과 평안을 기원하여 나라의 풍요와 평화를 기원했던 것이다.

이렇게 일정한 시간과 공간 속에서 만인을 아우르는 국가 사당으로서의 종묘는 조선왕조 519년을 통하여 역대 왕을 받들어 모시며 국가경영의 기본이념인 효(孝)를 표방하는 신성한 공간이었다.

종묘 정전에는 서쪽을 상으로 하여(西上制度) 제1실인 서쪽 첫 번째 칸에 태조의 신위부터 동쪽으로 차례차례 태종, 세종, 세조, 성종, 중종, 선조, 인조, 효종, 현종, 숙종, 영조, 정조, 순조, 문조(추존), 헌종, 철종, 고종, 순종과 각 왕의 비를 합쳐 모두 49위의 신위가 19칸의 감실에 모셔져 있다.

▲ 종묘 전도.

공신당과 칠사당

종묘 일곽은 사적 제125호, 정전은 국보 제227호로 지정되어 있고, 종묘는 1995년 12월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 정기총회의 정식 의결을 거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종묘제례는 조선시대에는 종묘 정전에서 매년 봄ㆍ여름ㆍ가을ㆍ겨울 및 섣달에 날을 잡아 5대향(五大享)을 지냈으나, 1971년 이후로는 전주이씨 대동종약원에서 매년 5월 첫째 일요일에 한 차례 올리고 있다.

5월은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 날이 연이어 있어 가정의 달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 의미를 기리기보다 형식에 치우친 행사가 남발되고 있다. 이제 그 본연의 가치를 생각한다면, 세계적으로 훌륭한 가치로 인정받고 있는 우리 문화의 조상숭배의식을 보여주는 종묘 정전을 찾는 것도 의미가 있다고 본다. 우리의 효 의식이 점점 옅어지고 있는 시점에서 가족과 조상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는 기회를 가져봄직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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